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45)
45화
휘어진 아이칼의 입술 사이로 작은 송곳니가 드러나 있었다. 놀라우리만큼 정결한 백색의 소년이 흡족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좋아, 마음에 들어.”
“어…… 그래.”
잘못 봤나? 검투장의 우리 속에 갇혀 있었을 때 잠깐 목격했던 소슬한 기색은 어느새 깨끗이 사라졌다.
“음…… 잘 지내보자.”
“그래.”
이번에는 아이칼이 먼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다시 엄숙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아이칼은 응용력이 꽤 뛰어났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사실 아이칼의 성장기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일이다.
미래에 혹시 아이칼이 나와 적대 관계에 놓일 운명이라고 해도, 설마 어릴 적부터 함께한 친구를 해치지는 않겠지.
‘좋아, 소꿉친구. 난 이제부터 남주인공의 소꿉친구다.’
그럼 적어도 죽을 걱정은 없겠지!
나는 대충 고민거리들을 봉합한 뒤, 잠옷 자락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럼 잘 자, 친구야. 내일 아침에 누가 들어오기 전에 눈표범으로 돌아가 있어야 해. 알겠지?”
그렇게 말하고 침대로 기어들어 가는데, 어느새 번개처럼 따라온 아이칼이 이불을 속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친구야, 나도 침대에서 잘래.”
“뭐야? 싫어.”
“왜?”
“자고로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였다. 저리 가. 나 잠버릇 험하단 말이야.”
“싫다. 나도 여기서 잘래.”
이건 또 무슨 억지야? 나는 애써 참을 인 자를 새기며 소년을 살살 달래 보았다.
“저거 보이지, 저 소파? 저거 엄청 비싼 거야. 침대만큼 편해. 저리 가서 자! 내 베개 내놓고……!”
“네가 5분 전에 네 입으로 우리는 계속 함께라고 했다!”
“그건 이런 뜻이 아니었거든! 이…… 이 떼쟁이!”
“너는 거짓말쟁이다. 이 사기꾼!”
나는 이미 아는 사실을 다시 되새겼다. 아이칼은 고집이 세다. 그리고 이상한 곳에서 응용력이 뛰어나다. 나는 아이칼 관찰 일지에 새로운 사실들을 추가하며 이를 득득 갈았다.
그러나 애를 소파에서 재우기도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검투장에서 보름이나 갇혀 있었고, 그전에도 교단에서 좋은 취급을 받진 않았던 것 같은데……
게다가 내 침대는 이쪽에서 저쪽까지 다섯 번은 굴러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소년에게 푹신한 침대 한켠 내주지 않고 냉정하게 소파로 쫓아낼 만큼 나는 모질지 못했다.
“알겠어, 알겠어……. 이리 와. 대신 너 자다가 나한테 발로 차여도 불평하면 안 돼.”
“발로 차면 원래대로 돌려놔 준다.”
“그래. 그래라…….”
아이칼은 마치 제 자리 마냥 내 옆자리를 차지하곤 이불을 코까지 폭 덮었다.
“그럼 안녕.”
“……그래……. 잘 자.”
이쯤 되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나는 밀어 두었던 고민을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순진무구한 얼굴을 해서는 침투력이 장난 아니야, 얘.’
대체 나는 2000골드나 주고 뭘 곁에 두게 된 걸까?
* * *
그 뒤로도 아이칼과 얼마간 더 아웅다웅하다 꼴깍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새벽이 다 지나기도 전에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 보니 허여멀건 머리 타래가 얼굴에 거미줄처럼 잔뜩 엉겨 있었다. 그러나 잠을 깨운 것은 아이칼의 머리가 아니었다.
“어…….”
명치가 이상하게 뜨겁고 답답했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손으로 목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곧 나를 깨운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늘 목에 지니고 있게 된 조개 로켓이 화덕에 달군 돌처럼 뜨거웠다.
