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44)
44화
“아직 이 몸이 덜 자라서 신수의 모습은 불편해.”
거만하게 다리를 꼰 아이칼이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자애롭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그럼 나가. 잘 가, 안녕. 교단에 잡히든 도로 검투장으로 끌려가든 아니면 당장 이 아래 수련소로 끌려가든 알아서 잘 살렴.”
“너는 비인간적이다. 생긴 것만 요정 같아.”
“너도 생긴 것만 천사 같지 성격 엄청 이상하거든!”
인간 모습의 아이칼은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차가운 채도의 눈동자까지 합치니 열 살 아이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거역하기 힘든 오라를 풍겼다.
저 기백 그대로 성인이 된다면 블라스코 공작과 비견할 만큼의 위압감을 자랑하게 되리라.
그렇게 속으로 경탄하기가 무섭게, 아이칼이 근엄한 목소리로 나를 치하했다.
“어쨌든 나를 사 줘서 고맙다, 언니.”
아이칼의 인상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압도적인 기백은 무슨, 저건 그냥 내 또래의 꼬맹이였다.
“언니 아니야……. 누나라고, 누나.”
교단에서 태어나 한 번도 바깥세상을 제대로 겪어 본 적이 없다면 인세에 무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호칭조차 모르는 건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넌 남자고 난 여자잖아. 넌 나한테 누나라고 불러야지.”
“너 몇 살인데?”
“열 살.”
“나는 51년 살았다.”
“…….”
이제 보니 어르신을 몰라뵌 건 내 쪽이었다.
조금 당황했지만 곧 신수와 인간의 나이 계산법이 상이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인간은 경사로를 올라가듯 천천히 성장하지만, 신수의 성장 그래프는 계단식이다. 중간 과정 없이 유년 모습에서 곧바로 성년 모습으로 건너뛰는 것이다.
종마다 다르지만, 환상종들은 대개 짧은 영아기와 긴 유년기, 그보다 훨씬 더 긴 청년기, 짧은 노년기를 거쳐 짧게는 수백, 길게는 수천 년의 세월을 살다 자연으로 돌아간다.
아이칼은 인간 혼혈이니 수명이 순혈의 신수보다 짧기는 할 테지만, 인간의 몇 배는 거뜬히 넘을 테다.
쉰한 살이면 인간 나이로는 열 살 언저리가 맞았다. 나는 내 마음대로 아이칼과 나를 또래 친구로 묶었다.
“나는 카티샤 아인슬리야. 이름이 카티샤, 성이 아인슬리.”
“카티샤.”
아이칼은 내 이름을 몇 번인가 입속으로 외어 보는 듯했다.
“카티샤. 이름이 예뻐.”
“어…… 고마워.”
“나는 아이칼이라고 부른다. 너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아이칼은 불쑥 제 이름을 내놓고는, 내가 내민 손을 빤히 보기만 했다. 결국 내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아다 흔들었다.
“이건 반갑다는 뜻이야. 처음 만난 사이에는 보통 이렇게 악수를 해.”
“그래? 신기한 절차다.”
이만 떨어지려는데, 아이칼이 강한 악력으로 내 손을 마주 쥐곤 위아래로 휙휙 흔들었다. 조금 과격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아이칼도 내게 반갑다고 말해 주고 싶은 듯했다.
이런 걸 보면 아무리 신수 혼혈이라도 어린이는 어린이…….
“자, 그럼 이제 누구를 죽여 줄까?”
“……뭐?”
내 안에서 새로이 정립한 아이칼의 이미지가 또다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혼란스러워 되묻자, 아이칼이 친절하게 좀 전의 발언을 반복했다.
“이제 내가 누구를 처리하면 되는지 말해 봐, 카티샤.”
이젠 잘못 들은 것이라며 귀를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사위가 어둑한 가운데, 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오묘한 눈동자가 꼭 짐승의 것처럼 번뜩이는 안광을 뿜었다.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나는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누굴 죽이면 되냐니…….”
“너는 나에게 너를 지키라는 조건을 걸었다. 너는 누군가에게 위협당하고 있는 거지?”
“……그렇기는 한데.”
“의심 가는 이들을 알려 줘. 아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자신 있게 선언한 아이칼이 문득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그러곤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꿨다.
“아, 하지만 아까 본 그자라면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 나는 비빌 수 있는 상대에게만 비비거든.”
그것 참 놀라 나자빠질 만한 생존 기술이었다. 이제 섬뜩함은 황당함으로 뒤바뀌었다.
“그자와 비등하게 겨루려면 내가 더 자라야 한다. 하지만 그 뒤에 있던 두 명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그 두 명은 베르너와 아르닌을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베르너가 작년에 대륙 랭킹 3위에 이름을 올린 검사라는 걸 생각하면 아이칼의 수준을 대강 짐작할 만했다.
문득 심란해졌다.
‘난 대체 뭘 산 걸까?’
어쩌면 2000골드로 아이칼을 데려온 건 무척 싸게 먹힌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우선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아니야. 아까 내가 그랬잖아. 우리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줄 주인집 분들이라니까. 이 집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해치면 안 돼.”
“그럼 너는 누구를 두려워하는 거지?”
“……일단은, 갈색 삐죽 머리에 흐린 회색 눈을 가진 스물여덟 살짜리 젊은 남자. 이름은 시벨 블라스코.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감시관이야. 지금은 수련소에 있기는 하지만.”
