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4)
4화
내 표정을 가만히 관찰하던 제미언이 천천히 마지막 질문을 꺼냈다.
“그럼 마지막으로. 헤르젠 님께서 혹시 카티샤 양에게 어떤 검에 얽힌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은 없습니까?”
“검이요? 헙.”
반사적으로 되물었다가 합 입을 다물었다. 객관식이었지, 참.
‘검이라.’
그래, 블라스코는 검가였다. 확실히 할아버지의 골동품들보다는 더 그럴듯한 화제다.
공작이 제미언에게 성의 없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직접 입을 열었다.
“오렌지.”
“예엡.”
“귀어스트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나? 이제 서술형으로 대답해.”
귀어스트. 당연히 들어 본 적 있다. 헤르젠 할아버지의 입을 통해서는 아니고, 내가 읽었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 딱 하나 있는 마검의 진명이었다. 바로 이 블라스코가 수호하는 검이자 헤르젠 할아버지의 영혼이 종속되었다는.
검 자체의 이름인 것은 아니고, 수백 년 전에 그 검에 복속된 마귀의 이름이 귀어스트였다.
마검의 진명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마귀의 이름이라 부정을 탄다는 이유로 입에 올리는 것을 엄금한 세월이 벌써 수백 년이었다.
‘그럼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전생에 책에서 봤다고 곧이곧대로 실토할 수는 없는데.
아주 잠깐 우물쭈물했을 뿐인데, 공작의 눈매가 대번에 10시 10분 모양으로 치켜 올라갔다.
“다시 묻겠다, 꼬맹이. 선대로부터 블라스코의 가보이자 아스트로카 제국의 유물 귀어스트를 승계받았나?”
“네에? 아니요!”
본능적으로 이건 절대 잡아떼야 한다는 직감이 왔다. 거짓도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귀어스트의 귀 자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래?”
블라스코 공작이 이가 드러나 보이도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조금 누그러지나 했던 음성에 다시 바짝 날이 서 있었다.
“그렇다면 이 유언장에 쓰인 내용을 달리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한번 설명해 봐.”
공작이 내 눈앞에 끝부분이 구깃구깃해진 서류 한 장을 들이밀었다. 바로 내가 아르템으로 부쳐 보낸 헤르젠 할아버지의 유언장이었다.
유언장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그 서류에는 달랑 이렇게만 적혀 있었다.
[내가 강산이 변하도록 키우고 있는 우리 집 꼬마 카티샤 아인슬리에게 헤르젠 페르난디트 블라스코의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을 상속하며, 또한 카티샤에게 마검 귀어스트의 적법한 주인으로서의 권한을 부여한다.이상 유언 끝.
이의 제기는 일절 받지 않음.]
그 밑에는 할아버지의 서명과 더불어 심상치 않아 보이는 황금색 인장이 서너 개씩 찍혀 있었다.
“어…….”
벌어진 입술을 타고 멍청한 소리가 흘러 나갔다.
귀어스트는, 대대로 가주에게만 승계되는 블라스코의 가보였다.
‘그걸 나한테 왜……?’
“아무래도 내 아버지가 네게 이 가문 전체를 넘기시려는 모양인데.”
공작의 퍼런 눈깔이 형형하게 번뜩거리는 게,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뿌득 이를 가는 동시에 입매를 말아 올리며 물었다.
“너는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오렌지?”
이제 공작은 사방으로 푸른 전류를 내뿜는 고슴도치처럼 보였다.
……우리 할아버지, 유언장 한번 시원스럽기도 하시지.
‘너무 찬바람 날려서 재산 상속받기도 전에 얼어 죽거나 할아버지 아들한테 찔려 죽게 생겼어요!’
나는 그만 속으로 꽥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 * *
헤르젠 할아버지가 마검을 내게 승계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이상 블라스코의 막대한 유산은 내 관심을 끌지 못했…… 아니, 조금은 덜 끌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마검을 현 공작에게 승계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운데, 대를 건너뛰고 친손주도 아닌 나를 후계자로 지목하다니?
‘나는 이제 죽었다.’
