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38)
38화
캐서린과 약속한 저녁 시간은 생각보다 금세 돌아왔다.
바깥의 소란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우리의 문을 열고 나왔다. 잠깐 머뭇거리다 아이칼의 우리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제는 대답해 줄래? 왜 탈출하지 않고 여기에 계속 있는 거야?”
그때 아이칼이 혀를 내어 제 입술을 핥았다.
할짝. 입가에 남아 있던 핏기를 핥아먹은 그가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접었다.
“즐거워서.”
“뭐……?”
“교단 밖의 세상을 제대로 맛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재미있어서. 그래서 있는 건데.”
“아…….”
음, 역시 그렇군.
나는 주섬주섬 단도를 도로 허리춤에 숨겼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쟤 어딘가 좀 이상해 보여. 아무래도 엮이지 않는 게 좋겠다.
‘말이 돼? 검투장에서 그렇게 다쳐 와 놓고 그게 재미있었다고?’
마조히스트야……? 고통을 즐기는 타입? 아니면 살생을? 상대와 싸우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성격인가?
맙소사. 그렇게 호전적인 성향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슬금슬금 물러나며 아이칼의 설정값들을 떠올렸다.
[지.우.마>에서 아이칼은 빙제(氷帝)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깨뜨릴 수 없는 고고한 얼음벽 같은 성격 때문이었다.그는 관대하거나 자비롭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전적이거나 살생을 즐기지도 않았다.
굳이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무관심했다. 굳이 인간들의 일에 끼어들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을 만큼. 그래서 니엘라도 처음에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무척 애를 먹었다.
그런 인물이, 암만 어린 시절이라곤 해도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나중에 교단에서 누구든 파견해 꺼내 주겠지.’
저 묘하게 쎄한 분위기로 보건대 원작에서 내 이름을 거론한 이유도 필시 온건하진 않음이 분명했다.
‘일단 얽히지 말고 멀어지자.’
거리를 벌린 것을 확인하자마자 돌아섰다. 그러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 아이칼이 나를 불렀다.
“어디 가?”
“난 여기가 별로 안 즐거워. 나갈 거야……요.”
“나도 데려가 줘.”
“……거기 있는 게 즐겁다면서? 요.”
이제 반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이칼이 아무리 인간의 피가 섞였대도 근본적으로는 인외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겼다.
뒤에서 아주 뻔뻔스러운 목소리가 넘어왔다.
“이제 물렸다. 밤마다 아픈 것도 슬슬 지겨워. 나갈 때가 된 것 같아.”
“…….”
“게다가 이곳은 내 생각보다 훨씬 부조리해. 교단과 별 차이 없는 것 같다.”
그 말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낫는다고는 해도 역시 아프기는 했나 보다,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둘째 치고.
‘이곳이 교단과 별 차이가 없다니?’
백의 교단은 예로부터 성검 힐라이야를 숭배하고 수호하며, 인세에서 한 발짝 물러나 힘의 균형을 관조하는 독립적인 집단이었다.
절대 선을 표방하는 그들은 세상의 추가 악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할 때에만 인간사에 개입했다. 그만큼 정의롭고 청렴결백하며, 그 어느 집단보다 이성적이다. 이런 저질 검투장과 비교할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오려면 충분히 혼자 힘으로 나갈 수 있잖아……요.”
“그랬으면 진작 나갔겠지. 못 해.”
“왜?”
아이칼에게 이런 불법 검투장의 구속구 따위가 문제일 리가 없었다. 한낱 인간이 만든 물건 아닌가? 게다가 아이칼은 그저 그런 하급 신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칼이 고개를 젖혀 무언가를 보여 준 순간, 나는 조금 전의 생각을 취소해야 했다.
아이칼의 목에는 뾰족한 징을 촘촘하게 박은 가죽 구속구가 매여 있었다. 이 검투장의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징에 십자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교단의 물건이었다.
충격에 입이 허 벌어졌다.
‘교단에서 저런 개 목걸이 같은 걸 사용한단 말이야?’
숨 쉴 틈도 없이 꽉 조인 그것은 무척이나 불편해 보였다. 특히 고개를 숙이거나 젖힐 때 목을 졸리는 기분일 게 뻔했다.
아이칼이 부루퉁한 어조로 제 목을 죈 것을 툭툭 쳤다.
“내가 힘을 개방하면, 교단에 신호가 가.”
“아…….”
“검을 뽑는 순간 교단에서 내 위치를 추적할 수 있게 돼. 이것이 그런 역할을 한다.”
“…….”
“이동진이 발동할 테고, 교단병들이 들이닥친다. 그렇게 끌려갈 거면 여기서 보름이나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교단을 나오지도 않았어.”
그 말인즉슨, 결국 누군가가 꺼내 주지 않는 한 혼자의 힘으로는 이곳을 탈출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뒤집어 보면, 아이칼은 지금 교단에게 쫓기는 신세라는 뜻도 된다.
‘여기를 못 나가서가 아니라, 나가서 갈 곳이 없었던 거구나.’
깨달은 순간 가슴이 따끔거렸다.
