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3)
3화
* * *
말보다 머리가 빠르고, 머리보다는 주먹이 빠르다는 유구한 악명의 블라스코.
대대로 제국군 사령관을 배출한 가문이라 군 세력과도 결탁해 있어, 웬만한 기행은 덮고 넘어가 준다더라.
몇 대 전부터는 뇌까지 근육으로 되어 있다는 오명을 씻어 내기 위함인지, 막대한 자금을 들여 사업을 시작했다.
광물 채굴업과 제철, 그리고 연금술. 한마디로 종합 무기 사업이다.
오랜 세월 축적한 검가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발휘해 제작한 질 좋은 무기들은 이웃 왕국들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세를 불리고 부를 쌓으니 블라스코가 속한 7귀족회에서 그들의 발언권이 커지는 건 당연한 순서.
군부는 물론이고 재계와 정계까지 손아귀에 쥐려는 그 무식한 담대함은 황제도 한 수 접어 줄 정도라더라.
그 범상치 않은 명성만큼이나 블라스코의 본가 역시 굉장한 위용을 자랑했다.
저택이 아니라 궁전이라고 해도 믿겠다. 웅장하게 버티고 선 원기둥들과 상앗빛 외벽에 양각한 역대 가주들의 석조 부조물들이 방문객을 위협적으로 굽어보았다.
입구와 마주한 홀 한가운데는 블라스코가의 상징인 마검을 조각한 대리석이 버티고 서 있었다. 내부가 휘황찬란한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당장 앞길을 궁리하기만도 바쁜 나는 한눈을 팔 새가 없었다.
‘공작을 만나면 일단 납작 엎드린다.’
뭐든 과하면 체하는 법.
나는 깔끔히 유산을 포기하고 다른 쪽으로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상속 포기 각서를 써 주는 대가로 집 한 채만 양도받을 순 없겠냐고 물어봐야지.’
수도의 저택 같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난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텔파의 3층집이면 충분했다.
거기엔 나와 할아버지의 10년간의 추억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어디든 등 대고 누울 수만 있으면 살기 마련이라지만, 이왕이면 그곳에서 계속 살고 싶었다.
‘그 정도도 안 해 주려나?’
헤르젠 할아버지도 안 계신다 하니, 날 지켜 줄 건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유언장 한 장뿐이었다.
‘어린애가 속물적이라면서 슥삭 처리해 버리는 건 아니겠지?’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사람이 이래서 욕심을 부리며 살면 안 되나 보다.
나는 머리에서 김이 나도록 살길을 궁리하며 제미언의 뒤를 따라갔다.
그가 나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섬세한 금빛 무늬가 새겨진 커다란 문 앞이었다.
“각하, 카티샤 아인슬리 양을 모셔 왔습니다.”
어떡해, 공작의 집무실인가 봐!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안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와.”
낮고 건조한 음성이었다.
제미언이 서재의 문을 활짝 열었다.
나는 주춤주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재 안의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로지 한 사람,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햇빛이 정면으로 들이치는 창가에 기대선 장신의 사내만이 시선을 옭아맸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기백이 압도적이었다. 그는 온몸으로 자신이 명망 높은 검가의 주인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것보다도…….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맨손으로 곰도 때려잡는 사람이라며……?’
공작은 헤르젠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서 열심히 젊은 버전을 떠올리며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그는 칠흑 같은 흑발을 깔끔하게 쓸어 넘겨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내고 있었는데, 굵직한 얼굴선과 치켜 올라간 눈매가 예민하고 야생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청색 눈동자는 사파이어처럼 영롱한 광채를 내뿜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저 푸른 눈동자는 블라스코의 직계의 대표적인 특성이었다.
공작은 소문처럼 깡패라기보다는 오히려 명예를 아는 올곧고 냉철한 기사에 더 가까워 보였다. 수염 숭숭 난 근육질의 털보 산적을 생각했던 나로서는 놀랄 노 자였다.
한동안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공작이 마침내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서? 저 아이가 그 말도 안 되는 유언장의 주인공이란 말인가?”
공작은 낮게 내리깐 목소리마저도 미남이었다.
나는 잠시 그의 수려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퍼뜩 마차 안에서 교육받은 인사법을 떠올렸다.
“처, 청옥의 블라스코에 마검의 가호가 있기를. 카티샤 아인슬리가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얼른 허리를 구부렸다.
이제 고개를 들라고 하면…….
들라고…… 하면…….
‘내 이럴 줄 알았어.’
나는 집무실 바닥에 깔린 카펫만 하염없이 보며 한숨을 쉬었다.
공작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몸을 펴서는 안 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암만 미남이라도 악당은 악당…….
그의 앞에 허리를 반으로 접은 채, 고단한 침묵이 흘렀다.
물론 고단한 건 나 혼자였다. 입술이 절로 삐죽여졌다.
‘유치하게, 암만 맘에 안 든다고 해도 열 살짜리를 이렇게 괴롭히고 싶을까?’
이런 식으로 기선 제압 안 해도 이미 제압당했거든요. 허리가 뻐근해져 오기 시작했다.
체감상 몇 분이 지난 후에야, 정수리 위로 차디찬 음성이 떨어졌다.
“저게 올해 몇 살이라고?”
사람더러 저거라니! 저 아저씨는 아무래도 말본새가 단단히 글러먹었다.
제미언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카티샤 양은 올해 열 살이라고 합니다.”
“열 살?”
내가 카펫에 수놓인 독수리를 노려보는 동안, 공작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저 손바닥만 한 게 열 살?”
뭐야? 저 열 살 평균 키거든요!
그러나 공작의 기준은 심히 다른 모양이었다.
