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47)
47화
화제가 마무리되고 나자, 서재에는 또다시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분위기를 타개할 방법은 하나였다. 루티어드는 혀를 차며 키스 경을 돌아보았다.
“꼬마는 왜 안 내려와?”
“아, 그게. 실은.”
키스 경이 조심스럽게 서재의 문을 열었다. 새하얗게 질린 카렌이 서둘러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말씀 중에 송구합니다만, 각하. 지금 바로 아기씨께 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루티어드의 눈썹이 즉각 팔자로 모였다.
“간밤에 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게, 저…….”
안절부절못하던 카렌이 눈을 질끈 감고 고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아기씨께서 새벽부터 아침까지 내내 울음을 그치지 않으셔서…….”
“뭐? 운다고?”
“간밤에 악몽을 꾸셨는지……. 아무래도 큰일을 당할 뻔하셨으니까요. 잠을 설치신 모양입니다.”
레몬 허브 에이드를 공연히 뒤섞던 아르닌이 인상을 찡그렸다. 침중하게 가라앉아 있던 베르너의 눈매 역시도 미세하게 움찔했다.
서재 밖에서 블라스코 직계들의 기색만 살피던 제미언이 슬그머니 문틈으로 말을 얹었다.
“각하, 한번 가서 살펴봐 주심이……?”
제미언은 굳이 말을 맺을 필요도 없었다. 그가 설득할 말을 좀 더 궁리하며 고개를 든 순간 이미 공작이 서재를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과연, 반쯤 열린 아이의 침실 안에서는 서럽게 오열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검투장에서 빠져나오다 공작을 발견하고 울음을 터뜨렸을 때보다 더 구슬픈 울음소리였다.
시녀들이 인형과 디저트들을 흔들어 가며 달래고는 있었으나 별 효과는 없어 보였다.
“애가 왜 울어, 갑자기?”
“그게…… 음……. 저로서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아기씨께서 말씀을 하실 생각이 없어 보이셔서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아침나절 내내 울기만 해?”
“예……. 나쁜 꿈을 꾸신 것 같기도 하고요.”
7시면 반짝 눈을 떠 먼저 시녀를 기다리고 있던 카티샤가 오늘은 왜인지 잠잠했다. 그를 의아하게 여긴 카렌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고, 그녀는 새끼 눈표범을 끌어안고 하얀 털이 흠뻑 젖도록 통곡하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저거 완전히 울보였군.”
루티어드가 혀를 차며 아이의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히끅거리던 카티샤는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곱슬거리는 주황색 머리카락이 조그만 몸을 다 덮을 만큼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확실히 아이는 표정이 다채롭고 눈물도 많았다. 나이답지 않게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게 아닌가 싶으면 바로 다음 순간 영락없는 열 살 꼬맹이로 돌아온다.
“오렌지.”
끕끕거리던 카티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온 얼굴이 눈물콧물 범벅이었다.
어째 납치당해 짐승이나 가둘 법한 우리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고 나왔을 때보다 더 꼬질꼬질하다. 저렇게 세상 서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아침나절부터 왜 또 눈물 바람이 났어.”
루티어드는 한숨을 쉬며 손수건을 꺼내 손바닥만 한 아이의 얼굴을 슥슥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는 열 살짜리 아이를 직접 키워 본 적이 없었다. 우는 애를 달래 본 적도 없고, 더러워진 얼굴을 씻겨 본 적도 없었다. 자연히 아이를 어느 정도의 힘으로 다루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공작의 세심하지 못한 손길을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던 카렌이 입을 벙긋거리며 속삭였다.
“각하, 살살. 살살……!”
카티샤의 뺨이 빨개져 있었다. 루티어드는 당혹감을 느끼며 손에서 힘을 뺐다. 카티샤가 크게 코를 훌쩍대자,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었다.
“더럽게 뭘 들이마시는 거야?”
“크흥…….”
