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31)
31화
* * *
은행을 나온 뒤 블라스코 일행과 시벨, 그리고 나는 곧장 수도의 블라스코 타운 하우스로 향했다.
펠라임의 북쪽에 위치한 블라스코 타운 하우스는 아르템 본가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충분히 장엄한 위용을 뽐냈다.
정문 앞에는 금고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마귀 석상이 버티고 있었다. 정말이지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이러니 악당들이라고 소문이 나지…….’
심지어 저택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양쪽이 낭떠러지인 좁고 긴 사잇길을 올라가야 했다. 이쯤 되면 거의 마왕성의 입구라 해도 손색이 없겠다.
아무래도 직계들이 수도에 상경할 때에만 이용하는 저택이다 보니 본가처럼 인근에 드넓은 평지를 끼고 있다거나, 훈련생들의 생활관이나 대장간, 넓은 연무장 등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았다.
몇 번 와 본 적이 있는지, 공작과 베르너, 아르닌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각각 제 방으로 향했다. 이곳에서까지 그 셋의 서식지는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아기씨는 이쪽으로 오실까요?”
천사 제미언이 나를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우연인지 의도한 것인지, 이번에도 내 방은 그 셋의 공간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었다.
본가에서 함께 온 마가렛이 바쁘게 침실을 정리해 주었다.
“자아, 짐은 이쪽에 두시고요. 금고에서 가져오신 것들은 이쪽에 보관해 두세요. 사용인들 중 감히 아기씨의 물건에 손을 댈 이들은 없겠지만, 보안을 철저히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마가렛.”
“감사는요. 오늘 시험 보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푹 쉬시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종을 울려 주세요, 아기씨!”
“네에……. 저기, 마가렛.”
“네?”
마가렛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당기자 그녀가 내게 허리를 숙여 주었다.
친절한 언니. 나는 애정의 표시로 얼른 마가렛의 뺨에 쪽 뽀뽀했다. 기분이 좋을 때만 나오는 나만의 애정 표현 방식이었다.
마가렛이 숨을 헉 들이켜며 입을 틀어막았다.
“아기씨……. 저, 완전 감동…….”
“자주 안 해 주는 건데, 헤헤.”
그러다 나는 문밖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제미언과 눈이 마주쳤다. 제미언이 눈을 반짝이며 두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아기씨, 저는……?”
“으음…….”
좋아. 부자 된 기분이다. 나는 제미언에게도 뽀뽀해 주었고, 마침 지나가다 그 광경을 목격한 키스 경에게도 뽀뽀를 날려 주었다.
이 기분이면 공작은 물론이고 베르너에게도 뽀뽀를 퍼부어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방에 혼자 남은 뒤로도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다.
‘이제 전생처럼 가난에 시달릴 일은 없다.’
새아버지가 운영하던 망하기 직전의 식당 일을 무급으로 돕던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쳤다.
갑작스럽게 떠안게 된 친아빠의 빚 3억에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던 서러운 지난날들도 모두 안녕!
나는 이제는 내 소유가 된 중앙은행의 블랙 카드를 끌어안고 침대를 마구 뒹굴었다.
보증만 잘못 서지 않으면 당장 오늘 먹을 저녁을 걱정하며 살 일은 없다. 무사히 금고까지 넘겨받았으니 이제 딱 하나만 더 있으면 되는데.
‘할아버지 보고 싶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보고 있자니 할아버지의 자장가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듯했다.
“우리는 먼 길을 되짚어 돌아가리라. 그대는 역행하는 것들의…….”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 노랫말을 외는데, 문득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왜 먼 길을 되짚어 돌아온 건 ‘우리’일까?
언젠가 이 비슷한 질문을 할아버지에게 했다.
“그런데 왜 ‘나는’이 아니라 ‘우리’예요? 할아버지 고향 떠날 때 누구랑 같이 왔어요?”
“글쎄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야, 그게! 그럼 그 사람은 어디 갔는데요?”
“거 질문 참 많구먼. 이제 자라, 카티. 키 안 큰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더 물어보았지만, 할아버지는 결국 그 질문에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더 이상 내게 자장가를 불러 주지 못하게 되는 날까지.
‘별 의미 없는 구절일 수도…….’
나중에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다시 물어봐야지. 한참 그렇게 할아버지와의 오손도손한 추억을 되짚어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짐 정리를 할 시간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방 한 켠에 가지런히 놓아둔 커다란 가죽 가방 앞으로 다가갔다.
“자, 어디 한번 꺼내 볼까……?”
아직 헤르젠 할아버지가 주신 용돈이 남아 있어 현금을 더 들고 다녀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인생사 혹시 모르는 일, 삽으로 푹푹 떠 온 금화들은 은행의 민간 업무 창고에서 모두 수표로 바꿔 왔다.
수표 외에도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아 이것저것 집어 온 것들이 가방을 빵빵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럼 이것들을 다 어디다 보관할 것이냐? 염두에 둔 장소가 있다.
나는 목에 걸고 있던 조개 펜던트를 열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조개가 벌어지고, 이젠 익숙해진 붉은 빛이 나를 감쌌다.
눈을 떴을 때는 이번에도 낡고 고요한 방구석의 궤짝 안이었다.
이 공간은 무척 유용한 창고였다. 원래 이곳에 있던 것들을 가지고 나갈 수는 없지만, 외부에서 무언가를 들여오고 가져 나가는 것에는 제약이 없었다.
밖으로 나가는 문도 창문도 없는 이 공간은 무언가를 은밀히 숨기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혹시 몰라 타자기 위의 반투명한 스크린을 확인했으나, 여전히 [지금 우리, 마법처럼>의 연재 회 차는 168 화에 머물러 있었다.
