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36)
36화
나는 펄펄 끓는 속을 다스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곳은 검투장으로 보낼 노예들을 가둬 놓는 감옥 비슷한 곳이었다. 내가 갇힌 육각면체의 철창 위아래, 양옆으로 비슷한 모양의 철장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부분의 철창은 비어 있었다.
검투와 경매가 열리는 날이 아니기 때문이라면 다행이고, 이미 검투장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라면 불행이다. 그런데 현 상황은 높은 확률로 후자에 가까워 보였다.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환호와 야유가 뒤섞인 소란이 멈출 기미가 없었다.
저 경기장 안에서는 누가 죽어 가고 또 누가 팔려 가고 있을까? 나는 최악의 상상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입구를 지키고 선 감시인의 눈을 피해 몰래 치마 안주머니를 더듬자, 단도의 칼자루가 금세 손에 잡혔다.
‘좋아. 입구가 비기만 하면 바로 나가면 되겠어.’
아무래도 블라스코로 돌아가면 호위 기사를 한 명 구해야겠다.
마가렛이 늘 동행한다손 쳐도 오늘처럼 그녀가 곁을 비우는 날엔 꼼짝없이 홀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할아버지의 정보 길드에 숨은 실력자 한 명만 물색해 달라고 해 볼까?
그때였다. 저 멀리서 안쪽으로 통하는 철문이 활짝 열렸다.
“똑바로 걸어!”
근육질의 장정 두 명이 누군가를 질질 끌고 들어섰다. 나와 고작 한두 살 차이나 날까 싶은 어린 사내아이였다.
엉덩이까지 닿을 법한 긴 백발에 핏덩이가 잔뜩 엉겨 붙어 있었다. 아이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말 한번 더럽게 안 들어 처먹는군. 이쯤 하면 슬슬 본모습을 꺼낼 때도 되지 않았냐?”
우리에 거의 내던져지다시피 한 아이에게서는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사내들이 아이의 볼을 툭툭 건드리며 주고받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거 아냐?”
“죽긴. 저건 뭔 짓을 해도 안 죽잖아. 내일이면 도로 멀쩡하게 돌아와 있을걸.”
“하긴, 그건 그래. 명줄만큼 고집도 장난이 아닌데. 보름 정도 굴렸으면 슬슬 신수 형상으로 변할 만도 하지 않나? 고객님들 전부 그걸 기대하고 오는데, 오늘도 공쳤잖아, 제기랄.”
“이젠 더 못 써먹어. 내일 경매에 부치는 게 낫겠군. 신수 혼혈에, 생긴 것도 예쁘장하니 족히 500골드는 받을 수 있을 거야.”
시시덕거리며 비인간적이기 짝이 없는 쓰레기들을 보며 인류애가 사라지는 기분을 느끼다가, 언뜻 스쳐 지나간 단어에 귀를 쫑긋 세웠다.
‘신수 혼혈?’
거기다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는 재생 능력……?
게다가 백발?
나는 철창 너머로 보이는 소년의 머리칼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피가 묻지 않은 머리칼 끄트머리는 분명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깨끗한 백색이었다.
굴지의 재생력을 가진 신수 혼혈의 백발 남자. 낯익은 키워드들의 조합이었고, 내가 아는 한 그런 조건을 만족하는 인물은 딱 한 명뿐이었다.
두 명의 쓰레기들은 그 뒤로도 아이를 누구에게 얼마에 팔지 따위를 떠들다 훌쩍 떠났다.
‘……설마.’
설마 내가 아는 그 사람은 아니겠지. 설마…….
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틈타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잊은 채 건너편 철창을 정신없이 살펴보았다.
한참을 애타게 기다리는데도 우리에 머리를 기댄 채 비스듬히 누운 소년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애가 걸친 도포 같은 흰 옷자락에 묻은 검붉은 핏자국이 점차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혹시, 혹시 어떻게 된 거 아냐, 쟤?
“저…… 저기.”
나도 모르게 철창을 붙들고 목소리를 냈다.
“저기, 친구야. 괜찮아?”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러나 힘없이 축 늘어진 소년의 손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희미하게나마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가타부타 생각할 겨를 없이 나는 마법 단도를 꺼내 서둘러 손목을 묶은 수갑을 끊었다. 단도의 날을 자물쇠에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고철이 삶은 호박처럼 숭덩 잘려 나갔다.
나는 얼른 우리의 문을 열어젖히고 맞은편 우리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창살 안으로 손을 넣어 꿈틀거리는 소년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친구야, 정신이 들어? 많이 아파?”
손을 잡고 살며시 흔들자 소년에게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조금 애가 타서 얼굴을 커튼처럼 가린 긴 백발을 살짝 걷어 냈다.
“저기, 나 보이는…….”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끝맺지 못했다. 머리칼을 치우자 드러난 소년의 옆얼굴에 나는 하려던 모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단지 소년상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생김새에 놀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신을 잃은 줄로만 알았던 그 애는 눈을 뜨고 있었다. 반쯤 내리깔고 있던 눈이 천천히 마저 뜨이고, 이윽고 나를 향했다.
“아…….”
소년의 눈동자는 내가 살면서 본 그 어떤 눈동자보다 더 특이했다.
세로로 미세하게 더 긴 동공을 둘러싼 홍채는 회색이었는데, 눈동자 바깥쪽으로 갈수록 은은한 푸른 기가 돌았다.
