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28)
28화
내가 황당함에 딸꾹질하는 사이, 아르닌이 먼저 석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블라스코의 금고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대대로 가주에게만 허락되는 공간이라던가.”
그녀가 주먹으로 석문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서? 이 문을 여는 방법을 찾는 게 시험 과제라는 말이지?”
아르닌의 목소리가 기묘하게 고양되어 있었다.
어떤 눈을 하고 있을지 자세히 안 봐도 알 것 같다. 당장 문을 뜯어내고 안으로 뛰어들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눈이겠지.
“이봐, 안내원. 문을 열 수 있는 잠금쇠는 어디에 있지?”
“매뉴얼 권외의 질문입니다. 답변할 수 없습니다.”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두올이 대답했다.
“저의 역할은 고객을 금고 앞까지 안내하고 침입자를 경계하는 것뿐, 여기서부터는 고객님의 몫입니다. 안내원은 금고의 해금 방법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점을 참고 부탁드립니다.”
나는 조금 막막한 심정으로 석문을 바라보다, 용기 내어 공작의 뒤에서 나왔다. – 날 골려 먹은 데 대한 복수로 그의 재킷에 코 밑을 닦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입구 쪽으로 가까이 다가간 뒤에야 석문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두 쪽의 문이 맞물린 한가운데 손바닥만 한 톱니바퀴가 달려 있었다. 톱니 끝은 각각 다른 숫자와 알파벳을 가리켰다.
시험 삼아 톱니 가운데의 홈을 힘껏 돌리니 톱니가 돌아가며 화살표 끝이 숫자 5를 가리켰다. 위쪽의 비어 있던 일곱 칸 중 한 칸이 찼다.
5⎕⎕⎕⎕⎕⎕
‘자물쇠 같은 거구나.’
어디에도 할아버지가 남긴 녹슨 열쇠를 꽂아 넣을 만한 구멍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럼 꼼짝없이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린다는 소린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는 자물쇠 바로 아래에 음각된 글귀를 발견했다.
[나의 향이 고이는 곳나의 혼이 머무는 곳
나의 젊음이 타오르는 곳
나의 벗이여, 나의 연인이여, 나의 노래들이여
우리는 먼 길을 되짚어 돌아가리라
그대는 역행하는 것들의 시작점에 있으리]
“어……?”
나도 모르는 사이 얼떨떨한 탄성이 튀어 나갔다. 아르닌도 나와 비슷하게 그것을 발견한 듯했다.
내가 멍하니 그 글귀를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아르닌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블라스코 영령의 추모 시편이군, 조금 변형한 것 같기는 하지만.”
“시편……?”
“그래.”
아르닌이 나직하게 어떤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그대의 향이 고이던 곳그대의 혼이 머무르던 곳
그대의 젊음이 타오르던 곳
우리의 벗이여, 우리의 연인이여, 우리의 노래들이여
먼 길을 떠나가는 그대
역행하는 것들의 시작점에서 다시 만나리]
내게도 귀에 익은 음률이었다. 나는 서둘러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당겼다.
“언니, 그 노래, 뭐예요?”
“마검의 영령이 된 역대 가주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추모곡의 일부다.”
대답은 등 뒤로 저벅저벅 다가온 베르너에게서 돌아왔다.
“평생을 블라스코에 헌신하고, 숨이 다한 이후에도 영령으로서 억겁의 시간을 마검의 봉인에 바칠 가주들에게 표하는 예우지. 왜 이런 식으로 변형하여 새기셨는지는 모르겠군.”
원문이 따로 있다고? 뜻밖의 사실에 내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아르닌이 멀찍이 물러나 있던 두올에게 손짓했다.
“이 금고를 여는 자가 주인인가? 이것 정도는 대답할 수 있겠지?”
“금고를 여는 자는 출입할 자격과 동시에 금고의 잠금 방법을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얻습니다.”
답을 들은 아르닌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횟수에 제한이 있나?”
“매뉴얼 권외의 질문입니다. 답변할 수 없습니다.”
어느새 베르너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시벨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시벨의 만면에는 채 숨기지 못한 탐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모두의 머릿속에서 상속 시험이라는 구실은 잊힌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문 뒤에 있는 것은 단순히 백만 골드가 아니라 400여 년을 묵어 온 블라스코 역사의 보고였다. 심지어는 제미언조차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가장 먼저 푸는 사람이 금고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하지만 여기 죽치고 앉아서 0000000부터 9999999까지 하나씩 다 눌러 보면 끝나는 거 아니야……?’
물론 며칠은 거뜬히 붙들고 있어야 할 노가다겠지만, 이 뒤에 가득 쌓여 있을 것들의 값어치를 생각하면 아주 못 할 짓도 아니었다.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르닌이 톱니를 휘리릭 돌렸다.
“블라스코의 헌시 1권 34페이지 11째 줄부터 16째 줄까지.”