“그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칼이 몸을 바로 세웠다.
나는 그가 흰 오러를 풍기며 사라지기 전에 재빠르게 바짓가랑이를 쭉 붙잡았다.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 당장 죽이라는 게 아니라고!”
“그럼?”
“예의주시하라는 말이야. 분명히 나를 납치하라고 사주한 게 독단적인 행동은 아닐 거란 말이지. 결탁해 있는 다른 세력이 분명 있을 텐데…….”
“아하. 한둘이 아니라는 뜻이군.”
아이칼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금방이라도 그가 저택 어딘가에서 칼부림을 할까 가슴이 콩알만 하게 졸아들었다.
“모르지. 한둘에서 그칠지, 아니면 수십 명에 달할지. 아무튼 나를 납치하려거나, 해를 끼치려 하거나, 속여 넘기려거나, 기타 등등 이상한 낌새를 보이는 것들이 있으면 죽이지 말고 일단 뒷배를 캐내야 해. 알겠지?”
“알겠다.”
아이칼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출격하려는 결심을 접었는지, 하얀 오러가 공기 중으로 깨끗하게 녹아들어 갔다.
‘다루기 어려운 편은 아닌 것 같은데. 도무지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가 없으니…….’
게다가 그 전에, 아이칼은 이런 명령을 받는 것에 익숙해 보였다. 하지만 성검의 주인은 살생보다는 구제에 더 익숙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아니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함인지. 아이칼이 자신 있게 덧붙였다.
“무언가를 지키는 건 어렵지 않다. 그게 내 사명이니까.”
“사명이라니…….”
언니와 누나의 차이도 모르는 아이칼이 알기엔 너무 고급 단어였다. 보통 열 살짜리에게 사명이 있을 리도 없고.
“왜 사명 같은 걸 가지고 있어?”
“그게 왜? 나는 51년간 교단을 지켰다. 그게 내 사명이라고 했어.”
“누가?”
“교단주가. ……이상해?”
아이칼은 외려 내 반응이 의아한 듯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혀 침묵했다.
“……사명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
“태어난 목적. 살아가는 이유. 죽음의 의미.”
그렇게 대답하는 아이칼은 전혀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애가 교단과 관련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교단을 왜 빠져나온 거야?”
“하기 싫어서 가출했다.”
“뭐가 하기 싫었는데?”
“매일 같은 훈련. 같은 식사. 같은 인간들. 같은 훈육. 지겨워서.”
텅 빈 목을 문지르는 손동작이 어색했다. 가죽 구속구로 가려져 있던 목에 여덟 개의 십자가 모양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원작에서 저런 흉터를 묘사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 우리, 마법처럼>에서 선악의 대비는 극명했다. 블라스코는 절대 악이었고, 그에 대적하는 니엘라와 백의 교단은 절대 선으로 그려졌다.하지만 아이칼의 표정이나 몸에 남은 상처, 교단이라면 학을 떼는 태도로 보건대 저 애가 교단에서 어떤 대우를 받아 왔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성검의 주인이자 교단의 파수꾼으로서 오랜 세월 방패 역할로 ‘사용’된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아마 최전선에 내몰려서.
‘백의 교단이 위치한 곳은 대륙 최북단의 이렐 반도라고 했지.’
예로부터 북해에는 마물이 들끓는다고 했다. 거길 지켜 온 게 틀림없다. 무려 51년 동안이나.
‘잘 데려왔다.’
2000골드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배를 줘서라도 얘를 데려와야 했어. 나는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누나 동생 말고, 우리 그냥 친구 하자.”
“친구?”
아이칼이 무척이나 생소한 단어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가 친구라는 단어의 정의를 엉뚱하게 내리기 전에 재빨리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외로울 때 곁에 있어 주고, 기쁠 때 함께 축하해 주고, 슬플 때 위로해 주는 게 친구야.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와주고.”
“친구라는 건 항상 옆에 있는 건가?”
“뭐…… 그렇지.”
“계속? 평생?”
“응? 글쎄, 중간에 절교하지만 않는다면야 뭐…….”
겨우 친구라는 단어를 가르쳤는데 곧바로 절교의 뜻을 납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약간 떨떠름하기는 했지만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다면 평생 함께할 수 있겠지. 우정이란 그런 거니까.”
“아하. 그런 것이구나.”
슥 고개를 기울이는 아이칼의 이마 위로 긴 백발 타래가 흘러내려 와 있었다.
불쑥 저 치렁치렁한 머리 타래를 예쁘게 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봤다간 귀신인 줄 알겠다.
‘머리카락이 예쁜 얼굴을 다 가리네.’
오만한 눈매와 애늙은이 같은 말투에 가려서 그렇지, 이 애는 요모조모 보면 빼어난 미소년이었다.
갸름하지만 아이답게 젖살이 남은 통통한 뺨이나 사내애치곤 붉은 기가 도는 입술,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나붓이 팔랑거리는 하얀 속눈썹 같은 것들 말이다. 꼭 겨울 왕국의 왕자님처럼 생겼다.
게다가 저 미묘하게 즐거운 듯한 웃음도…….
잠시 아이칼을 감상하던 나는 문득 드는 위화감에 인상을 찡그렸다.
‘웃는 게 왜…… 저절로 죄가 씻겨 나가는 것처럼 성스럽고 예쁜 미소인데 왜 이렇게 한기가 들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