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35)
35화
순식간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오르겐 후작이 대면하고 있는 자는 대륙 최고의 검술 가문으로 손꼽히는 자의 수장이었다.
한때 동생과 함께 대륙 검술제에서 나란히 1, 2위를 거머쥔 전적마저 있는, 명실상부 아스트로카에서 가장 검을 잘 쓰는 자.
그리고 그 실력만큼이나 인성을 말아먹었다 소문이 자자한 놈.
변덕이 죽 끓듯 해 장단을 맞추기 힘든 것은 기본이요, 예민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우며 법보다는 주먹이 앞에 있는, 가장 깡패 같은 귀족.
제 사람들에게도 봐주는 법이란 일절 없는 냉혹한 독재자.
그런 형형한 수식언들이 족히 십수 개씩 따라붙는 이름이 바로 루티어드 블라스코였다.
심지어 이놈은 제 본가에 열대 초원을 꾸며 온갖 야생 짐승과 괴수들을 풀어놓고 키운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돌았다.
블라스코에 밉보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당해 그 사바나에 먹잇감으로 던져진다는 것이다. 짐승들이 벌이는 인간 학살 쇼를 감상하는 것이 공작의 유일한 즐거움이란다.
그나마 머리는 곧잘 돌아가는지, 굳이 황실까지 와 칼부림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역시 이렇게 지척에서 건드려 보기엔 위험한 자임은 분명했다.
성질 더러운 놈.
오르겐 후작은 속으로 욕설을 지껄이면서도 겉으로는 고상한 가면을 덮어썼다.
“내 생각이 짧았소, 공작. 간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가움을 표한다는 게 그만.”
“그리 오랜만이던가요? 글쎄요. 제 귀에는 계속해서 오르겐의 소식이 들려옵디다만.”
“…….”
“친우들을 곧잘 아르템으로 보내 주시지 않습니까?”
공작이 유리처럼 미끈한 미소로 말을 받았다. 속뜻을 알아들은 후작이 설핏 낯을 굳혔다.
종종 블라스코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아르템에 심어 두었던 첩자들을 가리켜 말하는 게 틀림없다.
친우라니. 아무리 에둘러 표현한다지만 단어 선택 한번 악질이다. 오르겐과 황실이 파견한 스파이 중 대부분은 며칠 못 가 발각되어 공작의 잔혹한 야생으로 끌려갔다.
“물론 폐하와 후작께서 친히 보내 주시는 친우들이라면 블라스코 역시 그에 걸맞은 예우를 갖추어 맞이할 의향은 충분히 있습니다만…….”
말이 길다. 블라스코 공작이 말을 길게 늘이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분노가 맺힐 틈도 없이 바로바로 풀어 버리는 제 성질머리조차 누르고, 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만큼 공을 들여 상대를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공작의 새파란 눈이 퍼런 안광을 가둔 유리알처럼 빛났다.
“그래도 한밤중이나 새벽은 되도록 피하도록 하지요. 덧붙여 경계심을 낮춰 보겠다고 어린애들이나 처보내는 짓거리도.”
“…….”
“난 아이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아시면서 뭐 그리 무용한 짓을 자꾸 하시는지, 원.”
후작이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자, 공작이 진심으로 유감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는 후작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기까지 했다.
“작년 부실 공사로 무너진 노이만 운하 재건 사업에나 집중하십시오. 제가 보기엔 그 건 수습만으로도 하루를 열흘처럼 써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래, 걱정 한번 고맙군.”
“뭐 이런 걸로 다.”
가볍게 어깨를 들썩여 속 빈 감사를 받은 공작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럼.”
가볍게 후작을 스쳐 지나가는 동작마저도 우아함이 배어 있었다.
아직 마흔 줄도 안 된 시퍼렇게 어린 놈이, 언제까지 제 세상일 줄 알고. 후작은 멀어지는 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말일세, 공. 내가 최근에 재미있는 소문을 하나 들었는데.”
