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6)
26화
“와아아!”
나는 영혼 없이 입으로 박수 소리를 냈다. 그리고 눈을 최대한 동그랗게 뜬 다음, 최고로 극적인 연극 톤을 뽑아냈다.
“너-어무 교양이 있으시다아! 어제 웬 잡놈의 핏줄이냐며 목청껏 소리친 분이라곤 상상할 수가 없네요!”
“바로 이런 게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겁니다, 아인슬리. 블라스코는 언제 어디서나 기품을 잃지 않아야 하며, 평민은 물론이고 같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귀감이 되어야 하는……”
“괜찮아요! 저는 ‘잡놈’ 같은 저급한 단어는 쓰지 않으니까요.”
나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방글방글 웃었다.
“못 배워 먹었다며 평민들을 비하하지도 않고요. 요즘 누가 그런 구닥다리 사고방식을 가져요?아휴, 평민 신분으로 블라스코 기사단장 자리를 꿰찬 헤겔 경이 들었다간 몹시 화를 내겠는걸!”
시벨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암만 인상 구겨 봤자지, 살기도 못 내뿜는 인간이.
“블라스코의 성을 달고 그런 천박한 표현으로 상대를 비하하다니. 기사도 정신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것 같아요. 저 같으면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고 다닐 거예요.”
나는 따발총처럼 다다다 쏘아 대며 열린 마차 문밖을 힐끔거렸다.
환상의 타이밍으로, 공작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벨은 내게로 몸을 틀고 있는 바람에 공작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
마차에 오르려던 공작이 나와 시벨을 발견했다. 오늘도 잘생긴 아버님의 용안은 만면에 드리운 피로감마저도 예민미로 승화하고 있었다.
공작이 차분히 목소리를 냈다.
“시벨 군, 왜 내 마차에 올라가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헛, 각하.”
시벨이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청옥의 블라스코를 어쩌고로 시작하는 그의 인사는 공작에게 단칼에 가로막혔다.
“왜 여기 있냐고 묻잖아.”
“아, 저는 카티샤 아인슬리의 감시관 역할을 맡아, 수도까지 아이를 지켜볼 의무가 있습니다. 해서……”
“감시관이고 자시고, 난 자네 같은 아들은 둔 적이 없는데.”
공작이 마차 벽을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벽에는 블라스코의 상징 앰블럼인 칼과 푸른 나비가 마차에 멋들어지게 그려져 있었다. 나비의 날개에 그려진 정교한 소용돌이무늬가 인상적이었다.
바로 저 무늬가 블라스코의 직계와 방계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왜냐, 방계의 엠블럼에는 나비 날개에 무늬가 없기 때문이다.
그 직관적인 차이는 블라스코의 직계와 방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해 성골과 진골 수준의 차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공작의 말뜻은, 여긴 직계들만 탈 수 있는 마차이니 방계 나부랭이는 눈치껏 꺼져라 이 뜻이었다.
공작이 짧게 일갈했다.
“나가.”
와, 혈통 만만세다.
시벨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결국 공작이 짜증을 냈다.
“혹시 눈이 안 좋나? 아니면 귀가?”
“아닙……니다.”
시벨이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 팔을 덥석 움켜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함께 내리겠습니다. 가죠, 아인슬리. 여긴 블라스코의 직계들만 탈 수 있는 마차입니다.”
우악스러운 힘에 나는 반쯤 의자에서 들렸다. 공작의 미간이 꿈틀거림과 동시에, 그의 뒤에 서 있던 베르너가 역정을 냈다.
“좋게 말하니까 못 알아듣네, 시벨 블라스코. 당신만 내리라고.”
“고, 공자님.”
“쟨 앞으로 우리 집에서 키울지도 모르겠지만, 그쪽은 아무리 기를 써도 가능성이 제로잖아. 내려, 그러니까.”
공작과 공자가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시벨이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마차에서 내렸고, 공작과 베르너가 대신 올라왔다.
“창가에 앉을 거야, 오렌지?”
“네. 그래도 되나요?”
“되고 안 되고가 어디 있어? 앉고 싶은 곳에 앉아.”
흘끗 문밖을 건너다보니 시벨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그의 뒤로 아르닌이 다가왔다. 시벨을 흘끗 일별한 그녀가 고개를 슥 기울였다.
“누구세요?”
그 무신경한 한마디가 시벨의 굴욕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시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예…… 시벨…… 블라스코가 공녀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럼 일단은…… 제가 뒤따르는 것으로…….”
“알겠으니 비켜.”
아르닌은 마차 앞을 막은 시벨을 쓰레기 치우듯 휙 옆으로 밀치곤 마차에 올랐다.
오만하게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등을 기댄 아르닌과, 손등에 비스듬히 턱을 괸 채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베르너, 어느새 다시 무릎 위에 서류를 올려 둔 공작.
직계 셋 중 더 이상 시벨에게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나는 새삼스레 감탄했다.
‘이게 직계의 힘이구나.’
“수도에서 뵙겠습니다. 그럼…….”
시벨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선 빠르게 뒤의 마차로 사라졌다.
아유, 꼬시다. 시원하다.
나는 도망치듯 마차에 오르는 시벨을 향해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출발할 때의 작은 소란을 제외하면, 수도로 향하는 여정은 무척 순조로웠다.
