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34)
34화
* * *
마차의 진동은 간데없었다. 나는 익숙하게 발로 궤짝의 문을 퍽 차 열어젖힌 다음, 힘껏 몸통 박치기를 해 궤짝 밖으로 굴러 나왔다.
‘단도, 단도.’
여기저기 쿵쿵 박아 가며 선반을 찾아 묶인 손으로 더듬거렸다.
익숙한 칼자루가 잡히자마자 나는 손을 꽁꽁 묶은 사슬을 뎅겅 잘라 냈다. 보이지 않으니 칼을 휘두르는 게 서툴러 손바닥을 조금 베었지만 아파할 겨를이 없었다.
다음은 재갈, 그다음은 눈가리개였다.
“아후!”
나는 푸드득 떨며 갑갑하고 불편한 구속구들을 모조리 떨쳐 냈다.
나도 모르는 새 펑펑 울고 있었던지 눈가리개가 내 눈 모양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걸 보니 왈칵 서러워졌다.
“흐에에…….”
어깨가 결리고 입이 얼얼했다. 로켓의 모서리에 마구 긁힌 쇄골 께가 따끔따끔한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니엘라가 숱한 납치 감금 미수에 시달렸다는 걸 알아 미리 대비할 수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간 이대로 끌려가 허망하게 세상을 하직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곤 해도 금고를 연 바로 다음 날일 줄은 몰랐지만!
“누구든 잡히기만 해 봐라. 입 쪽 찢어 버릴 거야…….”
나는 이를 갈며 약초 선반을 뒤졌다. 내가 기절한 사이 얼마나 험하게 다룬 건지, 종아리와 무릎, 팔뚝에 찰과상이 가득했다.
진정 효과가 있는 약초즙을 욱신거리는 어깨와 무릎에 들이부은 다음에야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나는 눈물 젖은 눈가리개에 코를 팽 풀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텔레포트석이 있긴 한데, 좌표 설정을 안 해놔서 쓸모가 없어.’
아르템으로 돌아가면 저택의 마법사들에게 슬쩍 부탁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림의 떡이다, 어쩔 수 없지.
이 조개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정확히 여섯 시간이었고, 제한 시간이 끝나면 강제로 밖으로 튕겨 나간다. 바로 조개 안으로 들어온 그 시각, 장소로.
그렇게 한번 튕기고 나면 만 하루 동안은 다시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몇 시간을 버티든 아까 그 짐마차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약간의 생각할 시간을 버는 것뿐이다.
‘마가렛이 내가 없어진 걸 언제쯤 알게 되려나?’
시벨 그놈이 어떻게 입을 털었을지 모르니 앞이 깜깜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모르겠고…….
확실한 건 누군가 구하러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기에는 상황이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는 거였다.
마냥 기다리다가 정말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떡해?
다시 눈물이 찔끔찔끔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코를 킁 먹으며 단도를 허리춤에 숨겼다.
‘별수 없잖아. 마차가 멈추기 전에 탈출하는 수밖에.’
다음에는 이런 납치 시도에 대비해 여기에 물과 식량을 잔뜩 구비해 둬야지. 시간이 멈추어 있으니 썩지도 않을 것 아닌가?
‘이불도 가져다 놓고……. 그래 봤자 죽기 전의 마지막 만찬과 단잠이겠지만…….’
역시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일까? 나는 역시 현금 백만 골드에 목숨을 바치러 온 게 틀림없었다.
나는 서럽게 훌쩍거리며 다시 궤짝으로 기어들어 갔다.
* * *
그 시각, 아스트로카 황궁.
“루티어드!”
블라스코 일가가 막 알현실에서 황제와 대면하고 나오던 참이었다. 누군가 무도하게도 공작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가던 공작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 뒤를 따르던 베르너와 아르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놈이 감히…….”
베르너가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상대를 확인한 그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오르겐 후작.”
목소리만 듣고도 상대를 알아챈 아르닌은 이미 똥 밟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 대 황후를 배출해 황실의 편에 선 오르겐 후작가는 블라스코와는 대대로 대척점에 선 가문이었다.
아스트로카 황제의 황후에 대한 사랑은 유명했다. 황실의 러브 스토리가 몇 권에 달하는 책으로 엮여 베스트셀러에 등극할 정도다.
자연히 황후의 가문인 오르겐 역시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고 높이 날아올랐다.
‘그래 봤자 후작가지. 뱀 같은 늙은이.’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는 이유로 기고만장한 꼴이 우습다 못해 역겨웠다.
그래 봤자 오르겐 후작가는 가문의 역사도, 대륙적으로 끼치는 영향력도, 심지어는 재력까지도 블라스코의 허리춤에도 미치지 못한다.
황제의 편애가 없으면 블라스코의 격에는 비비지도 못할 한미한 후작가 따위가. 남매의 눈에 비슷한 온도의 적개심이 튀어 올랐다.