조개의 틈 사이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기시감에 잠이 번쩍 깼다.
조개를 내 힘으로 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빛을 뿜어낸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뿐이었다. 처음 그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날처럼, 내 손바닥 위로 둥실 떠오른 조개가 저절로 활짝 열렸다.
어마어마한 빛이 쏟아져 나를 집어삼켰다.
“……!”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 나는 로켓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늘 떨어지곤 하는 그 궤짝 안이었다.
“아야야…….”
엉덩이를 잘못 찧는 바람에 알싸한 통증이 올라왔다. 아픈 곳을 문지르며 간신히 궤짝에서 기어 나왔을 때였다.
테이블 위에 전에 없던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타자기 위, 반투명한 스크린에서 뿜어내는 빛이었다.
홀린 듯이 일어나 타자기 앞으로 다가갔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뻗은 손끝이 반짝거리는 스크린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익숙한 알림 창이 떠올랐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스크린에 떠오른 [예]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기대감과 불안감으로 잘게 떨렸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로딩 바가 느리게 차고, 곧 익숙한 페이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원작의 새로운 회차가 열렸다.
* * *
다음 날 아침.
카티샤는 공작의 서재에 나타나지 않았다.
집무실의 소파에는 시간에 맞춰 내려온 루티어드와 그보다 조금 일찍 나온 베르너, 5분이나 지각한 아르닌이 몹시 어색하게 둘러앉아 있었다.
아침이니만큼 부담스럽지 않도록 댓잎에 감싸 담백하고 향기롭게 쪄 낸 오리, 잘게 찢은 게살을 넣은 수프, 새벽같이 화덕에서 구워 낸 따끈따끈한 바게트, 오색의 과일로 꾸민 푸릇한 샐러드로 차린 조찬이 소파 앞 테이블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음식에 먼저 손을 뻗지 않았다.
“…….”
소름이 돋을 만큼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지켜보는 제미언과 주방장 호미, 마가렛 대신 시녀장직을 위임받은 카렌은 너 나 할 것 없이 식은땀을 흘렸다.
평소라면 블라스코의 직계 세 명이 오손도손 모여 아침을 먹는 풍경 따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 그들이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이유는 긴히 논의한 안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늘 평소처럼 서재로 공작과 카티샤의 아침 식사를 올리던 주방장에게 언질을 준다는 것을 그만 깜빡한 것이 패인이다.
아르닌과 베르너가 서재를 노크했을 때에는 이미 테이블에 음식들이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루티어드는 한동안 이 침묵을 타파할 방법을 고민하다, 결국 낮게 한숨지었다.
“먹어라. 배가 차야 이야기를 하든 몸을 쓰든, 뭐든 하지.”
“……먼저 드십시……”
“그럼 잘 먹겠습니다.”
베르너가 고심 끝에 내놓은 대답은 아르닌에 의해 간단히 끊겼다.
아르닌이 테이블 아래로 베르너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입가로 가져온 샌드위치를 방패 삼아 아르닌이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닥치고 먹어, 이 멍청아. 어색하잖아.
결국 베르너는 마지못해 수프 그릇에 손을 가져갔다. 루티어드는 남매가 조용히 식사를 시작하는 것을 확인한 뒤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침묵의 식사는 아르닌과 베르너가 각자 식후 디저트까지 말끔히 비우며 막을 내렸다.
루티어드는 아이들이 식기에서 손을 놓을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다, 천천히 본 화제를 입에 올렸다.
“소문의 근원지는 리덴 영지라더구나. 선대와 카티샤가 살았던.”
직계들끼리 상의해야 할 안건은 바로 카티샤의 안전에 관한 문제였다.
블라스코에 상속녀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처음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리덴의 남쪽 마을 텔파에서였다. 카티샤의 이웃들이 카티샤가 블라스코 가문의 인장이 찍힌 마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목격한 것에서 소문은 출발했다.
“이미 수도 전역에 소문이 퍼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더군. 어제 같은 납치 사건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어.”