“아버님이 굶겨 가며 키웠나? 말라비틀어진 오렌지 같군.”
예고 없는 인신 모독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렌지라 함은 내 머리카락 색을 빗댄 게 분명했다.
‘할아버지한테 나중에 다 일러 버릴까 보다.’
그렇게 속으로 이를 가는데, 공작이 혀를 차며 명령했다.
“허리 펴.”
일단 허리를 폈다. 구겨진 자세로 10분 가까이 있었더니 어째 더 쪼그라든 기분이었다.
“감사합……”
“가까이 와서 얼굴 보여.”
나는 별수 없이 주춤주춤 발을 옮겼다.
책상을 빙 둘러 창가에 선 공작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머리 세 개는 될 법한 키 차이의 압박에 고개를 죽어라 위로 쳐들어야 했다. 그래야 얼굴을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법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공작의 미간에 팬 주름이 메꿔질 생각을 안 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지?’
조금 더 가면 신발 앞코가 닿을 것이다. 또래보다 키가 좀 모자란 편이긴 해서, 8척 귀신 앞에 딱 붙어 있으니 영락없는 땅꼬마였다.
“허, 어떤 영악한 여우 새낀지 상판 좀 보려고 했더니만. 웬…….”
블라스코 공작은 누가 악당 아니랄까 봐 언사가 아주 자유분방했다.
혀를 찬 공작이 제 앞의 책상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젬, 이 애 여기 올려.”
제미언이 성큼성큼 내 뒤로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카티샤 양.”
양쪽 겨드랑이 사이로 제미언의 손이 쑥 들어오더니, 그가 나를 덜렁 들어 올렸다.
나는 허공을 붕 날아 공작의 책상 위에 안착했다. 그제야 우리의 눈높이가 조금 자비로워졌다.
공작은 가까워진 내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주황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이라. 확실히 블라스코의 아이는 아닌 듯하고.”
음성만으로도 사람을 푹푹 찔러 죽일 수 있을 것만 같던 종전보다는 목소리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위압적인 체격과 온기 없는 눈빛은 여전했다.
“대체 어디서 뚝 떨어진 거지, 넌.”
내게 묻는 말 같지는 않았다. 깊어진 눈으로 나를 주의 깊게 살핀 공작은 이내 들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내 짧은 10년 인생이 거기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름은 카티샤 아인슬리. 여자애인 건 딱 봐도 알겠고, 나이는 열 살이랬고. 그다음, 가족 관계부터 시작해, 젬. 오렌지 넌 예, 아니오로만 대답한다.”
“예, 각하.”
본격적인 호구 조사의 시작이었다.
제미언이 엄숙한 표정으로 취조를 시작했다.
“에, 우선 카티샤 양은 10년 전인 제국력 427년 4월 초순 즈음에 선대 각하의 집 앞에 버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갓난아기였고요. 맞나요?”
“예.”
“버려진 아이를 가엾이 여긴 헤르젠 님께서 거두셨다고 합니다. 당시 아기와 함께 남겨져 있던 것은 이름이 적힌 쪽지와 작은 로켓 펜던트 하나뿐이지요. 그 뒤로 지금까지 헤르젠 님의 손에서 자랐답니다. 맞죠, 카티샤 양?”
“그 노인네가 애를 키워? 웃기지도 않는군.”
이번에는 내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공작이 팽 콧방귀를 뀌었다. 삽시간에 도로 심기가 상한 듯했다.
사정을 모르는 내가 봐도 부모 자식 간의 금이 깊다는 걸 알겠다.
‘하지만 그건 공작님 사정이잖아요. 살기 좀 거둬 달라고요…….’
공작의 몸에서 푸른 스파크가 삐죽삐죽 솟구치고 있었다.
온몸이 다 찌릿거려서 나는 양팔을 박박 문질러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제미언이 손뼉을 짝짝 치며 나를 죽음의 마수에서 구해 냈다.
“자자, 각하께서는 저쪽을 보고 계시고요. 카티샤 양은 여기를 봐야죠~. 조금 전에 제가 이야기한 것들이 모두 사실이지요?”
“예에…….”
제미언은 어디의 악당 씨와는 다르게 어린아이를 배려할 줄 아는 상냥한 취조원이었다.
“헤르젠 님 외에 다른 가족은 없지요? 부모님이나 친인척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고요.”
“예.”
“헤르젠 님께서 생전에 카티샤 양에게 유산과 관련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요?”
“예…… 니오.”
청소 열심히 하면 이 집 너 줄게. 이런 으름장도 포함될까요?
악당 공작이 말꼬리 잡는다며 면박이나 줄 게 뻔해 말을 바꾸자, 눈치 빠른 제미언이 얼른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지나가는 말로 장난스럽게 몇 마디 하신 것뿐인데, 딱히 새겨듣지는 않았다는 뜻이죠, 카티샤 양?”
“예!”
바로 그거예요!
“혹시 그런 구두 약속 말고, 증표가 될 만한 물건이나 문서를 남긴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건 말 그대로 농담이었을 뿐이다. 매일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씀만 하지 말고 진짜 생각 있으면 문건이라도 작성해 달라고 장난으로 받아치곤 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어린 게 벌써부터 저렇게 돈만 밝힌다며 혀를 끌끌 차셨다.
제미언이 의미심장하게 확인 사살을 했다.
“정말 남기신 물건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지요?”
“예.”
설마 그 증표가 될 만한 것이라는 게, 할아버지가 묵혔다 팔면 열 배는 더 받을 거라며 던져 준 골동품은 아닐 것 아닌가?
녹슨 열쇠나, 소리도 안 나는 오르골이나, 시간이 안 맞는 회중시계 같은 거.
‘에이, 설마.’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