11년 전에 벌어졌던 블라스코의 참사가 황실과 오르겐이 작당한 결과물이라는 걸, 웬만큼 정치 구도를 읽을 줄 아는 자라면 모두 안다.
그 어이없는 사고로 현 공작의 동생, 루테 블라스코가 유명을 달리했다. 증거도 증인도 없이 사고사로 덮여 버린 사건이었으나 그 일을 사주한 세력이 어디인지는 뻔했다.
희끗희끗한 갈색 머리에 금안을 가진 후작이 짐짓 다정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오오, 이게 누구인가! 공자, 그리고 공녀.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로군. 황도에 방문한 것이 꼬박 몇 년 만이지?”
아르닌의 입매가 짜증스럽게 비틀렸다. 그녀 성격에 좋은 소리가 나갈 리가 없었다. 베르너의 손은 진작 칼자루에 얹혀 있었다.
그때, 여전히 이쪽을 돌아보지 않고 있던 공작이 그들을 저지했다.
“베르너, 아르닌. 먼저 마차에 가 있어라.”
“아버지!”
“반 시진이 지나도 오지 않으면 저택으로 돌아가 있도록 하고. 아무래도…….”
줄곧 정면만을 응시하던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비스듬히 젖혔다.
황제를 알현하는 중에도 내내 묵묵한 일자를 유지하던 그의 입매가 어느샌가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간만에 오르겐 후작과 담소를 나누고 가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공작의 그 스산한 낯을 정면에서 본 아르닌이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베르너는 분하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와 아르닌 모두 이제 더는 아이라고 할 수 없는 나이인데도, 공작은 여전히 그들을 어린애로 취급했다.
어린 시절부터 미친 듯이 수련에 몰두했던 이유가 뭐였는데!
‘더 이상은 그날처럼 무력하게 보호만 받고 있진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 왔는데…….’
그러나 베르너가 공작에게 반항하기도 전에, 아르닌이 베르너의 팔을 낚아챘다. 그녀가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이리 와, 멍청아. 우리가 있으면 아버지께 방해만 될 뿐이야.”
아르닌이 베르너를 붙들고 질질 끌어냈다. 베르너는 이를 꽉 악물고 동생에게 반쯤 이끌려 가다, 복도의 코너를 도는 순간 거칠게 그녀를 뿌리쳤다.
“아르닌 블라스코. 넌 화도 안 나나? 저 노친네가 누구를 죽였는데!”
“나도 화나. 당장 저 독사 같은 놈을 토막 내 거꾸로 매달고 싶을 만큼.”
흥분해 소리를 높이는 베르너와는 달리, 아르닌의 음성은 곱게 간 얼음처럼 차갑고 선득했다.
“하지만 적어도 아버지만큼은 아니겠지. 그러니 닥치고 따라와, 이 모자란 놈아. 적의 코앞에서 네 속내를 떠벌떠벌 광고하고 싶은 게 아니면.”
나직하게 일갈한 아르닌이 다시 베르너의 멱살을 잡고 끌어냈다.
공작은 남매가 복도의 코너를 한 번 더 돌아 완전히 멀어진 것을 끝까지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돌아섰다.
오르겐 후작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는 다시 사무적인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감정이랄 것이 단 한 개도 남지 않은 얼굴로, 공작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2년 만입니다, 후작.”
“그래. 잘 지냈나?”
오르겐 후작이 빙긋 웃으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들은 오랜 숙적이라기엔 지나치게 평화로운 악수를 나눴다.
“자네 자식들은 여전히 힘이 넘치고 성질들이 급하구먼. 확실히 검가에서 자라다 보니 정치할 상들은 아니야.”
“아직 아이들이니까요.”
그러나 평연하게 오가는 대화 속에는 뼈와 가시가 뒤섞여 있었다.
“아이는 아이다워야지요. 굳이 이런 똥통에 벌써부터 익숙해져야 할 필요라도?”
“둘 중 다음 대 블라스코의 주인 될 아이는 언젠가는 귀족회에 발 들이게 될 게 아닌가? 좀 더 비상하게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법을 가르쳐야겠네, 루티어드.”
“어련히 알아서 안 할까. 오지랖도 참 여전하십니다……. 그런데 후작.”
공작이 순간 가공할 만한 악력으로 후작의 손을 움켜쥐었다. 오르겐 후작은 욱신거리는 손을 감아쥐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공작이 서슬 돋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사치고 흰 편인 뺨에 푸른 안광이 비치는 듯했다.
무심한 눈매 그대로, 공작이 입꼬리만 끌어당겨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윗물 아랫물은 가리시지요. 말이 짧습니다.”
“…….”
“어디 공작의 이름을 찍찍 부릅니까? 연장자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후작에게 굳이 존대를 붙여 줄 이유조차 없을 텐데.”
오르겐 후작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공작의 몸에서 솟아 나온 새파란 오러가 창끝처럼 날카롭게 곤두서 사방에서 후작을 에워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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