이동국에서 텔레포트 진을 이용하기 위해 마차에서 내릴 필요조차 없었다. 야외에 그려진 거대한 텔레포트 진은 마치 헬리콥터 이착륙장을 연상시켰다.
마차가 진 위에 멈춰 서자, 곧바로 마법이 발동했다.
번쩍이는 섬광이 마차 주위로 솟구친다 싶더니, 어느새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수도 펠라임 인근의 이동국이었다.
순식간에 마차로 보름은 걸릴 거리를 워프한 셈이다.
‘역시 현대 과학보다는 판타지 문명이 한 수 위인 것 같아.’
수도 안에서는 텔레포트가 엄중히 금지되어 있었기에, 여기서부터는 다시 마차가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수도 관문은 물론 프리 패스였다.
“와아아…….”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와 본 수도 펠라임은 그야말로 굉장했다. 고도로 발전한 마법의 진수라는 별칭에 맞게, 거리 곳곳에 마법의 흔적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창문에 바짝 달라붙어 휘황찬란한 도시의 모습을 구경했다.
저 멀리, 금빛 황성이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뒤로 색색의 마법 열기구들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여기가 그 땅값 비싸다는 수도구나. 한국의 집값 정도는 거뜬히 뺨 때린다는 그곳……!
“바로 앉아라, 꼬맹.”
“옙.”
나는 얼른 제자리에 착석했다.
중증 워커 홀릭 공작은 마차에서조차 업무를 보고 있었다.
베르너는 등받이에 기대앉아 명상이라도 하듯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고, 아르닌은 대놓고 좌석의 쿠션을 베개 삼아 낮잠을 잤다.
넷 중 들뜬 건 나뿐인 모양이었다. 나는 몇 분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다시 창문 가까이 붙어 앉았다.
한쪽 눈만 뜬 베르너가 못마땅하게 한 소리 했다.
“촌스럽긴.”
촌스럽다니? 같은 지방인들끼리 이러지 말기로 해요, 오빠.
나는 딴청을 피우며 그에게 슬며시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주었다. 호다닥 도로 접었는데,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베르너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야, 그 기분 나쁜 손동작은?”
“최고라는 뜻이에요. 와아, 공자님 최고. 도시 라이프 최고.”
아스트로카 제국의 수도, 펠라임. 모든 수도가 그렇듯, 이곳은 제국의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설레지 않을 수가 없다.
드디어 서류에서 눈을 뗀 공작이 마차 벽을 두 번 두드렸다.
“바로 중앙은행으로 간다.”
방계 쪽에서 제안했다는 첫 번째 시험은 간단했다. 사실 시험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좀 어폐가 있을 만큼 간단했다.
바로 아스트로카 중앙은행에 있는 헤르젠 할아버지의 금고를 여는 것이었다.
블라스코 측에서는 당장 금고를 개방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첫 번째 시험으로 채택할 만했다.
중앙은행의 금고는 삼엄한 경계로 둘러싸인 접근 금지의 영역이었다. 개인 금고 신청을 하면 신청인의 신체 정보나 고유의 파장을 이용해 잠금 장치를 설계한다.
소유자가 사망할 경우 금고는 자동으로 잠긴다. 헤르젠 할아버지의 금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잠긴 금고를 여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랐다. 그리고 그 방법은 본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모른다.
금고의 주인이 설정해 놓은 퀴즈를 풀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트랩을 제거해야 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도둑이 드는 걸 방지하기 위해 혼동 마법을 걸거나 함정을 파 두기도 한다.
그러니 거기 뭐가 있을지, 일단은 가 봐야 안다는 뜻이다.
창밖 저 멀리서 중앙은행의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강암으로 견고히 쌓아 올린 외벽과 튼튼한 아홉 개의 기둥이 돔을 떠받치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수집하셨다는 고대 미술품과 유물 컬렉션이 바로 저기 들어 있다.
더불어 백만 개의 금화도.
와, 백만 개라니. 감히 상상도 못 하겠다.
“아, 떨려…….”
아르닌이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그녀가 내 귀에 이미 50번은 족히 한 질문을 또 속삭였다.
“너 정말 자신 있는 거 맞지?”
“저만 믿으세요, 공녀님.”
일단은 그렇게 허세를 부려 보았다. 뭐, 할아버지가 수를 써 놓으셨든가, 아니면 생전에 내게 무슨 힌트라도 주셨겠지.
‘일단 할아버지가 남기신 것들은 다 챙겨 오긴 했는데.’
가져온 건 녹이 슬어 무뎌진 열쇠, 그리고 태엽이 고장 난 오르골과 시간이 맞지 않는 회중시계였다.
영락없는 고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혹시 이것들에도 할아버지가 무슨 수를 써 놓았을지도 모른다. 일단 금고니까 열쇠가 유력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단순할 것 같진 않았다.
생각하는 사이 마차가 은행 앞에 멈추어 섰다.
베르너와 아르닌이 먼저 내리고, 이어 공작이 내렸다. 아직 키가 작은 내겐 마차의 높이가 너무 높아서, 나는 공작에게 안겨 안전하게 땅을 디뎠다.
‘정 수가 없으면, 일단 로켓을 열어서 그 안에 들어가 있자.’
거기 머무르는 동안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으니까. [지.우.마> 뒤지면서 머리 굴리다 보면 묘책이 나오겠지.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들을 따라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