갈 곳이 없다는 건 엄청 서러운 건데…….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가, 나는 소년에게 손을 붙들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니 나를 꺼내, 인간.”
언제 무상한 빛이 감돌았냐는 듯, 똑바로 찔러 들어오는 아이칼의 눈빛이 거침없었다.
내 손을 움켜쥔 소년의 손에는 길고 뾰족한 손톱이 돋아 있었다. 검까지 꺼낼 필요도 없이 저 자체로도 충분히 흉기였다.
나는 붙들린 손을 떼지도 잡지도 못한 채 어렵게 입술을 뗐다.
“내가 꺼내 주면, 교단으로 돌아갈 거야?”
“아니.”
“그럼 어디로 가게?”
“너를 따라갈 거야.”
아이칼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거의 선언이나 사실 통보에 가까웠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아니야! 동정심에 휘말리면 안 된다고!’
빠르게 손절하고 튀는 것이 앞으로의 내 신상에 이롭겠다는 판단이 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얘 블라스코과야. 멀쩡해 보이는데 어딘가 핀트가 나갔어.
“역시 안녕히 계세요. 저는 제 코가 석 자라 식솔을 거둘 형편이 안 된답니다.”
나는 팔에 들러붙은 아이칼의 손을 떼어 내고 돌아섰다. 그러나 채 두 걸음을 떼기도 전에, 번개처럼 일어난 아이칼이 이번에는 내 옷자락을 콱 붙잡았다.
“귀족이라며?”
“어?”
“100골드는 일시불로 지불할 수 있는 부자라면서? 캐서린이라는 인간에게 거짓말을 했어?”
“아니, 그건 아니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얼른 손을 내저었다. 강한 부정은 종종 강한 긍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는 진리를 깜빡하고서.
아이칼이 나를 쓰레기 보듯 보았다.
“사기꾼.”
“아냐! 그놈의 사기꾼 정말!”
왜 어딜 가나 사기꾼 취급인 건데! 버럭 외치는데도 아이칼의 눈엔 이미 의심이 득실득실했다.
그가 돌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화들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캐서린을 소리쳐 불렀다.
“캐-서-”
“그만! 잠깐……! 쉬, 쉿!”
“리이이이이으읍……!”
나는 헐레벌떡 돌아가 아이칼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는 듯, 그가 입꼬리를 비쭉 치켜올리는 게 손바닥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이칼이 도도하게 턱 끝을 치켜들고 명령했다.
“나를 사.”
“싫어. 나 따라올 거라면서! 난 교단에 끌려가기 싫단 말이야!”
“사 줘! 너 돈 많다며!”
“싫다니까……!”
나는 징징 떼를 쓰는 아이칼을 안간힘을 쓰며 밀어냈다.
아이칼이 꺼려지는 이유는 비단 그가 남주인 주제에 흑막 같은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정식으로 블라스코의 성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나는 블라스코에 머물고 있고, 마검을 수호하는 블라스코는 성검을 비호하는 백의 교단과는 상극이었다.
블라스코와 황실의 사이처럼 파국은 아니다 뿐이지, 적대 관계라는 건 매한가지.
그 지경인데 무려 성검의 주인을 블라스코에 숨겨 줬다 걸리면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러니 나중에 따로 찾아내 만날지언정, 블라스코로 데려갈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내 입지도 아직 간당간당한 마당에…….’
나는 매정하게 아이칼의 손아귀에서 옷자락을 빼내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사 주세요.”
가시가 다 빠진 순종적인 목소리가 내 발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나는 끼긱거리며 멈춰 섰다.
방금 내가 들은 존댓말이 정말 아이칼의 입에서 나온 것이 맞을까?
나는 귀를 의심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칼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눈매를 사르르 늘어뜨린 얼굴이 미친 듯이 사랑스러웠다.
무언가를 되뇌듯 오물거리던 연분홍색 입술이 이내 한 단어를 내놓았다.
“언니?”
“뭐, 뭐……?”
의심은 황당함으로, 그리고 곧 충격으로 바뀌었다. 떨떠름하게 굳어 버린 나와는 달리, 아이칼이 아주 뿌듯하게 말했다.
“네가 언니라고 불렀더니 그 여자가 물과 붕대를 줬다. 언니라고 부르면 원하는 것이 나오는 거지?”
“뭐…… 무슨…….”
나는 그만 할 말을 몽땅 까먹고 말았다.
그거 아니야. 쟤 대체 뭘 따라 하고 있는 거야!
아이칼은 어처구니가 없어진 내 표정을 이번에도 유심히 살폈다. 내가 어느 포인트에서 반응하는지 면밀히 관찰하는 게 틀림없었다.
어림도 없지!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채 몇 발자국도 떼지 못했다. 등 뒤에서 작고 귀여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울음소리?
나는 세 번째로 걸음을 멈췄다.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나는 삐걱삐걱 어깨 너머를 돌아보고는 낮게 탄식했다.
“엄마야. 정말 미쳐 버리겠네…….”
백발을 발끝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린 열 살 남짓의 소년은 간데없었다. 대신 우리 안에는 고작 내 팔뚝 길이만 한 작고 복슬복슬한 생명체가 웅크리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