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33)
33화
* * *
블라스코 직계들이 저택을 비우는 오후, 나는 마가렛과 펠라임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아르템에서 떠날 때 수도를 구경하고 오자며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한 참이었다.
“일행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로사도 함께 갈까요? 로사도 무척이나 뛰어난 실력자…… 가 아니라 시녀랍니다!”
“네에!”
“우리 재밌게 놀고 와요, 아기씨!”
마가렛과 로사에게 둘러싸여 신나게 거리로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단지 한 가지 패착이라면…….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계속 이렇게 따라다니실 거예요?”
“안 됩니까?”
내 뒤를 어슬렁거리며 따라오던 시벨이 아주 얄밉게 대꾸했다. 얼굴에 5센티미터는 족히 될 철판을 깐 게 틀림없었다.
“몇 번째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인슬리의 감시관 자격으로 온 겁니다. 싫어도 어쩔 수 없다고 몇 번을 말했죠? 아인슬리는 학습 능력이라는 게 없나요?”
“네에. 너무 시끄럽게 말씀하시는 바람에 귀에 딱지가 앉아서 어느 순간부터 못 들었나 봐요.”
죄송하게 됐네요오. 시벨이 정말 순수하게 감시관의 의무를 다하려는 것인지 아닌지와는 관계없이, 나는 이미 그가 무척이나 거북했다.
이상해……. 내 감이 외치고 있다니까……. 저 남잘 계속 뒤에 달고 다니면 무척이나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고…….
그러나 번화가 한중간에 내려 딱 한 블록을 걸었을 때, 나는 시벨보다 좀 더 까다로운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 달라붙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하네요……. 왜 이렇게 뒤가 구린 것 같죠?”
단순한 기우가 아닌 듯했다. 마가렛이 어느새 날카롭게 벼린 눈으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나 역시 슬슬 불안해져 가던 중이었다.
“저 주황색 머리카락…… 일고여덟 살 남짓의 어린 여자아이…….”
“블라스코의…… 그래…….”
“그 유산이…… 자산 규모가, 랭킹이…….”
토막토막 귀에 들어오는 단어만으로도 상황을 유추하기엔 충분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물론이고, 일행 모두가 당혹감에 휩싸였다.
형체는 없는데 발은 빠르고 특정인을 수색할 수도 없는 불길한 그것, 바로 소문이었다.
블라스코에 나타난 상속녀에 대한 소문이 수도 펠라임에 이미 좍 퍼져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심지어 내 얼굴까지 이미 다 알려진 모양이었다.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내 머리칼을 흘끗거리고 지나갔다.
하필 주황색 머리카락은 흔한 색도 아니라 더욱 눈에 띄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에 대한 이야기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그래서 어제 중앙은행에 출입할 때도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 않은가?
“아얏.”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팔이 따끔거렸다.
나는 당황해서 양팔을 벅벅 문질렀다. 이 감각……. 블라스코 직계들이 두르고 다니는 기운보다는 훨씬 통증이 덜했지만 분명한 살기였다.
“아가씨, 아무래도 자리를 피해야겠어요.”
마가렛과 로사의 눈빛이 첨예하게 곤두섰다. 마가렛이 곧장 나를 품에 안아 들고 번개 같은 속도로 골목을 파고들었다.
우리 뒤로 시벨이 곧장 따라붙었다. 그의 낯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인슬리를 노리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새 소문이 퍼진 듯한데. 아주 작정을 하고 달라붙었군.”
의심이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시벨을 흘끔거리자, 그가 몹시 기분 나쁘다는 투로 쏘아붙였다.
“지금 그 조그만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이는데, 멀쩡한 사람을 섣불리 의심하지 마십시오. 아무렴 내가 공작 각하와 직계들이 버티고 있는 황도에서 아인슬리를 해치려 덤비겠습니까? 누굴 바보로 알아요?”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의심 안 했어요.”
“지금 눈빛이 아주 삐딱하고 불손합니다. 따박따박 거짓말이나 일삼는 못된 버릇도 좀 고치세요.”
“아, 네에…….”
아니면 말지 왜 과민반응이람.
본인이 저렇게 펄쩍 뛰는데 더 캐묻는 것도 이상했다. 게다가 시벨이 딱딱하게 쏘아붙이는 사이 살갗을 긁던 살기는 어느새 희미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뒤쫓아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마가렛이 나직하게 뇌까렸다. 그녀는 주위를 슥 둘러보곤 나를 다시 내려 주었다.
“아기씨, 잠시만 여기 계세요. 한 바퀴 둘러보고 바로 돌아올 테니까요. 아기씨 잘 지켜, 로사. 잠시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시벨 님.”
“걱정 마세요, 마가렛 님.”
로사가 굳은 표정으로 내 어깨를 감쌌다. 시벨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고개만 까딱했다.
마가렛은 곧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재빠르게 골목 벽면을 타고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나는 고개를 꺾고 순식간에 지붕에 도착한 그녀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가렛이 떠나기 무섭게 시벨이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팔자에도 없는 애 보기라니. 어처구니가 없군.”
“저도 시벨한테 그다지 돌봐지고 싶지 않은데요.”
“또, 또 그 말대꾸.”
작게 툴툴거렸을 뿐인데 시벨이 즉각 도끼눈을 떴다.
그 순간이었다.
‘어……?’
뺨이 다시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차마 주위를 살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었다.
다가온다. 가까이.
골목 밖에서부터, 바로 지금 이쪽으로.
코너를 돌아서…….
“로, 로사.”
“아기씨, 이리 오세요!”
사방을 경계하던 로사가 급히 나를 감싸 안았다. 다음 순간, 그녀의 뒤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을 휘감은 괴한이 나타났다.
