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32)
32화
아르닌은 잠시 석고상처럼 굳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입술만 움직였다.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센스가 좀 있죠? 저도 알아요.”
내가 좀 그런 편이지! 아르닌에게 윙크해 주자 그녀가 나를 꼭 와삭와삭 씹어 먹고 싶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하늘색 눈에서 진한 감동이 흐르지 않았다면 등골이 조금 서늘했을지도 모르겠다.
“좀이 아닌데. 이건…….”
아르닌이 조금 전에 본인이 집어 던졌던 야칸의 검을 소중하게 주워 품에 꼭 안았다. 검 자루에 마구 입 맞추는 그녀의 얼굴에 어느새 행복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야칸의 역작이라니. 이리 와, 내 사랑…….”
역시 열정의 아르닌. 예쁜 언니가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내 마음이 다 푼푼해졌다.
나는 내가 건네준 검의 설계도에 거의 코를 박고 빠져들어 갈 기세의 아르닌에게 결정적인 미끼를 던졌다.
“계약서에 도장 콱 찍어 주시면, 계약 조건대로 다른 강화 재료들도 가져다드릴게요. 순도 99% 마정석이나, 마나 정제수라거나, 그런 것들이요.”
“순도 99%……?”
“말만 하세요. 중앙은행 아르템 지부에 다 주문해 놓을게요. 어차피 제겐 있어도 쓰지 못하는 것들인걸요!”
이제 아르닌은 거의 충격 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돼? 아깝지 않겠어?”
“당연하죠. 할아버지도 그 재료들이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기를 바라실 거예요.”
게다가 이건 맨입이 아니라 엄연히 계약이었다. 그러나 아르닌의 머릿속에 그런 삭막한 계약서 따위는 더는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어쩐지.”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불쑥 손을 내었다. 그러곤 함빡 웃으며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기 시작했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내 동생처럼 생겼더라!”
나는 그녀를 따라 꺄악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어쩌면 아르닌은 베르너보다 눈치는 더 있을지언정 배는 더 단순한 걸지도 모른다.
지금 뽀뽀해 달라고 하면 해 줄지도 몰라!
아르닌의 허리에 착 달라붙으니, 뽀뽀 대신 양쪽으로 돌돌 말아 묶은 내 머리카락을 열정적으로 쪼물거리는 손길이 돌아왔다.
“우리 할아버님은 역시 사람 보는 눈이 탁월하셔. 어디서 이런 귀염둥이를 다 거두셨을까?”
“우리 할아버지가 역시 좀 그런 면이 있으시죠. 대신 언니, 공증 꼭 받아 주셔야 해요!”
“걱정 마. 블라스코는 신의로 맺은 약속을 절대 배신하지 않으니.”
단숨에 아르닌과 나 사이에 신의가 형성됐다.
아르닌이 확신에 찬 동작으로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가 흔드는 대로 달랑거렸다.
그리고 아르닌이 방심한 틈을 타 냅다 뺨에 뽀뽀를 날렸다. 그녀는 조금 놀란 눈치이기는 했지만 순순히 내 뽀뽀 세례를 받아 주었다.
‘예쁜 언니, 너무 좋아!’
아르닌의 열정이 식지 않고 내 금고가 마르는 날이 오지 않는 한, 절대 깨지지 않을 동맹이 성립했다.
* * *
시험이 고작 하루 만에 끝났으니 수도에 오래 머무르지 않을 거라는 내 예상은 틀렸다.
이왕 상경한 김에, 공작은 그간 하지 못했던 펠라임에서의 업무를 처리하고 갈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황성을 방문해 황제를 알현한다거나 하는.
“지방 귀족들은 수도로 상경하면 황제 폐하를 반드시 뵈어야만 한답니다. 마침 세금 징수 기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황실과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았는데요.”
“맞아요. 아스트로카 황실과 외척인 오르겐 후작가에서는 블라스코를 무척 경계하고 있죠. 그래서 더더욱 블라스코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같잖게 견제하곤 한답니다. 어이없죠?”
“아하하…….”
황실을 상대로 ‘같잖게’라는 형용사를 붙여도 되는 건가? 그러나 마가렛은 한술 더 떠 콧김을 내뿜었다.
“블라스코가 정재계는 물론이고 군부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눈꼴신 거예요. 사병 육성을 금지하고 무기 사업을 국유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그게 어디 저들 뜻대로 될까요?”
지금까지 황실이 국유화했다가 말아먹은 산업만 너덧 개가 넘어간다고 했다. 그나마 겨우 붙잡고 있는 게 금융업이라고.
하긴, 그러니 황실에서 아스트로카 중앙은행에 그 귀한 인력이라는 두올들을 수십 씩 투입하는 것일 테다.
그에 반해 블라스코가 3대에 걸쳐 정립해 놓은 가업 구조도는 꼬투리를 잡을 구석이 없을 만큼 견고하고 효율적이었다. 검술 명가로서 수백 년 동안 축적한 기술력과 자본을 바탕으로 칼 같은 분업화를 이룩해 놓은 것이다.
황실 직속 기사단에도 블라스코 문하생 출신들이 대거 섞여 있는 데다 블라스코 자체 기사단의 위력도 상당하다. 심지어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란 무기는 몽땅 블라스코에서 유통한다.
그 지경이니 황실과 오르겐 후작가가 블라스코를 견제하는 것을 넘어 적대감과 두려움마저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이가 좋을 리가 없긴 하구나.’
내가 홀로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마가렛이 억울하게 항변했다.
“하지만요, 아기씨. 블라스코는 지난 수백 년간 아스트로카에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해 왔답니다. 개국 공신 가문인걸요!”
“오오.”