이어질 내 운명이 너무 투명하게 보여서 눈물이 났다.
제미언이 열심히 나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카티샤 양. 공작님께서 겉으로는 저렇게 툴툴거리셔도 카티샤 양을 당장 어찌하시려는 건 아닐 겁니다.”
“네에…… 끕.”
나는 상냥한 제미언의 손을 잡고 서재를 나왔다.
내가 눈물을 글썽거리는 게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내게 내 몸의 반절만 한 곰 인형을 안겨 주기까지 했다.
하긴, 보통 열 살짜리라면 눈앞에서 성인 남자 둘이 왁왁거리면 무서워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울어? 울어어? 지금 주먹 물고 통곡하고 싶은 게 누구인데 네가 울……”
“아이고오, 각하. 아이 앞에서 그렇게 눈을 부라리시면 못씁니다!”
“넌 대체 누구 편이야?”
“애기 편입니다!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리고 귀엽잖습니까!”
“귀여우면 다야!”
“예!”
“그건 그렇지.”
공작은 정말이지 극한의 다혈질이었다.
빠르게 열을 낸 만큼 급속도로 식어 버려서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헷갈리게 만드는 타입인 듯했는데, 난 그렇게 태세 전환이 빠른 사람은 처음 보았다.
“됐어. 머리 아프니까 둘 다 빠르게 사라져.”
더 이상 나를 세워 두고 왈가왈부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여겼는지, 공작은 금세 피로에 찌든 얼굴로 축객령을 내렸다.
천사 제미언이 나를 얼러 가며 침실로 안내해 주었다.
“자아, 여기가 카티샤 양이 머무를 방입니다. 어때요, 멋지지요?”
“네에…….”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사용인들에게 부탁하고요.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말해도 됩니다. 막 쪼그라들 필요 없어요. 울지 말고요, 뚝!”
“네…… 뚝…….”
젬, 이 착하고 친절한 사람…….
제미언이 내 손에 복주머니 모양의 뚱뚱한 지갑을 쥐여 주었다.
“자, 이건 카티샤 양의 비상금이에요. 선대 각하의 영령께서 카티샤 양이 오면 주라고 전언을 남기셨답니다. 앞으로 상속받아야 할 것들에 비하면 턱없이 약소하긴 하지만요.”
나는 묵직한 지갑을 쥐자마자 당장 눈물을 그쳤다. 부드러운 공단 속에서 둥글고 납작한 쇠붙이들이 서로 부딪치는 감촉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설마 이거 다 금화는 아니겠지?’
금화였다. 부피와 무게로 추측하건대 족히 50∼60개는 든 것 같았다.
‘50골드……!’
와, 이런 금덩이 처음 봐. 한번 깨물어 보고 싶어서 이가 근질거렸다.
‘이제 대체 몇 돈이야? 500그램은 되나?’
그럼 원화로 환산하면……?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미언이 내 목에 메달 하나를 걸어 주었다.
“그리고 이건 선대께서 쓰시던 패스랍니다. 수도의 중앙은행에 있는 선대의 금고와 연결되어 있는데, 아직 해금하지 않아서 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지고 있어요. 외상이 되거든요.”
“제, 제가 마음대로 써도 돼요?”
“그럼요. 시원하게 긁어요!”
검고 반질반질한 메달은 말하자면 한도 없는 블랙 카드였다. 그즈음 되니 상거지의 피가 흐르는 나는 이미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와, 블랙 카드도 처음 봐!’
내가 정신없이 메달을 앞뒤로 뒤집어 가며 구경하는 사이, 제미언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어린양이 이런 자비 없는 소굴에 굴러떨어져선……. 공작님께서 험하게 말씀하셔도 너무 상처받지 말아요, 카티샤 양. 인성이 아주 글러먹은 분은 아니랍니다. 유심히 잘 보면 따듯한 구석도 있으시거든요.”
“전 아주 괜찮아요. 그런 걸로 상처 안 받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유, 씩씩하기도 하시지.”
금과 블랙 카드의 가호만 있다면 세상 두려울 게 뭐 있으랴?