나는 꽥 외쳤다.
“로사, 뒤!”
로사가 아슬아슬하게 뒤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을 막아내고, 발로 괴한의 복부를 퍽 걷어찼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등 뒤가 살기에 콕콕 찔렸다. 뒤편에 나타난 누군가의 그림자가 내 머리 위로 길게 드리웠다.
기척이 없고 은밀한 움직임이라 내가 그자의 존재를 인지했을 땐 이미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 막힌 후였다. 악!
“……!”
반사적으로 들이마신 숨에 알싸한 약품 냄새가 진동을 했다. 뒤늦게 숨을 참고 발버둥 쳤으나 이미 늦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시야가 핑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아인슬리!”
시벨이 다급하게 나를 소리쳐 부르는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비틀었다. 내게 손을 뻗는 그의 모습이 보이나 싶은 다음 순간, 시야에 암흑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아…… 기절…….’
나 지금 기절하고 있는 거구나.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깔렸다.
정신을 놓기 직전에, 어쩐지 시벨의 입가에 걸린 미묘한 호선을 본 것도 같았다.
* * *
‘그럼 그렇지. 왜 이 사건은 안 터지나 했다.’
빙의자의 제4의 숙명, 납치 사건에 휘말리기. 나는 한 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클리셰에 깊이 탄복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빛이 들지 않도록 암막 천으로 꽁꽁 싸맨 어느 짐수레에 누워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수레는 어딘가를 향해 덜컹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는데, 거친 천에 쓸린 입술 양옆이 계속 따끔거려 심히 거슬렸다. 심지어 양 손목은 뒤로 결박되어 있다.
‘열 살짜리를 이렇게 가혹하게 대하다니, 누군지 몰라도 천벌 받을 거야.’
암만 몸을 버둥거려도 손목을 묶은 묵직한 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무서운 생각을 하지 않으려 입에 물린 재갈을 꽉 깨물었다.
황도 한가운데서 납치극을 벌이다니. 그 대상이 나라니……. 이건 내가 수없이 그려 보았던 수도 생활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상상이었다.
내가 알기로, 블라스코에서는 내 존재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자금줄이 묶여 블라스코의 사업들이 올 스톱된 정황이 정적들에게 알려져 봤자 이득일 것이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블라스코는 언제건 최강의 악명을 자랑하는 공포의 대상이어야 했다. 어린 상속녀에게 쩔쩔맨다는 이미지를 퍼뜨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내 소문이 황도에 자자하다는 건, 내부의 누군가가 입을 나불거렸다는 뜻이겠지.’
감히 가주의 뜻을 거역하고, 숙적들이 도사리는 황도에 소문을 퍼뜨릴 작자.
나는 낑낑대며 몸을 한 바퀴 굴렸다. 몸을 마차 바닥에 문대자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낡은 조개 모양 로켓. 다행이다. 썩 값나가 보이는 물건이 아니라 그런지 가져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 대신 내가 들고 나왔던 돈주머니가 사라졌다.
‘아 씨, 내 50골드.’
돈주머니에 매달아 놓았던 녹슨 열쇠도 사라졌다.
똑같이 낡아 빠진 물건인데 조개 로켓은 그냥 두고 열쇠만 가져갔다? 그건 범인이 그 열쇠의 효용을 아는 놈이란 뜻이다.
내가 그 열쇠를 사용하는 걸 본 사람은 블라스코 직계들과 제미언을 제외하곤 딱 한 명이다.
방금 전까지 내 뒤꽁무니를 줄기차게 따라다니던 남자.
‘맞네, 시벨.’
역시 본능의 경고를 무시하면 안 됐어. 그 둘이 나를 좀 마음에 안 들어 했던가?
심지어 시벨은 어제 내가 헤르젠 할아버지의 금고를 열어젖히는 모습을 직접 보기까지 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억만금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걸 지켜보는 속도 편하지는 않겠다, 싶더라니.
편하지 못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꽈배기처럼 꽉 비틀린 모양이었다.
‘심지어 마지막에 그 자식, 회심의 미소를 짓기까지 했어.’
물론 물증은 단 한 개도 없지만, 심증만으로도 이미 200퍼센트다.
마지막까지 나를 향해 손을 뻗던 그 가증스런 낯짝을 떠올리니 울화가 치밀었다. 머리가 팽팽 굴러가며 첸과 시벨 부자가 그린 시나리오를 짜 맞추기 시작했다.
그래, 암만 막 나가도 블라스코 직계들이 뻔히 동행한 수도행에서 상속녀를 납치 살인하진 않겠지. 가주에게 들키면 그날로 실각이니까.
그러니 어느 용병이나 인신매매단을 고용해 나를 납치해 놓고, 본인들은 아닌 척 시침을 떼고 있겠다 이거다.
“아아아왁, 아아와악(가만 안 둬, 이 나쁜 놈들)…….”
그나마 메달을 아공간에 넣어 두고 와서 천만다행이었다. 그걸 도둑맞았다면 되찾기도 전에 내 귀중한 백만 골드가 고스란히 신용으로 긁힐 뻔했다.
재산은 지켰지만 내 안위는 한없이 위태로워졌다.
‘흥, 이렇게 홀라당 끌려갈쏘냐!’
이 한 몸 지키려 마련해 뒀던 대비책을 바로 다음 날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는 열심히 바닥에 상체를 비비기 시작했다.
‘열려라, 열려라, 열려라, 참깨!’
펜던트가 살갗에 쓸려 알싸하게 아파 왔다. 제발, 열려라!
얼마나 발버둥을 쳤을까, 마침내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맞물린 홈이 풀렸다. 눈가리개 너머로 붉은 빛이 어른거렸다.
다음 순간, 나를 감싼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