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46)
46화
“일단 게스파 숙부님께 연락을 취해 감독관을 다른 이로 교체하도록 말해 뒀다. 그리고 당분간 첸 블라스코가 맡은 마정석 수입 사업은 일체의 권한을 본가로 옮겨 온다. 사유는 내 마음.”
마침 시벨 블라스코는 감독관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과실로 수련소에 처박혔다. 이제 첸 블라스코가 어찌 움직이는지 예의주시할 차례다.
아직 상속 시험은 세 번이나 더 남았다. 첫 시험은 카티샤의 승리로 끝났으니, 정말 아이를 노리는 게 방계 쪽이라면 남은 세 번의 시험을 치르는 동안 다시 움직임을 보일 터.
‘게스파 숙부님 쪽도 완전히 신임할 순 없겠군.’
그러잖아도 황실이 눈엣가시인데 방계마저 경계해야 한다니. 루티어드의 눈 밑에 피로감이 가득 쌓였다.
역시 이런 얍삽한 정치질은 그의 취향이 아니다. 그는 머리싸움보다는 몸싸움을 더 선호하고, 굳이 정치를 해야 한다면 공포 정치 쪽이 좋다.
하지만 집안에 어린애가 들어왔으니 대놓고 험한 꼴을 보일 수도 없고. 이래저래 참 골치가 아프다.
애를 키운다는 건 원래 이런 건가?
루티어드는 미간을 꾹꾹 누르다, 베르너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첫째가 이상하리만큼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루티어드는 어렵지 않게 아이의 속내를 짐작했다.
“너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가 보구나, 베르너.”
“……무엇이 말입니까?”
“카티샤.”
정곡을 찔렸는지, 베르너의 무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베르너는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묵묵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르닌이 도끼눈을 뜨고 오빠를 노려보았다.
“달갑지 않아? 그럼 그 애가 어제처럼 납치 미수에 시달리는 걸 그냥 보고만 있겠다는 뜻인가?”
“그렇게 말한 적 없다. 비약하지 마, 아르닌.”
베르너가 못마땅하게 동생을 노려보며, 공작을 향해 말했다.
“저는 단지, 상속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 아이에게 사적인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 혹시라도 직계들의 관심이 그 애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하지 않았으면 해서요. 시험은 시험. 공명정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뒷말도 나오지 않을 테고요.”
“시험을 다 치르기도 전에 애가 다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
“그에 대한 방비책은 당연히 세워 둬야겠지, 아르닌. 그런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베르너가 돌연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그가 옆자리의 동생에게 비웃음 섞인 시선을 던졌다.
“언제부터 네가 그 꼬마를 그렇게 아꼈는지 모르겠군.”
“뭐?”
“분명 네 목적은 할아버님의 금고가 아니었나? 그 꼬마가 너에게 드워프의 유물을 건네줬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뇌물을 받더니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구나.”
“어, 그래. 받았다. 부럽냐?”
아르닌이 지지 않고 빈정거렸다. 공작은 남매의 눈에 각각 불씨가 튀는 것을 보고는 조용히 미간을 문질렀다. 또 시작이군.
‘보통 남매들은 다 저렇게 죽일 듯이 싸우면서 크나? 우리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베르너와 아르닌은 이제 맞은편에 앉은 공작 따위는 말끔히 잊은 듯했다. 아예 아르닌 쪽으로 상체를 비튼 베르너가 살벌하게 쏘아붙였다.
“어린애 뜯어먹을 생각이나 하고. 속이 시커먼 것은 네 쪽이지, 내 쪽이냐?”
“쭉 지켜보자니 나쁜 마음을 먹을 깜냥은 없는 애 같고, 귀엽고, 약속도 꼬박꼬박 잘 지키려는 게 기특해서 마음에 들었다, 왜? 안 돼? 하긴, 넌 카티샤랑 길게 이야기해 본 적도 없지?”
“왜 없어? 있다.”