‘대체 무슨 조건을 만족해야 다음 회차가 열리는 걸까?’
아니면 작가님도 뒷수습이 고민스러워 업데이트를 망설이시는 걸까? 아무래도 호미 주방장님에게 군만두 개발에 박차를 가해 달라고 부탁드려야겠다.
이미 선반에는 블라스코 본가에서 며칠간 열심히 배합한 약초 꾸러미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두었다. 궤짝에는 바꿔 온 수표들을 가지런히 깔아 두고, 선반 아래 칸에는 금고에서 꺼내 온 물건들을 마저 채워 넣었다.
텔레포트석 세 개, 절대 부러지거나 날이 무뎌지지 않으며, 무엇이든 베고 자를 수 있다는 마법 단도 하나, 순간적으로 강력한 방패를 불러올 수 있다는 팔찌…….
하나같이 경매장에 내다 팔면 몇백 골드에서 수천 골드까지 거뜬히 매겨질 최고급 마도구들이었다. 유물 컬렉션 보관소에서 적당히 꺼내 온 것들이다. 나도 비상시에 나를 지킬 만한 무기 정도는 필요했다.
‘첸 블라스코와 시벨의 낌새를 보건대, 빈틈을 노려 자객을 보낸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단 말이지.’
탐욕이 번질거리는 눈으로 금고의 잠금에 달려들던 시벨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물론 공작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대놓고 나를 해치는 멍청한 계획을 세우지야 않겠지만, 원래 세상은 요지경인 법. 미리 대비책을 세워 놔서 나쁠 것 없었다.
커다란 짐 가방을 다 털고 나니 이제 딱 하나가 남았다.
나는 거의 내 몸의 3분의 2만 한 그것을 낑낑거리며 끌어안고 다시 궤짝에 몸을 누였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채 3초를 세기도 전에 나는 침실로 돌아왔다.
내가 로켓 속에 집어넣지 않은 것은 날렵한 장검이었다.
“흐음…….”
사실 험난한 미래를 대비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마도구들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
나는 검을 방 한가운데로 간신히 질질 끌고 왔다.
‘와, 무거워.’
보기에는 날렵하고 유려해 가벼운 느낌을 주기에 골라 왔는데, 실상은 딴판이었다. 무겁다. 너무 무거워.
이런 걸 어떻게 한 손으로 들고 사방으로 휘두를 수 있는 거지?
괜한 객기에 한 손으로 검을 들어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택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두 손으로 검 자루를 힘껏 쥔 다음 간신히 들어 올렸다.
손목과 팔뚝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이얍.”
한 발을 뒤로해 무게 중심을 옮기니 그나마 봐줄 만한 자세가 나왔다. 나는 허공을 노려보며 마귀의 노란 눈을 떠올렸다.
“썰어 버리겠어.”
베르너의 대사도 음산하게 읊어 봤다. 음…….
“좀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오그라들어. 나는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검이 허공을 내리그을 때마다 내 몸도 갈대처럼 휘청거렸다.
“이얍, 무슨 꿍꿍이인지 바른대로 불어라, 시벨 쉬끼……!”
무거운 칼날이 허공을 부웅 그었다. 반동을 못 이겨 몸이 검을 따라 반 바퀴 홱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문가에 선 아르닌과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멍청한 소리와 함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뒤늦게 발에 힘을 줘 봤으나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악!”
“야, 너!”
번개처럼 달려온 아르닌이 나를 홱 낚아채지 않았다면 검에 몸을 내던질 뻔했다.
바닥에 반 뼘이나 박힌 검을 뽑아 검집에 넣은 아르닌이 그것을 휙 내던지며 으르렁거렸다.
“똥폼 잡아 가며 대체 뭘 하나 싶어서 봤더니, 아주 두 동강 나려고 작정했지?”
“아닌데…….”
똥폼…….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졌다.
양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사이 정수리로 험악한 잔소리가 우르르 쏟아졌다.
“사람 베는 검이 장난감 같아? 간이 커도 정도가 있지, 진검을 검집도 없이 휘둘러? 애초에 이딴 건 왜 꺼내 온 거야?”
“서, 선물…….”
“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제가 드리는 계약금이에요!”
애초부터 이 검은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아르닌에게 주려고 들고 온 것이다.
블라스코 본가에서 아르닌에게 딜을 제시했을 때, 나는 그녀에게 밤새 썼던 계약서를 내밀었다.
아직 아르닌은 그 계약서에 서명해 주겠다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가문 회의에서 내 편을 들어 주기는 했으나, 엄밀히 따지면 그녀는 아직 내 아군은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아르닌을 완전히 내 편으로 끌어올 기회다.
“저 검이요, 검기의 위력을 끌어올려 공격력을 두 배로 증가시켜 주는 강화 옵션이랑, 위급 시 오러를 불어넣으면 바로 마력으로 전환해 방어 결계를 가동하는 5클래스 마법 수식이 새겨져 있대요.”
“…….”
“그리고 사용자의 체형에 맞춰 검 자루의 그립감과 검날의 형태가 변하는 인체 공학적인 설계가 반영된…….”
말을 이어 갈수록 아르닌의 눈썹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반응하는구나.
“전설의 대장장이 중 한 명인 드워프 야칸의 세 번째 역작이라던데. 대륙에는 이미 수 세기 전에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대요.”
“……설마, 칸소드 Ⅲ은 아니겠지?”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어요.”
나는 방실방실 웃으며 검지를 치켜세웠다. 슬슬 쐐기를 박을 차례다.
“이 검, 야칸이 직접 작업한 설계 단면도랑 강화 재료 리스트, 제련 매뉴얼까지 있어요. 세트로 다 드릴게요.”
과연 이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장담컨대 아닐걸!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