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7)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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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로카 마법의 진수, 50여 년 전 딱 한 번 침입자를 허용한 뒤로는 단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다는 절대 불가침의 영역.
아스트로카 중앙은행은 그 명성에 걸맞게 수십 겹의 결계와 감시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은행 안에는 인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은행 업무를 보는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마법으로 움직이는 모래 인형들이다.
모래에 진흙과 물의 정령이 직접 내주는 이슬을 섞어 반죽한 뒤 적당한 형태로 빚고, 마법으로 행동 지침을 입력하면 이 세계 버전의 ARS, 즉 자동 응답 시스템 기계가 만들어진다.
그런 종류의 모래 인형들을 통칭 두올이라고 부른다.
차이가 있다면 이쪽 세계의 로봇들이 좀 더 인간 형태에 가깝고, 훨씬 패셔너블하다는 것 정도일까.
정장을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보타이까지 맨 모래 인간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헤르젠 페르난디트 블라스코의 명의로 된 금고를 해금하러 왔네.”
“서류는 모두 준비해 오셨나요?”
공작이 제미언에게 고갯짓하자, 앞으로 나선 제미언이 은행원에게 두툼한 서류 봉투를 건넸다. 헤르젠 할아버지의 사망 신고서와 공증받은 유언장, 그리고 내 신원 조회서와 범죄 경력 회보서 등이 들어 있었다.
“대리인, 루티어드 아셀 블라스코 본인 되십니까?”
“그렇네.”
“이쪽은 카티샤 아인슬리 본인이신가요?”
“제가 아니라 이쪽입니다. 아기씨, 이리 오세요.”
제미언이 얼른 내게 손짓했다.
머뭇거리는 내 등을 베르너가 툭 밀었다.
나는 주춤거리며 은행원 두올에게 다가갔다.
두올의 모래로 된 얼굴에는 이목구비 중 반이 넘게 없었다. 눈, 코, 귀 없이 타원형으로 빚은 머리에는 초승달 모양으로 뚫린 입만 있을 뿐이었다. 그 입술은 시종일관 친절한 서비스용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카티샤 아인슬리 본인이신가요?”
나는 잔뜩 긴장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람처럼 움직이는 모래 인형에 대해서는 할아버지에게 익히 들은 적이 있었다.
마법 관리국에서 오로지 황성과 중앙은행의 보안을 위해서만 제작하고 투입한다는 두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뇌물과 매수에 사사롭게 흔들리는 일이 없고, 그 어떤 권력자에게도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의 몸에는 5클래스 이상의 탐지 및 공격 마법이 탑재되어 침입자를 빠르게 수색하고 제거할 수도 있었다.
눈앞에 반투명한 광선이 나타나더니 내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스캔했다.
두올 은행원은 제미언이 제출한 서류와 나를 대조해 보는 듯했다. 곧 띠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두올이 다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확인 완료했습니다. 바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금고가 있는 중앙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진 무기를 모두 반납해야 했다.
나는 조금 질린 눈으로 공작과 베르너, 아르닌의 몸에서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무기들을 바라봤다.
허리에 찬 검뿐만 아니라 몸 이곳저곳에 숨겨 놓은 단도와 독침이 박힌 허리 벨트, 굽을 건드리면 뾰쪽한 징이 수도 없이 튀어나오는 가죽 부츠, 그 밖의 마도구들…….
심지어 뒤따라온 시벨의 재킷에서도 무기류가 한 무더기 나왔다.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는 사람은 나와 제미언뿐이었다.
제미언은 쌓여 가는 무기들을 보며 제가 더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든든하지요, 카티샤 양? 적으로 만나면 살 떨리지만 내가 모시는 주인이라면 무서울 게 없답니다.”
“네에…….”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그렇긴 한데…….
나는 공작이 무표정한 얼굴로 크라바트를 풀어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화려하게 주름 잡혀 있던 크라바트 사이에서는 대체 어디 쓰는 것인지 짐작할 수도 없는 징 박힌 가죽 채찍이 나왔다.
‘항상 저렇게 철저하게 무장하고들 다니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과한 거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대륙 스케일로 악명을 떨치는 블라스코를 감히 건드릴 사람이 누가 있다고?
하지만 나는 곧 황실과 블라스코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수도 펠라임은 아스트로카 황실의 영역이니만큼 모두 평소보다 더 촉각을 곤두세운 모양이다.
각종 무기들을 한가득 실은 수레가 보관실로 사라지자, 두올이 우리를 결계 너머의 텔레포트 진으로 이끌었다. 금고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위한 입구였다.
“헤르젠 페르난디트 블라스코. A 구획-03.”
모두가 텔레포트 진에 올라타자, 두올이 진을 가동했다.
이번에도 공간을 건너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초고도로 발전한 마법의 집약체나 다름없는 기관이라 그런지, 이동국의 텔레포트 진보다 승차감도 더 좋았다.
