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30)
30화
‘듣자 하니 이게 블라스코의 자금줄이라던데.’
게스파 어르신이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공작은 금고의 현금에는 관심이 없는 눈치던데. 그럼 방계 쪽에서 전담하는 사업에 필요한 자금이라는 소린가?
대충 메달을 두드려 보니 지난 10여 년간의 지출 내역이 빠짐없이 전부 저장되어 있었다.
“…….”
보통 이런 빼도 박도 못할 거래 내역 같은 걸 반드시 없애려는 세력이 있던데……. 사업 자금이라는 명목으로 현금을 빼돌려 자기 배를 채웠다든가…….
살벌하게 나를 노려보던 첸과 시벨 부자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아니겠지? 설마.’
내가 당장 본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일단은 창을 닫고 메달을 고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내 감이 외쳤다.
‘이건 절대 잃어버리면 안 돼. 나중에 로켓 속에 넣어 놔야지.’
그렇게 또 얼마나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누워 있었을까?
문득 내부의 공기가 무척이나 맑고 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된 유물들의 상태도 무척이나 양호해 보였다. 보존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살라고 해도 살겠어요…….”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역시 나 여기서 살래!
하지만 이 완벽한 공간에는 정말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었다. 아사하기 싫으면 슬슬 나가 보아야 했다.
게다가 밖에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단 비상금을 좀 챙겨 가야 하는데.”
금화의 산 밑에 수레와 삽이 파묻혀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블라스코의 문양을 수놓은 도톰한 공단을 썰매 삼아 엉덩이에 깔고 아래로 쭉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얍.”
치맛자락을 툭툭 털자 금화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나는 삽을 집어 들고 결연한 눈으로 금화 산을 올려다보았다.
“좋아. 한번 파 보자!”
일단 호기롭게 삽을 푹 찔러 넣었다. 그리고 무아지경으로 금화를 캐 가방에 던져 넣기 시작했다.
얄팍한 가죽 가방이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 꾸러미처럼 빵빵하게 부푸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힘겹게 수레 위에 올린 뒤, 유물 컬렉션 전시관 앞을 돌며 필요한 것들을 죄다 때려 넣기 시작했다.
* * *
카티샤가 자신 있게 금고 속으로 들어간 뒤로, 석문 앞에 남은 이들에게는 썰렁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금고의 주인이 바뀌자마자 석문에 새겨져 있던 글귀와 자물쇠 역할을 하던 톱니바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주인이 바뀌었으니 카티샤가 새로이 잠금을 설정할 것이다.
정말로 블라스코의 가주에게만 대대로 물려지던 가문의 금고가 열 살 꼬맹이에게 넘어가 버렸다.
그러나 눈에 띄게 망연자실한 이는 베르너의 주먹에 맞아 턱이 퉁퉁 부은 시벨 블라스코 한 명뿐으로, 정작 가장 속이 쓰려야 할 직계 셋은 영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4270401. 그게 대체 뭔데……?”
아르닌이 톱니가 달려 있던 자리를 노려보았다. 베르너 역시 찜찜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왜 답이 그건데? 궁금증에 가슴이 다 턱 막힐 지경이다.
답은 엉뚱한 곳에서 날아왔다.
“날짜다. 제국력 427년 4월 1일.”
석문에 각인된 시편을 발견한 순간부터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공작이었다.
“10년 전의 날짜라고요? 무슨 의미가 있는 날인데요?”
“아마 선대께서 카티샤를 거둔 날이겠지.”
공작의 간결한 대답에 제미언이 옆에서 아, 하는 신음성을 냈다.
그 둘은 아이의 생일을 알고 있었다. 더는 나오는 게 없을 때까지 신상을 파헤쳤으니 생일을 기억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출생 기록부상의 생일은 분명 3월 21일이라고…….”
“출생 신고야 아무 날짜나 갖다 붙여도 상관없지 않나. 어차피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버려진 아이였다는데.”
헤르젠 블라스코가 있어야 할 곳을 등지고 떠나간 곳의 시작점. 당연히 아이를 거두기 시작한 날임이 틀림없다. 아마 카티샤가 진짜 제 생일로 삼은 날은 4월 1일일 것이다.
아르닌이 설핏 미간을 좁혔다.
“상속녀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해 두셨다고? 그게 뭐야! 너무 간단하고 허술한데…….”
하지만 그렇게 쉬운 문제였던 것치고 아무도 문제를 풀지 못했다. 당사자들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그 둘만의 약속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정말 진심이었던 것 같은데, 그 노인네.’
루티어드는 같은 구절을 반복해 떠올렸다. 그러다 바람 소리처럼 낮은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자장가로 추모곡을 불러 주셨던 모양이다.
그는 그 안에 실은 꽤 따듯한 애정이 녹아 있다는 걸 알았다.
향이 고이고, 혼이 머물고, 젊음이 타오르는 곳. 그 구절은 블라스코의 본가와 영령의 탑이 있는 아르템을 가리켰다.