흰 속눈썹이 나뭇가지처럼 드리워진 소년의 눈은 파랗게 얼어붙은 호수와 눈으로 뒤덮인 끝없는 설원을 연상시켰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는 마치 겨울 삭풍처럼 냉랭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을 떠나 상서로운 기운마저 풍기는 소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아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성검 힐라이야의 주인이자 백의 교단의 파수꾼, 신수 아이칼.
바로 [지금 우리, 마법처럼>의 남주인공이다.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예기치 않은 만남에 내가 꽝꽝 얼어붙은 사이, 아이칼은 눈만 움직여 느리게 나를 훑었다. 제 앞에 있는 인간이 누구인지 파악하려는 듯했다.
이윽고 아이칼이 갈라진 목으로 물었다.
“넌 누구야?”
“……작아.”
내 입에선 영 엉뚱한 말이 흘러나갔다. 의식하지 못한 새 그렇게 중얼거리자, 아이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는 그가 내게 질문을 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정신없이 아이칼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네가 나를 몇 날 며칠 밤잠을 설치게 했던 남주인공이구나!’
아이칼은 나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마법처럼>의 애독자들 마음에 불을 질렀던 철벽 냉미남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와, 너무 작아. 너무 귀여워…….’
최애의 어린 시절이라니요. 감격에 겨워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소설을 읽는 내내 상상했던 아이칼의 모습은 이런 열 살짜리 어린이가 아니라 장성한 성인의 모습이었다.
웬만한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 더 큰 장신에 근육으로 빼곡히 찬, 강건하면서도 유연한 몸을 가진 ‘남자’ 말이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소년은 천사처럼 아름답기는 하지만, 아직 빠지려면 멀어 보이는 젖살이 양 뺨에 통통하게 남아 있었다.
체격 역시 나보다 아주 약간 더 클 뿐, 팔다리도 가늘고 말랐다. 어딜 봐도 작중에 묘사된 빙원의 검사다운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누구냐고 물었어, 당근 머리.”
심지어 목소리마저도 앳되다.
감히 나를 당근 머리라고 모욕한 것쯤은 눈감아 줄 수 있을 만큼, 아이칼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사랑스러웠다.
아이칼이 내게 잡힌 손을 꿈지럭대며 움직였다.
“이거 놔라.”
“어? 어어.”
아이칼의 몸에 흥건하던 핏자국이 하얀 증기를 뿜어내며 증발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아니,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서둘러 아이칼의 몸을 살펴보았다. 가장 심각해 보였던 복부의 열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옷과 머리칼에 지저분하게 엉겨 있던 핏덩이들도 희고 차가운 연기를 뿜으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소설로 읽을 때도 사기적인 능력이라며 감탄했는데, 실제로 목격하니 그야말로 신의 손길이 직접 닿는 듯 신성함마저 느껴졌다.
나는 점차 본래의 백색을 회복하는 소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
[지.우.마>의 남주이자 빙설의 신수, 이클라스와 인간의 혼혈인 아이칼은 태어난 순간부터 성검의 주인이 될 운명을 타고난 자였다.성검 힐라이야는 수백 년 전, 아직 신들이 이 땅에 존재하던 시대에 치유와 재생의 여신 힐라이야가 직접 권능을 불어넣어 탄생시킨 검이다. 그 검의 초대 주인이 바로 여신의 곁을 지키던 영물, 신수 이클라스였다.
아이칼은 이클라스족이라고 불리는 신수의 혈족 가운데 그의 피를 가장 짙게 물려받은 하프였다. 성검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결론적으로, 주인공 버프를 몰빵받은 먼치킨. 아직은 새싹이지만.
머릿속에 번쩍, 새로운 가능성이 떠올랐다.
‘원래 주인공의 동료들은 잘 안 죽잖아?’
나, 네 동료가 될래! 나는 하마터면 그렇게 외칠 뻔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탈출을 감행하겠단 계획이 머릿속에서 휙 날아갔다.
‘잘하면 같이 묻어서 여길 나갈 수 있겠는데!’
역시 나 혼자 맨몸으론 못 나가. 열 발자국도 못 가서 도로 끌려올 거야.
그리고, 생각해보니 얘, 새로 열린 [지.우.마> 168 화에서 나를 찾기도 했잖아? 이건 운명일지도 몰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목소리가 저절로 상냥해졌다.
“많이 아팠겠다. 지금은 괜찮아?”
“……응.”
그렇게 물어볼 줄 몰랐다는 듯, 소년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 어떻게 잡혀 온 거고? 아직 교단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교단 소속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지?”
앗, 실수.
아이칼의 눈초리가 이번에는 경계의 빛을 품고 가늘어졌다.
나는 얼른 깨끗해진 그의 복부를 가리켰다.
“지금 온몸으로 풀풀 티 내고 있잖아. 재생력은 백의 교단 소속만이 가질 수 있는 권능 아니야?”
대륙의 최북단에 있는 백의 교단은 성검 힐라이야를 수호하는 독립적인 기관이었다. 성검의 영향을 받아, 교단에 소속된 이들은 대부분 재생 능력을 갖추고 있다. 심지어 이 정도의 즉각적인 회복이 가능하다면 말단일 리가 없었다.
‘어…….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좀 이상하네.’
아이칼은 새끼였던 때부터 교단에 소환되어 성검의 주인으로 길러졌다. 오로지 교단에만 충성하고 외부 세력으로부터 교단을 보호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런 그를 납치해 이런 곳에 처박아 뒀단 말인가?
모르긴 몰라도 지금 백의 교단은 발칵 뒤집혔을 것이 뻔했다.
‘……잘못 생각했나. 나 얘랑 엮이지 말고 당장 튀어야 하는 상황인 건가? 역시 인생은 셀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