자, 어디. 이 말에도 여유만만하게 반응하는지 볼까?
“자네에게 늦둥이가 생길지도 모른다면서?”
반듯하게 거리를 벌려 가던 공작의 뒷모습이 그림처럼 멈추었다. 작게나마 동요했음이 틀림없는 그 모습에 후작은 금세 다시 유쾌해졌다.
“수도에 그런 소문이 파다하오, 공. 블라스코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상속녀가 나타났다고. 10년 전에 가출한 자네 아버지가 생면부지의 어린아이에게 모든 유산을 상속했다면서?”
“……소문이란, 참. 빠르기도 하지…….”
공작이 탄식 섞인 웃음을 흘렸다. 그건 또 예상을 못 했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곁으로 오르겐 후작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저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던지는 말본새가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조심해라, 루티어드. 네 말마따나 이 거칠고 험한 황도에, 아이 홀로 집을 지키게 두는 것은 위험하지 않겠나?”
“남의 집 가정사에는 신경 끄시지요. 술독에 빠져 산다는 댁의 막내 아드님부터 잘 건사하시고.”
공작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후작도 더는 그를 멈춰 세우지 않았고, 그 역시 돌아보지 않았다.
‘마가렛 윈스티드만으로는 호위로 충분하지 않겠군.’
황궁의 거대한 도개교 앞으로 나오자, 블라스코의 문양이 찍힌 마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아르닌이 그를 발견하자마자 외쳤다. 공작은 남매 앞에 부복한 시녀 둘을 발견한 순간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미 비틀어져 있는 심기를 반영하듯 목소리가 곱지 않게 나갔다.
“무슨 일이지, 마가렛?”
“그것이…….”
마가렛의 옆에는 이목구비를 쉬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얻어터진 괴한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공작이 무척이나 싸늘한 감탄사를 흘렸다.
“허어…….”
이제는 황도까지 와서도 대놓고 이런 졸렬한 짓을 벌이시겠다……? 경고를 날리고 온 게 바로 몇 분 전이었다.
‘하지만 굳이 황실의 영역에서까지 간자를 보낼 이유가 없을 텐데.’
제 서식지라 그토록 당당하게 말꼬리를 잡던 후작이 아니었던가? 아르템에서 만났다면 고개도 못 들고 벌벌 떨었을 나잇살 처먹은 능구렁이가.
공작이 짜증스럽게 고갯짓했다.
“쓰레기 처리하는 법을 모르나? 굳이 이걸 내 앞에 가져다 놓은 이유가 뭐야.”
“이자가…… 아기씨를 노렸습니다, 주군.”
“뭐?”
순간 공작의 미간에 묻었던 짜증이 훅 날아갔다. 청안에 드물게도 놀란 빛이 스쳤다.
마가렛 윈스티드가 차마 주인을 올려다보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아기씨께서……”
“송구합니다, 각하!”
어디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재빠르게 달려온 시벨 블라스코가 마가렛 옆에 털썩 부복했다. 그가 침통하게 고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아기씨께서 사라지셨……”
그러나 시벨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목이 따끔하다 싶더니 어느새 시퍼렇게 벼린 검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눈이 따라갈 수 없는 발검 속도였다. 검 끝이 시벨의 턱을 홱 위로 젖혔다. 똑바로 올려다보게 된 공작의 눈에 푸른 안광이 형형했다.
“뭘 잘했다고 구구절절 읍소하고 있어? 당장 가서 찾아와.”
공작의 살기에 고스란히 노출된 시벨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농도의 살기였다.
정수리를 반으로 가를 듯 매서운 명령이 포화처럼 떨어졌다.
“수도를 이 잡듯 뒤져서 찾아 데려와. 애 머리털 한 가닥 안 빠지게!”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원대한 탈출 계획은 초장부터 실패했다.
짐수레에 덮어씌운 천을 둥그렇게 찢은 뒤 동태를 살피다가 마차가 잠시 멈춘 틈을 타 잽싸게 뛰어내리기는 했는데…….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는 줄은 몰랐지.’
