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39)
39화
보송보송한 털은 소년의 머리칼처럼 새하얗고, 몸통에는 장미처럼 보이는 검은 점박이 무늬가 나 있었다. 귀는 둥글고 주둥이는 앙증맞게 툭 튀어나왔다. 길고 복슬거리는 꼬리는 작은 몸을 반이나 휘감고 있었다.
그것이 눈을 깜빡거리자 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촉촉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눈표범…….’
그제야 잠시 잊고 있었던 설정이 떠올랐다.
최상위 환상종, 신수 아이칼. 그의 본모습은 거대한 눈표범이었다.
거대한…… 지금은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것이 조그맣게 목을 울려 갸릉거렸다. 그러곤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보더니, 부르르 떨며 상체를 바닥에 붙이고 쭉 기지개를 켰다.
“…….”
내가 목석같이 굳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자, 새끼 눈표범이 두 앞발을 쇠창살 사이로 턱 내밀었다.
나는 그것의 발바닥에 박힌 까맣고 통통한 젤리를 보고 결국 입을 틀어막았다.
“귀여워…….”
내 반응을 낱낱이 살피던 어린 짐승이 갸릉거리며 조그만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어쩐지 의기양양한 표정이었지만 트집을 잡을 겨를이 없었다. 길고 도톰한 꼬리를 좌우로 휘젓던 새끼 표범이 발랑 배를 보이며 드러누웠기 때문이었다.
‘속지 마, 카티샤. 저 사랑스러운 껍데기 속에는 애늙은이 같은 말투로 속 갑갑해지는 소리만 하는 남주가 들어 있단 말이야.’
마음의 소리와는 정반대로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새끼 표범이 눈으로 묻는 듯했다.
이래도 안 데려갈 거야?
나 정말로 안 사 줄 거야?
정말?
표범이 뀨우 하고 가늘게 울었다. 나를 보는 신비로운 눈망울이 깜빡거렸다.
정말 나 혼자 두고 갈 거야?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쇠창살 손으로 손을 넣었다.
“사 줄게…… 언니가 사 줄게…….”
발딱 일어난 새끼 표범이 내 손바닥 위에 머리를 톡 올려놓았다.
이렇게 귀엽게 구는 건 반칙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눈표범의 턱밑이 무척이나 따끈하고 보드라웠기 때문이다…….
그래. 이런 위험하고 비인간적인 곳에 이렇게 어린 동물을 방치하는 것도 학대고 방조죄다. 나는 통한의 눈물을 삼키며 이 애를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뒷일은? 몰라. 일단 여기서 꺼내 주고 난 다음에 생각해야겠어.
나는 홀린 듯이 품을 뒤져 단도를 꺼냈다.
“언니랑 가자, 애기야……!”
곧 아이칼을 가둔 우리의 철창이 찐 달걀처럼 숭덩숭덩 잘려 나갔다.
* * *
공중에 피비린내가 짙게 떠돌았다.
어젯밤 내내 수도를 이 잡듯이 뒤졌으나 카티샤는 아무 데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만 하루를 공치자,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공작이 직접 심문에 나섰다.
저택의 지하에 있는 블라스코의 ‘수련소’는 대낮임에도 거의 빛이 들지 않았다.
푸르스름한 오러만이 사위를 비추는 가운데,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가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팔다리에 수갑을 찬 사내가 피로 얼룩진 돌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블라스코에 왜 영광보다 악명이 더 드높은지 아나?”
성한 구석이 없는 사내의 정수리로, 평연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자비를 베푸는 법이 없기 때문이야.”
루티어드는 발치에서 컥컥대는 사내를 무심히 응시했다. 인간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하등한 미물이라도 보듯, 시선에 온정이라곤 없었다.
그는 굳이 살기를 갈무리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날카롭게 벼린 푸른 오러가 춤을 추듯 유연하게 허공을 찢었다.
항상 적당히 갖추어 입던 제복은 진즉 벗어 던졌다. 더러워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셔츠의 목깃을 헐겁게 풀어내는 루티어드의 눈은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초연한 듯 보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크게 엇나가 있다.
그가 친히 허리를 굽혀 사내의 부러진 턱뼈를 움켜쥐었다. 어느새 그의 눈매에 찬웃음이 맺혀 있었다.
“내가 너 같은 놈을 한두 번 고문해 본 게 아니야, 친구.”
“커흡…….”
“의뢰 하나 잘못 받았다가 불구가 되어 나가긴 좀 억울하지 않은가?”
사내는 어제 마가렛 윈스티드가 포획해 온 카티샤 아인슬리의 납치 미수범이었다.
정확하게는 납치범과 페어를 이뤄 마가렛을 유인했던 동료다. 수도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용병단 소속이라고 했다.
루티어드가 피범벅이 된 사내의 뺨을 짐짓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입만 열어. 그러면 네 가족들, 친지들, 네 고향 사람들,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물러나 주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마저 살려 보내겠다는 뜻은 아니긴 하지만.
“자, 1분 주지. 마음을 정하는 게 좋을 거야.”
루티어드는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는 사내에게 빙긋 웃어 주곤 허리를 바로 세웠다.
사내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후벼 판 검이 그대로 사내의 몸을 뒤집었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반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검을 휘둘러 핏방울을 털어 내는 남자는 여전히 무척이나 여상스러웠다.