“마검의 수호자 역할을 맡겠다는 초대 황제와의 맹약을 아직까지 이어 가고 있잖아요. 가주님들께서 노년을 희생해 가시면서요.”
듣고 보니 그도 그렇네. 나는 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이쪽은 신의를 지켜 가며 황실에 헌신하고 아스트로카의 국력까지 높여 주고 있는데, 자격지심에 찌든 황실과 후작가가 괜스레 시비를 털어 오는 셈이 아닌가?
내 머리를 공들여 땋아 주던 마가렛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루테 님께서 그렇게 허망하게 가신 뒤로는, 황실과의 화합은 영영 물 건너간…… 어머나.”
나는 거울 속 마가렛이 낭패한 표정을 짓는 걸 놓치지 않고 보았다.
루테. 벌써 귀에 익어 버린 이름이었다. 헤르젠 할아버지의 죽은 둘째 아들이자 현 공작의 동생, 루테 블라스코.
‘아…… 황실과 오르겐 후작가의 계략에 휘말렸던 거구나.’
그제야 블라스코가 아스트로카 황실에 내비치는 적의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정치적 대립각이고 뭐고, 당장 직계 혈족이 죽었는데 곱게 보일 리가.
잠시 숙연해졌던 마가렛이 푸드득 고개를 털었다.
“어머나, 내가 아기씨께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람! 신경 쓰지 마세요! 블라스코는 고작 황실의 협잡질에 굴복할 만큼 내실 없는 가문이 아니랍니다. 대륙 최고의 검술 명가인걸요.”
“으음…….”
이런 걸 물어봐도 되는 걸까?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가렛이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리본으로 고정해 준 뒤 다 됐다며 손뼉을 치는 틈을 타 슬그머니 운을 뗐다.
“그…… 루테, 라는 분은 어떤 분이셨어요?”
마가렛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흐려졌다. 나는 저런 표정을 안다.
할아버지도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저런 표정을 짓곤 하셨다.
한참을 망설이던 마가렛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은 분이셨어요.”
“좋은 분…….”
“누구보다 블라스코에 잘 어울리는 분이셨어요, 아기씨. 정의롭고, 가문을 위해 헌신하시고, 블라스코의 이름을 전 대륙에 떨치신 최강의 검사요.”
마가렛의 목소리가 점차 잠겨 가는 듯했다. 내리깐 그녀의 눈에 투명한 물기가 어른거렸다.
“루테 도련님이 돌아가신 뒤로 공작님께서도 이전과는 많이 변하셨어요. 우애가 워낙 깊으셨다 보니……. 그 일 이후로 이전보다 훨씬 예민해지셨고, 모두의 걱정을 살 만큼 미친 듯이 일에만 몰두하시고, 본인을 돌보지 않으시고…….”
그러나 그녀는 곧 표정을 수습하고, 짐짓 밝게 웃었다.
“루테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보셨다면 틀림없이 마음에 쏙 들어 하셨을 거예요.”
“정말요?”
“그럼요. 아기씨를 돌보다 보면 가끔 도련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거든요. 특히 이렇게 웃으실 때요.”
마가렛이 내 입꼬리에 손가락을 걸고 양쪽으로 살며시 끌어 올렸다.
“이렇게, 엄청 시원스럽게 웃곤 하셨거든요.”
나는 눈만 깜빡거리다가 얼른 씨익 웃어 보였다. 마가렛이 풋 웃음을 터뜨리며 볼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공작님께도 그렇게 자주 웃어 주세요, 아기씨. 다른 무엇보다 훨씬 더 위로가 되실 거랍니다.”
“네!”
그런 것 정도야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환하게 웃으며 마가렛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블라스코의 직계들이 막 출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화려한 정복 차림이라 어느 쪽을 보아도 하나같이 눈이 부셨다.
공작이 나를 발견하기 무섭게 눈썹을 추켜세웠다.
“뭘 반푼이처럼 그렇게 헤벌레 웃고 있어?”
“헤헤…….”
“무슨 속셈이야? 바른대로 말해.”
나는 얌전히 입꼬리를 도로 수납했다. 기껏 생각해 줘도 야박하긴…….
속으로 쳇 소리를 낸 게 겉으로 다 드러난 모양이었다. 머리 위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터지더니, 공작이 내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놓았다.
“사고 치지 말고 놀아라, 오렌지.”
어쩐지 그 툭 던지는 듯한 말이 그래도 아주 조금은 다정하지 않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말투와 비슷하기 때문일까?
역시 아무리 골이 깊은 부자지간이라지만 핏줄끼리 닮은 것은 어찌할 수 없나 보다.
‘그래도 할아버지였으면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볼도 꼬집어 주고 잔소리도 몇 번 더 하고 외출하셨을 텐데.’
그러면 나는 울타리 밖까지 졸졸 쫓아 나가서 나도 데려가 달라고 왁왁거리고…….
하지만 공작에게는 할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음껏 칭얼댈 수가 없었다.
‘아직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니까…….’
너무 달라붙으면 부담스러울지도 몰라.
나는 철없이 매달리는 대신 성숙하고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 주기로 했다.
“네에. 조심히 다녀오세요.”
언니 오빠도 안녕! 나는 그들을 실은 마차가 낭떠러지 사잇길로 멀어질 때까지 손을 붕붕 흔들어 주었다.
떠나는 마차의 뒤꽁무니를 지켜보고 있으니 문득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혼자는 싫은데.
그때, 곁에서 불쑥 나타난 마가렛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팔에 피크닉 가방이 걸려 있었다.
“자, 그러면 우리도 출발해 볼까요, 아기씨?”
“네!”
맞다, 마가렛이 있었지!
나는 조금 침울해졌던 것도 잊고 활짝 웃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