아르닌의 비아냥은 수준급이었다. 베르너는 발끈해 대답해 놓고서도 멈칫했다.
길게 이야기……한 적 있지. 하녀로 착각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엄연히 속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한 적이 있었다.
‘각하가 그다지 아버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까지 했잖아.’
그 정도면 베르너로서는 속을 거꾸로 까뒤집어 보여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감에 차 고개를 치켜들었다.
“비밀 이야기도 했다, 왜? 너만 한 줄 알아?”
“그래? 너 걔한테 뽀뽀 받아 봤어?”
“뭐?”
아르닌이 던진 말에, 공작과 베르너가 동시에 팍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그러고는 둘 다 놀라 서로를 잠깐 바라봤다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시 아르닌에게로 눈을 돌렸다.
아르닌은 아주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카티샤에게 뽀뽀받은 건 할아버님을 제외하면 나밖에 없을걸.”
둘의 공방을 숨죽여 지켜보던 블라스코의 사용인들이 일제히 입술을 오므렸다. 제미언과 키스 경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너도 있지? 응, 당장 어젯밤에도. 다들 한 번씩은 다 받았을걸…….
그들이 입을 다물기로 무언의 합의를 한 사이, 베르너가 한 박자 늦게 부정했다.
“난…… 그런 거 필요 없다. 유치하긴.”
그러나 단어 사이의 짧은 공백에서 이미 망설임이 티가 났다. 공작은 이제 소파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 남매의 공방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논점 흐리지 마, 아르닌. 난 블라스코의 명예와 긍지를 운운하며 콧대를 세우던 네가 고작 뇌물에 태도를 달리했다는 걸 지적하는 거다. 보다 본질적인 걸 말하는 거라고.”
아르닌이 별 우스운 말을 다 들었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웃기고 있네. 애꿎은 날 갖다 붙이지 말고 인정해. 너, 그 애가 부러운 거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베르너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날아갔다.
머쓱함과 오기마저도 지워진 그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아르닌은 통쾌한 기분으로 관조했다.
“그렇잖아. 할아버님이 생전에 카티샤를 얼마나 아끼셨는지는 지금 이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지. 게다가 나도 그 애 편에 섰고, 심지어 아버지까지 걜 신경 쓰고 있으니까.”
난 네가 뭘 가장 바라는지 알아, 베르너. 오빠에게 상체를 기울인 아르닌이 비웃음을 섞어 속삭였다. 공작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인정받고 싶은 거잖아, 너. ‘아버지’께.”
“……닥쳐, 아르닌.”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후계자로서 인정받고 싶은 거지? 그래서 불순물이 끼어드는 게 싫은 거잖아.”
“…….”
“그거, 자격지심이야.”
아르닌이 그 발언을 내뱉는 순간이었다. 베르너의 주위로 새파란 오러가 들고 일어났다. 그의 손은 어느새 검 자루에 얹혀 있었다.
“자꾸 까부는데, 아르닌. 네가 내 동생이라고 베지 못할 줄 안다면 착각이고 오산이다.”
여동생을 노려보는 베르너의 파란 눈에 그의 주위를 휘도는 살기가 그대로 배어 있었다.
아르닌 블라스코는 늘 하나뿐인 오빠의 치부를 낱낱이 들쑤시곤 했다. 잔인하기 그지없게.
단지 꼴도 보기 싫은 형제의 약을 올리는 못된 심보에서 비롯한 시비라는 걸 알아도 눈이 뒤집혔다. 누가 더 훌륭하게 빈정거릴 수 있는지를 따지자면 그도 아르닌에게 뒤지지 않는다.
“너 말 잘했다, 그래. 그러는 넌 내게 밀려 만년 2인자라 아주 만족하나 보군. 그래서 틈만 나면 대련하자고 달라붙어? 어차피 질 게 뻔한데?”
빙글거리던 아르닌의 낯에 균열이 일었다. 이제는 베르너가 통쾌함을 만끽할 차례였다.