게다가 제미언은 뭔가 오해한 듯하지만, 내가 훌쩍거린 이유는 겁에 질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동안 나를 위로하던 제미언이 나가고 난 뒤,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금, 카드, 유물 컬렉션, 집문서. 그런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 마검.
마검을 상속받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나는 다시 가물가물한 원작의 내용을 박박 긁어모았다.
내 기억에 따르면, [지금 우리, 마법처럼>에서 마검의 승계자는 당대 가주와 마검 귀어스트의 합의를 거쳐 결정된다. 그리고 가주의 생이 다해 영령으로 검에 복속되고 나면, 마검의 소유권은 미리 결정한 후계자에게 자연스레 넘어간다.
그렇게 영령의 탑에서 정식으로 승계식을 치르면, 비로소 마검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보통은 가주직과 마검의 승계권이 동시에 후계자에게 넘어가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나 헤르젠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가주 직함만 내던져 놓고 잠적해 버린 셈이라, 할아버지의 사후인 지금에서야 마검의 승계권이 후계자에게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산 사람이 아니라 하필 죽은 인간의 영혼이 마검을 수호할까?
그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마검이 괜히 영령의 탑에 봉인되어 있는 게 아니다.
일단, 마검을 승계받는 인간은 대부분 본래 수명보다 단명한다. 죽고 나서 영령으로 다시 부활하는 것 같지만 육신을 잃는 건 마찬가지.
그렇다면 왜 요절의 위험이 큰가?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마검에 서린 마기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검을 승계하면 검에 깃든 마귀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세계 최강의 검사로 거듭날 수 있지만, 점차 이지를 잃고 마귀에게 동화되어 버린다.
동화율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 영혼이 타락해 버리기 전에, 후계자에게 걸린 블라스코의 금기가 후계자를 빠르게 죽음에 이르게끔 하는 것이다.
장정 너덧은 거뜬히 상대할 만큼 강건하던 헤르젠 할아버지가 고작 몇 달 만에 운명하실 정도면 말 다 했다.
제미언의 부연 설명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선대께서는 원체 기질이 강건하시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생전 귀어스트의 힘을 일절 빌리지 않으셨으니 장수할 수 있으셨던 거지요. 아예 귀어스트가 있는 아르템령을 떠나 계신 세월도 길고요. 많이 버티신 거랍니다.”
“보통은 마검을 승계한 순간부터 짧게는 10년, 아주 길게는 30년 정도를 더 살고 영령화해요. 평균적으로는 15년에서 20년 정도지요.”
강한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그래서 블라스코의 후계자들은 갓난아이 때부터 마기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후계자가 결정되면 평균적으로 30대 초반에 가주직과 함께 마검을 물려받고, 50대 즈음에 영령화한다.
그러면 또다시 30대 즈음인 후계자에게 가주직과 마검을 넘기는 식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간 고도로 훈련한 검사도 길어야 20년인데.’
그에 비해 난?
체력, 정신력, 공격력, 방어력까지 최대치를 찍은 공작가 직계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말랑말랑한 물몸.
그런 내가 마검을 승계한다? 아마 승계식조차 버티지 못하고 마기에 잠식될 게 뻔했다. 그러니 이건 그냥 응, 너 단명 엔딩. 이 소리나 다름없다.
“와아, 빗나가지 않는 데드 플래그.”
소설 속에서 환생하는 자들은 정말 개나 소나 데드 플래그가 꽂히는구나.
‘결국 사실상 시한부다 이거잖아?’
죽음의 위기는 아무래도 책 속 빙의자의 두 번째 숙명임이 틀림없다.
‘최소 500퍼센트의 확률로 즉사다.’
나는 현금 백만 골드에 목숨을 팔러 온 거야, 지금.
그렇게 생각하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만 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악, 싫어!”
절대 싫어. 죽으면 돈이고 집문서고 다 무슨 소용인가? 심지어 난 전생에도 열아홉을 못 넘기고 세상 하직했단 말이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음 날 아침, 나는 공작의 서재로 달려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