블라스코의 직계로 태어난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마기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받으며 이른 죽음을 맞아 영령으로 부활하는 데 대한 사명감을 키운다.
사실 영령이 될 운명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받아들이기에는 공포스러운 일이다.
헤르젠 블라스코가 아들들을 키우며 입에 달고 살았던 그 자장가는 본래의 수명보다 이르게 육신을 떠나야 하는 블라스코 가주의 운명을 슬픔과 두려움 없이 자식들에게 심어 주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루티어드가 어렸을 적에는 그랬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게 개사해 부르시진 않았던 것 같은데.’
주어가 ‘우리’에서 ‘나’로 바뀐 것도 그렇지만, 특히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먼 길을 되짚어 돌아가리라……. 그대는 역행하는 것들의 시작점에 있으리.’
당신께서 태어나신 리덴 영지로 돌아간다는 뜻이겠지만, 공작은 그 구절에서 10여 년 전에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이들을 떠올렸다.
‘되짚어 돌아간다라.’
그럴 수 있다면 진작 그랬을걸.
내리깐 루티어드의 푸른 눈에 씁쓸한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깊이 빠지는 것이 무용한 상념이었다. 그는 냉정하게 생각의 고리를 끊었다.
막 공작이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금고의 입구가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휘황한 빛무리는 곧 조그마한 인영을 뱉어 냈다. 마구 헝클어진 주황색 머리카락이 삐죽 나타났다.
제 몸만 한 가죽 가방을 둘러메고 나타난 카티샤가 그들을 발견하곤 상큼하게 웃었다.
“합격!”
즐겁게 외친 아이가 제법 의기양양하게 석문을 가리켰다. 어느새 석문에 부착된 잠금쇠의 형태가 변하고 있었다.
고철이 끈적한 타르처럼 녹아내리더니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석문 꼭대기에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던 마귀의 석상이 거센 날갯짓을 시작했다.
쿠웅- 하고 석상이 문 앞에 착지했다.
잠금 방식이 바뀌었다. 금고의 주인만이 가지는 권한이었다.
아까 놀려 먹었던 것이 마음에 앙금처럼 남은 모양이다. 마귀 석상을 금고의 가드로 써먹다니.
공작이 피실 실소하는 사이, 카티샤가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며 재차 물었다.
“저 합격 맞죠? 그렇죠?”
감독관으로 따라붙은 시벨 블라스코의 표정은 이제 똥 씹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그가 욕심을 버리지 못한 눈으로 카티샤의 금화 가방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투명하게 눈에 보이는 결과에 갖다 붙일 사족이 있을 리가 없었다. 턱이 퉁퉁 부은 시벨이 마지못해 선언했다.
“첫 번째 시험, 통과입니다. 축……하합니다, 아인슬리.”
허공에 상속 시험을 공표했던 각서가 나타났다.
첫 번째 항목 옆에 블라스코의 인장이 쾅 찍혔다. 의심할 여지없이 깔끔한 성공이었다.
* * *
시험을 마치고, 나는 은행 창구에 들러 잡다한 몇 가지의 절차를 거쳤다.
정식으로 자산이 내게 귀속되었음을 증명하는 서류들에 내 지문을 찍고, 서명을 하고, 심지어는 피까지 뽑았다. 향후 본인 확인을 위한 절차라나?
무거운 금화도 수표로 바꾸고, 자산 운용법과 투자 방법에 대한 팸플릿들도 잔뜩 받았다. 그리고 일행의 눈치를 보다 창구의 두올에게 작게 속삭였다.
“403년부터 437년까지, 34년간 금고 입출금 내역서도 뽑아 주세요.”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혹시라도 할아버지 돈을 몰래 야금야금 훔쳐 먹은 쥐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도 할 겸.
은행원 두올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기간이 길어 조회하는 데 시일이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괜찮으실까요?”
“얼마나 걸리나요?”
“10년 이전의 내역은 프로세스상 잠금이 걸리게 되어 있고 또 은행장님의 승인도 받아야 해서, 넉넉잡아 보름 정도 걸립니다. 해 드릴까요?”
“네!”
“네, 접수되었습니다. 직접 받아 가시겠어요? 아니면 패스에 업데이트해 드릴까요?”
“패스로 부탁드려요.”
보름 후에도 수도에 있을지 알 수 없기도 하고, 이왕이면 상시 확인할 수 있는 패스에 넣어 놓는 게 안전 측면에서도 나을 것이다.
“그렇게 도와드리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이제 끝났어요. 감사합니다!”
두올은 비상시에는 패스를 이용해 중앙은행에 직접 연락을 취할 수 있으며, 제국 각 지역에 있는 은행 지부를 통해서도 웬만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 주었다.
‘너무 든든해. 마음이 푼푼해진다.’
나는 보람찬 마음을 안고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