현재의 카티샤는 황실이 공격하기 딱 좋은 대상이었다.
정식으로 블라스코의 성을 받은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귀족 태생인 것도 아니니 막말로 누군가 그 아이를 납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고 해도 블라스코에서는 반격을 가할 명분이 없는 셈이었다.
반면 황실이 평민을 밟아 터트리는 데는 아무런 명분이 필요하지 않다. 황족 앞에서 숨만 잘못 쉬어도 교수대로 끌려갈 죄목으론 충분하다. 극단적인 예시이기는 하나 현실이 그랬다.
외교에서든 국내 정치에서든 모름지기 가장 중한 것은 명분이다. 그 중요한 무기를 황실은 가지고 있지만, 블라스코는 쥐지 못했다.
그저 작고 귀여운 어린이일 뿐이니 조용히 데리고 다닐 수 있을 거라고 가벼이 여긴 것이 어제와 같은 결과를 불러왔다. 재발은 없어야 했다.
“카티샤는 그런 위험에 처할 이유가 없어요. 그 아이의 죄라면 재수 없게 하필 블라스코와 얽혔다는 것뿐이죠. 걔가 뭘 알았겠어요? 할아버님의 정체도 여태껏 모르고 살았다는데.”
아르닌의 음성에 분기가 깃들었다. 그녀는 루티어드의 시선을 똑바로 받으며 의견을 내놓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카티샤가 빠르게 상속 시험을 통과하고 정식으로 블라스코의 성을 받는 거예요. 일정을 좀 당기고, 난이도도 하향 조정해서요.”
카티샤가 평민인 것이 문제라면 블라스코의 성을 달아 주면 끝날 일이었다.
상속 시험이라는 복잡한 절차가 기다리고 있지만, 남은 세 시험을 쉬운 문제들로만 구성해 속성으로 끝내 버리면 될 일 아닌가?
“물론 방계에서는 반대표를 던지겠지만, 사실 저는 그쪽도 영 못 미더워서.”
“……그래. 확실히 이상하지.”
리덴에서 펠라임은 제국의 끝과 끝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아무리 이동진이 발달했어도 두세 번씩 갈아타야 하는 거리고, 애초에 리덴은 외지와의 교류도 드물었다.
그러니 카티샤에 대한 소문이 펠라임에 횡행하게 된 데는 분명 특정 세력의 개입이 있었을 터.
루티어드는 어제 카티샤가 돌아오는 마차에서 했던 말들을 기억했다.
“시벨에게 열쇠가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남겨 주셨던 금고 열쇠요. 지금은 제가 잠금을 바꿔 놓아서 쓸모는 없지만요.”
카티샤에게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수련원에 갇힌 시벨 블라스코를 수색했다. 그러나 아이가 말한 열쇠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행적에도 특별히 의심이 갈 법한 부분은 없었다. 펠라임에 거점을 두는 용병단과 접촉한 정황도, 검투장에 들락거린 적도 없다.
“마지막에 시벨이 기분 나쁘게 웃는 것 같아서…….”
그러나 루티어드는 카티샤의 말을 흘려듣지는 않았다.
‘애가 괜히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는데.’
괜한 심술로 시벨에게 누명을 씌울 만큼 악독한 아이는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가 판단한 모습만으로는 그랬다.
카티샤는 아무리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어도 남을 끌어내리며 제가 올라갈 타입은 아니었다.
‘절대 그 검투장에서 새끼 표범을 구해 냈기 때문만은 아니고.’
겁이 없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용맹하기까지 한 줄은 몰랐는데…….
자고로 동물을 사랑하는 자치고 진짜 악인은 없는 법이니…….
그리고 눈표범은 아스트로카에서는 보기 힘든 희귀종…….
아니, 이게 아니지.
루티어드는 물 흐르듯 슬렁슬렁 흘러가 버리는 마음을 도로 다잡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