마법진이 내뿜는 빛이 차차 사그라지며 그 너머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까마득히 거대한 검회색의 석문이 눈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힉!”
나는 나를 굽어보는 번뜩이는 노란 눈과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기절초풍했다.
석문 위에 올라앉은 거대한 마귀가 우리를 향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가고일을 닮은 몸체에 짐승의 사지 대신 인간의 팔다리가 불은 형체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활짝 펼친 날개는 금방이라도 허공으로 솟구쳐 오를 듯 생동적이다.
‘으아, 무서워……!’
“귀어스트.”
나도 모르게 옆 사람의 옷자락을 힘껏 부여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직한 음성과 함께, 달달 떨리는 손등 위로 크고 투박한 손바닥이 내려앉았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고개를 드니 매끈한 턱선이 가장 먼저 보였다.
마귀를 올려다보고 있던 공작이 힐끗 내게로 시선을 내렸다.
“저게 바로 귀어스트다. 네가 승계한 마검에 봉인된 마귀 말이다.”
“아…….”
“블라스코의 시조들이 목숨을 바쳐 봉인한 괴물. 지금이야 형체가 갈가리 찢기고 분해되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검에 녹아들었겠지만, 원래는 저런 모습이지.”
공작이 내 손등을 조금 세게 감싸 쥐었다. 여느 때보다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의 그가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허리를 굽혔다.
그가 내 양손을 꽉 부여잡고 엄숙히 말했다.
“건투를 빈다, 오렌지.”
“……네?”
“아무래도 네 과제는 저것을 상대하는 것인 모양이니까 말이야. 힘내라. 죽지 않을 만큼만 다치도록 하고.”
“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수도 없이 깜빡였다.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설마 쟤 살아 움직이는 건 아니겠지? 금고를 열기 위해서는 저런 것과 맞서 싸워야 하는 거 아니겠지? 그렇게 진부하고 무식한 방식일 리는 없겠지?
‘저 발톱이나 날개 한 짝에 스치기만 해도 500미터는 날아갈 것 같은데!’
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으로 주위를 마구 둘러보았다. 아르닌이 몹시 애석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옛날이야기에 많이들 나오곤 하잖아. 금고 앞을 지키는 괴물에 대해서 말이야. 혈혈단신으로 마귀를 상대하는 것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유감이네.”
“도와주고 싶어도 아까 봤다시피, 대항할 무기를 다 빼앗긴 채라. 미안하게 됐다, 꼬마.”
베르너가 옆에서 거들었다.
거참 다들 너무하네. 나는 실없이 킬킬거렸다.
“뭐야, 왜 다들 진지해……? 농담도 참…….”
그러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온몸의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설마 진심이야? 나는 당장에 뒷걸음질 쳤다.
“저 안 할래요. 그러면 저, 저 기권……”
“안 하긴. 이미 돌아가는 길은 사라졌는데.”
공작의 말대로였다. 황급히 돌아본 어깨 너머에는 방금까지 멀쩡하던 텔레포트 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상황을 관전하던 시벨 블라스코가 비웃음을 날렸다.
“시험은 이미 시작했습니다, 아인슬리. 기권할 거면 빨리 말해요. 금은보화는 못 얻을지언정 죽진 않을 테니.”
진짠가 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훔쳐본 마귀 석상의 눈이 일순 샛노란 빛을 내며 깜빡거렸다.
나는 기겁해 꽁지가 빠져라 공작의 뒤로 숨었다.
“아, 안 할래요……!”
이 잔인한 사람들. 부조리한 사람들!
열 살짜리를 마귀가 뼈째 씹어 삼키는 광경을 그렇게도 보고 싶은가?
내가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 제미언이 미간을 문지르며 그들을 저지했다.
“그만들 하십시오. 아주 그냥 재미가 드셨나 봅니다. 아이를 놀리는 못된 어른이 되고 싶으신 겁니까?”
“반응이 재미있잖아.”
머리 위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공작이 내 머리에 턱 손을 얹고 마구 헤집었다.
“저건 돌이다, 돌, 꼬맹이. 똑바로 봐. 안 움직인다.”
“허엉…… 네?”
나는 이미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훌쩍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자, 공작이 자세히 보라며 마귀를 가리켰다.
다시 보니 그것의 눈은 잘 깎은 노란 광물이었는데, 주위의 빛을 반사해 꼭 살아 있는 생물처럼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일그러진 표정이며 역동적인 자세까지, 당장 굽힌 허리를 펴고 날개를 좍 펼쳐도 위화감이 없을 만큼 생생한 석상이었다.
그래, 석상…….
얼떨떨하게 주위를 둘러보니 아르닌은 피실거리고 있었고, 베르너는 대놓고 혀를 차고 있었다.
“돌덩이에게 겁먹기는.”
나는 할 말을 잃고 입만 뻥긋거렸다.
진짜 사이코패스들 아니야……?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가지고 놀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