보통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과정은 공작의 손을 거치지 않았다. 한두 명도 아니고, 직접 검을 더럽히는 일들은 귀한 직계들이 아니라 그들을 보필하는 기사들의 몫이다.
그렇기에 베르너와 아르닌 역시, 공작이 직접 누군가의 입을 여는 광경을 보는 것이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조용히 수련소에 서 있던 남매는 오랜만에 서로 적의 없는 눈빛을 교환했다.
‘간만에 제대로 맛이 가셨네.’
‘누구 말릴 사람이 없나……?’
검사로 살아가며 피를 물처럼 보는 법부터 배운 남매였음에도 등골이 쭈뼛 곤두서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블라스코 공작이 웬만해서는 직접 나서지 않고 참는 이유는 딱 하나다. 과잉 진압, 혹은 과잉 고문.
마귀를 비호하는 가문이라 살인귀들만 득실거린다는 블라스코의 악명이 아주 허황한 것만은 아닌 셈이다.
“자, 30초 남았다.”
공작의 발치를 고통스럽게 기던 사내가 목이 졸리는 소리를 냈다.
“거…… 검투장…….”
이대로는 정말 죽겠다 싶었는지, 사내가 간신히 혀를 움직여 자백했다.
“펠라임 남쪽 지구의…… 유흥 거리 쪽에 있는…… 지하…….”
피떡이 된 사내가 쿨럭거리며 띄엄띄엄 말을 흘렸다.
유흥가? 루티어드의 눈썹이 비딱하게 치켜 올라갔다.
“사주한 놈은 누구야.”
“그건 모르…… 컥, 쿨럭. 의뢰인의 신상은 알 수 없……”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검을 가볍게 휘둘러 고쳐 쥐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바닥에 푹 꽂아 넣었다.
섬뜩한 파공음을 내며 내리찍은 검날은 정확히 사내의 엄지와 검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석판 바닥에 쩍 금이 가고 돌 조각이 튀었다.
“히이……익…….”
하마터면 눈앞에서 제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꼴을 목격할 뻔한 사내가 눈을 까뒤집었다.
루티어드가 선득하게 경고했다.
“불지 않으면 다음엔 엄지다. 누가 사주했지?”
“정말, 정말입니다! 정말 모르……! 익명으로 들어온 의뢰는! 펴, 평민은 아니었고 지체 높은 귀족 신분 같았는데, 계, 계약금을 두둑이 쳐 줬……”
“그래서? 아이를 납치한 후에 검투장에 팔아넘기는 것까지가 의뢰 내용이었다?”
“예……! 그 검투장도, 우리 용병단과는 관련이 없는, 쿨럭.”
참 복잡하게도 수를 써 놓았다. 들킨다면 뼈도 못 추릴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 루티어드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황실의 농간이라기엔…….’
지나치게 수가 지저분하다. 게다가 어쩐지, 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온갖 수는 다 써 둔 느낌인데…….
황실과 오르겐은 이런 식으로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 더 대놓고 도발을 하지. 어제 황성에서처럼.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가정이 떠올랐다.
‘방계 쪽인가?’
공작을 두려워하면서도 아득바득 수를 쓸 세력이라면 당장 떠오르는 건 방계뿐이다. 그는 여러 경우의 수를 계산하며 바닥에 박힌 검을 뽑아 들었다.
그대로 등을 돌려 나가려다 말고, 루티어드는 철창 앞에 부복한 마가렛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저 시녀를 곧잘 따랐던가. 항상 손을 잡고 다녔던 것 같은데.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곤 고개를 까딱했다.
“치죄는 아이를 찾고 나서 하겠다, 마가렛 윈스티드.”
“예! 각하.”
“펠라임 남쪽은 전부 다 뒤져. 선대께서 남기신 유일한 흔적이고, 블라스코가 보호하는 아이다. 이미 사방팔방 소문이 다 퍼진 것, 수도의 인력을 다 동원해서라도 찾아와.”
블라스코는 최강의 검가다. 적을 섬멸하는 것에 능한 만큼이나 아군을 보호하는 데도 빈틈이 없어야 했다. 실패는 11년 전의 참극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물며 내가 직접 키워 보겠다고 나선 애를 잡아가? 어디에 팔아넘겨? 검투장?
“허어…….”
그는 하도 어이가 없어 이마를 짚었다.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헛웃음을 짓느라 가늘어졌다.
“이…… 크루어드 아가리에 처넣고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들이,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지.”
창백한 뺨에 시퍼런 안광이 그림자처럼 드리웠다.
몸이 날래고 오러 감지 능력이 탁월하다고는 하지만 베르너나 아르닌에 비하면 평범한 축에 속하는 아이였다. 고도로 훈련한 자객들에게는 한 입 거리 수준일 것이다.
검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해도 아이는 쉽게 죽는다.
루티어드의 낯에 언뜻 초조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키스 경이 들고 있던 그의 망토를 홱 낚아챈 공작이 커다란 보폭으로 수련원을 나섰다.
“남쪽 지구로 간다. 도착하기 전까지 그 근방에 지하에서 운영하는 검투장이 몇 개나 있는지,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 와.”
“예, 각하.”
가주의 명령이 떨어진 즉시, 블라스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