“너는 나를 무릎 꿇리는 것으로 네 열등감을 채우려고 하잖아. 너보다 잘난 사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오…… 그래? 어디 한번 붙어 봐?”
아르닌이 웃음이 한 조각도 남지 않은 표정으로 긴 감탄사를 흘렸다. 동공이 확연히 줄어든 것은 그녀도 매한가지였다.
이미 꼭지가 돌아 버렸을 때의 남매는 곁에서 무슨 말로 뜯어말려도 끝끝내 서로에게 한 방씩 주먹을 먹여야만 진정했다.
이럴 때 둘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안 그래도 네가 아닌 척 날 봐주는 꼴이 고깝기 그지없었거든. 오늘 한번 제대로 붙어 보자. 누가 정말 우위에 있는……”
“그만.”
달칵. 찻잔이 접시를 긁는 소음이 남매 사이를 갈랐다. 아르닌이 흠칫하며 맞은편을 곁눈질했다.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내려 둔 공작이 다리를 꼬고 소파에 깊숙이 등을 파묻었다.
검을 쥐는 자답게 손에는 굳은살이 이곳저곳 박여 있었으나, 턱 끝을 매만지는 손 모양은 흠잡을 곳 없이 우아했다.
스파크를 튀겨 대며 맞부딪치는 남매의 오러와는 달리 그의 주위로는 조금의 빛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거역할 수 없는 기백이 남매의 손을 묶고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서재의 온도가 족히 3도는 떨어진 듯 한기가 몰려왔다.
서릿발 같은 음성이 둘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머리들이 좀 컸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베르너. 그리고 아르닌. 지금 누구 앞에서 언성을 높이지?”
서로의 험담을 면전에서 쏟아 내던 남매가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아르닌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이지만 역시 저렇게 경고를 날리는 모습은 공포심을 일깨웠다. 베르너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온하게 손끝을 모은 공작이 문가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쌈박질을 할 거면 나가. 칼질은 연무장에서.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내 앞에서 치고받으려면 나를 먼저 상대할 각오를 해야 할 거다.”
아무리 희대의 천재들이라 추켜세워지는 남매라도 공작 앞에서는 하룻강아지나 다름없었다. 멋모르고 덤볐다간 1분도 채우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게 뻔하다.
먼저 고개를 숙인 쪽은 베르너였다.
“죄송합니다. 경우가 없었습니다.”
“……죄송해요, 아버지. 한마디 가볍게 해 주려던 게 그만.”
아르닌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공작은 소파의 팔걸이를 검지로 툭, 툭 건드리며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상속 시험은 예정대로 진행한다. 베르너의 말대로 선대의 상속인으로서, 그리고 블라스코의 직계로서의 자격을 시험하는 절차야. 허튼 장난질이나 부정행위 따윈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지만 그 중요한 시험을 치르는 중에 쓸데없는 위험에 빠지는 것도 말이 안 되지. 그러니 앞으로 꼬리를 잡을 때까지 꼬마가 산책을 가고 싶다거나, 놀러 가고 싶어 한다거나 하면 여기 셋 중 한 명이 무조건 따라간다.”
공작의 그 말에 놀란 것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서재 앞을 지키던 키스 경이었다. 잔뜩 긴장해 있던 그의 표정이 몹시도 기묘해졌다.
‘직접 호위를 자처하신다고……? 저 세 분이……?’
간단하고 뒤탈 없는 방법이기는 했다. 호위를 자처하는 그 세 인력이 시간당 1000골드로도 고용할 수 없는 최고급 인력이라는 점만 빼면.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위화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르닌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수긍했다.
“네, 아버지. 괜찮은 방법이네요.”
“따르겠습니다.”
음, 카티샤 아기씨는 이제 세상 무서울 게 없으시겠군.
블라스코에서 가장 강한 검사 셋이 번갈아 가며 옆에 붙어 있다면 오히려 정적의 안위를 염려하는 게 맞았다. 키스 경은 얼결에 안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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