1, 3, 4, 1, 1, 1, 6.
아르닌이 마지막 숫자를 입력하자 빈칸이 전부 찼다. 숫자들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석문 속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머리 위에서 쩌적, 하고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석문 위의 마귀의 자세가 바뀌어 있었다. 분명 좀 전까지는 네발로 웅크려 앉은 자세였는데, 어느새 두 발로 앉아 허리를 펴고 있었다.
기분 탓인가, 노란 눈의 시선이 정확히 이쪽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석상의 발밑에 붉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
이번에도 역시 아무도 웃지 않았다. 누군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베르너가 침착하게 사태를 요약했다.
“공격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군. 아마도 일정 횟수 이상 실패하면 저것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붓나 본데. 수식을 보니 최소 6서클 이상이다.”
“……그래 봤자 돌조각이지.”
“그리고 우리는 무기가 단 한 개도 없고. 맨주먹으로 상대하겠다면야 말리지는 않겠다만.”
대꾸할 말을 잃은 아르닌이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베르너가 한심하다는 기색을 풀풀 풍기며 동생을 노려보았다.
“시편의 페이지와 줄 수라니, 그렇게 단순할 리가 있나. 멍청한 누이야.”
“닥쳐. 그냥 한번 해 본 거니까. 그러는 너는 뭘 생각했길래 유세야?”
“일곱 자리니 가장 유력하게 떠오르는 건 날짜가 아닐까 싶은데.”
날짜……! 뒤에서 시벨이 홀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삐 앞으로 나선 시벨은 남매가 만류하기도 전에 톱니바퀴에 손을 댔다.
“시벨, 지금 뭐 하는……”
아르닌이 벌컥 성을 내기도 전에 번호가 맞춰졌다.
4, 0, 3, 0, 8, 1, 8.
시벨이 입력한 숫자들은 이번에도 붉은 잔상만을 남기며 석문의 표면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머리 위에서 조금 전보다 더욱 선명하게, 암석이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어스트의 석상이 포효하듯 상체를 세우고 날개를 더욱 활짝 폈다. 몸체에 붉은 마법진이 한 개 더 떠올랐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빠르게 옭아 들어가며 수식을 완성하고 있었다.
“……!”
“선대가 공작 위를 계승한 날짜가 아니라면, 루테 블라스코의 기일이라든가…….”
탐욕으로 번뜩거리는 눈을 한 시벨이 다시 톱니에 손을 가져갔다.
4, 2, 6, 0, 7, 1, 2.
다음 번호 역시 오답이었다.
이제 석문은 눈에 띄게 진동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마귀가 소름 끼치도록 낮게 그르렁거렸다. 공기가 불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이것도 아니라면……!”
시벨은 이것이 내 상속 시험이라는 걸 까마득하게 잊은 듯했다. 그럴듯한 날짜란 날짜는 죄다 맞혀 볼 기세였다.
그때였다.
“어딜 끼어들어? 방계 따위가.”
뻐억 하는 심상찮은 소리와 함께 시벨이 맥없이 날아갔다. 베르너가 팔꿈치로 그의 턱 아래를 정확히 가격한 것이다. 이어 아르닌이 발로 그를 퍽 걷어찼다.
“감시관은 시험에 개입할 수 없다는 걸 잊었나 보지? 물러나.”
시벨이 요란스럽게 돌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마귀 석상의 동태를 살피는 베르너와 아르닌의 낯에 초조함이 스쳤다. 그들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기회는 한 번…… 정도 남은 것 같은데. 수식이 얽히는 속도를 보니까.”
“씨×, 저놈 때문에 횟수를 두 번이나 낭비했잖아.”
아르닌이 험악하게 지껄이면서도 슬쩍 내 기색을 살폈다. 처음에 섣불리 금고에 손을 댄 게 미안한 듯했다.
원래 같았으면 나 역시도 화가 좀 났을 것이다.
횟수에 제한이 걸려 있다는 걸 알게 된 마당에 멋대로 톱니를 돌리는 건 정작 시험을 봐야 하는 당사자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짓거리다. 마지막에 공격당하는 건 결국 내가 될 테니까.
아르닌이야 몰랐다고는 해도, 시벨은 다분히 의도적이지 않았냔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저 탐욕스러운 놈을 발로 차 줘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 나는 조금 우울해졌다.
‘……아니야.’
나는 석문의 시편을 하염없이 바라만 봤다.
시편의 페이지, 할아버지나 블라스코와 관련한 날짜.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저 암호를 절대 해독할 수 없다.
사실 이 자리의 누구도 석문을 열 수 없을 것이다. 아스트로카 중앙은행의 금고를 내게만 상속하겠다는 할아버지의 유언은 반드시 지켜진다.
저 수수께끼의 답을 아는 이는 세상천지 오로지 나 하나뿐일 테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