그러니까 나는 그냥 험하게 끌어 내려질 것을 내 발로 안전하게 하차한 딱 그 정도만 이룬 셈이었다.
‘1분만 빨리 뛰어내렸어도…….’
수상한 유흥가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냅다 뛰어내릴 것을.
내가 끌려들어 온 곳은 딱 보기에도 불건전해 보이는 어느 검투장이었다.
나는 채 세 발자국도 도망치기도 전에 수레를 몰고 온 근육질 사내에게 덜렁 붙잡혔다.
“뭐 이런 걸 다 잡아 왔어? 이렇게 귀염상인 애는 잘 안 팔린다고. 너 같으면 약하기만 한 어린애가 비실대다가 죽는 꼴을 보면서 환호하고 싶겠냐?”
“어쩔 수 없어. 단장님 명령인걸. 검투장엔 보내지 말고 따로 경매에 부치든가 해.”
오가는 대화를 보아하니 인신매매도 겸하는 업소인 게 틀림없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나를 철창에 처넣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사내는 내게 그렇게 으름장을 놓고 사라졌다. 내 머리통만 한 자물쇠를 채운 채였다.
아스트로카에서 검투장은 불법 업소가 아니다. 전 대륙적으로 개최되는 검술제부터 시작해 아스트로카 황실에서 직접 주관하는 무투 대회가 연례행사처럼 열린다.
특히나 무력에 강한 블라스코가 버티고 있는 아스트로카는 귀족이건 평민이건 너 나 할 것 없이 검투를 하나의 유흥거리처럼 즐겼다. 당장 내가 살았던 리덴 영지만 해도 중심가로 나가면 검투장이 떡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서로의 무력을 겨루고, 승자와 패자를 갈라 돈이 오가는 대회가 과연 뿌리까지 깨끗하기만 할까?
답은 당연히 ‘아니오’다. 아스트로카의 음지에서는 인신매매와 결합한 불법 검투장들이 판을 쳤다.
그런 곳들의 운영 방식은 간단하다. 인신매매상들이 화제 몰이를 할 수 있을 법한 ‘자극적인 부류’의 인간을 가리지 않고 수집한다. 그리고 가장 자극적인 대결 구도를 짜 잡아 온 인간들을 검투장에 밀어 넣는 것이다.
희귀 이종족 혼혈과 몰락 귀족의 일대일 데드 매치.
사막과 모래의 쿠트르족 사내와 눈과 얼음의 이페리엘 요정족의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빅 매치! 뭐 이런 식으로.
그렇게 선전을 때리는데 사람이 안 몰리겠는가? 세상에는 남의 비극과 불행을 나의 여흥으로 삼는 인간 말종들이 널리고 깔렸다.
그리고 검투의 승자가 가려지면, 그때 경매를 시작한다. 경매 대상은 당연히 그 검투의 승자다. 당연히 낙찰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 뜻은 경매에 참여하는 이들이 대부분 귀족 계층이라는 말도 되고.
간혹 패자를 사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보통 패자는 죽었거나 죽기 직전인 상태까지 내몰리기 때문에 경매 물품으로 올라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아냐고? 원작에서 니엘라가 블라스코 기사단 내부의 간계에 휘말려 불법 검투장에 내몰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 훈련생 딱지를 뗀 초보 검사 니엘라는 그 대회에서 거의 초주검이 될 때까지 구른 뒤, 패자가 되어 끌려 나간다. 그리고 모두의 관심이 승자의 경매에 팔린 틈을 타 백의 교단으로 탈출한다.
‘니엘라 대신 딸 자리 노린다고 작가님께 벌 받는 건가?’
나는 철창을 붙잡고 입을 비죽거렸다. 이런 식으로 자꾸 원작을 따라가게 되면, 이건 오히려 내 오기에 불을 붙이는 격이다.
‘치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내가 카티샤 블라스코 되고 말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