결국 루티어드는 카티샤를 번쩍 들어 올려 침실 옆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눈치 빠르게 달려온 카렌이 대야에 세숫물을 받았다.
베르너와 아르닌도 이런 식으로 키우지 않았는데……. 약간의 자괴감이 들었지만 이번에도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먹지 말고 킁 해.”
카티샤가 앙증맞게 팽 소리를 냈다. 코를 풀란다고 또 아무 망설임 없이 푼다.
루티어드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아이의 얼굴을 물로 깨끗이 닦아 냈다.
뽀얘진 얼굴에 방울진 물기를 수건으로 훔치고 붕 뜬 머리카락을 손빗으로 슥슥 빗어 주기까지 한 뒤에야 카티샤는 그나마 봐 줄 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코는 딸기처럼 빨갰다.
그즈음 되니 아이도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카티샤가 딸꾹거리며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죄송합니다아……”
“뭐가 죄송해.”
“공작님 손에 코 풀었어요…….”
“알긴 해서 다행이랄지.”
아무래도 저 빨간 코가 카티샤 아인슬리의 공격력을 증가시키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돌아볼 틈조차도 주질 않으니.
루티어드는 저기 새 비누가 있다며 꼼지락대는 카티샤를 달랑 들고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어찌나 깔끔히 씻겼는지 앙증맞은 잠옷에는 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카렌이 아이를 도로 침대에 앉히는 공작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육아에 소질이 있으신 걸지도 몰라.’
루티어드는 아이가 끌어안고 눈물을 찍어 내느라 축축해진 새끼 눈표범의 털까지 능숙하게 싹 씻어 냈다. 눈표범이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졸지에 쫄딱 젖은 새끼는 몸을 푸드덕 털어 내곤 안락의자 위로 뛰어올라 갔다.
‘하기야, 우리 각하께선 돌보는 걸 잘하셨지.’
인간을 돌보신 적은 없지만…….
루티어드는 안락의자를 끌어와 아이를 마주 보고 앉았다. 놀랍게도 이어지는 그의 음성은 평소보다 조금 더 다정했다.
“그래서, 왜 울었어. 나쁜 꿈 꿨어?”
“아니요…… 꿈은 아닌데…….”
카티샤가 연신 딸꾹거리며 울먹였다.
“죽은 사람…….”
“죽은 사람?”
“네에…… 히끅.”
“죽은 사람 누구. 어디서 누가 어떻게 죽었는데?”
“그건 모르겠어요……. 근데 죽었대요…….”
“그러니까 누가?”
카티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결국 루티어드는 질문을 계속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찔리는 게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수련소에 처박았던 것들 중에 죽은 건 없었는데.’
카티샤의 납치 미수범도 숨이 잘 붙어 있었다. 애초에 아이가 그 지하까지 내려갔을 리도 없고.
그럼 뭘 본 거지?
루티어드가 고민에 빠진 사이, 카렌이 옆에서 열심히 카티샤를 달래었다.
“그런 건 꿈이에요, 꿈, 아기씨. 꿈꾼 줄도 모르고 꿈을 꾸신 거예요. 그러지 말고 공작님과 산책이라도 좀 하시는 게 어떠세요?”
듣자 하니 어이가 없다. 루티어드는 시녀를 지그시 쏘아보았다.
“내가 왜 산책을 해?”
“하지만 아기씨가 우시는걸요…….”
“그럼 너희가 데리고 나가든가.”
“세상에…….”
문에 매달려 이쪽을 지켜보던 이들이 저마다 입을 가리고 탄식했다. 냉혈한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들이 다 들렸다.
제미언과 카렌을 필두로 한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감히 주인을 세상 제일가는 파렴치한을 보듯 하고 있었다. 루티어드는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다고 내가 산책할 것 같아? 어림없으니까 관심 끄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 당장!”
* * *
5분 후, 루티어드는 아이를 안은 채 정원을 걷고 있었다.
몹시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그는 연신 눈을 부비는 카티샤를 안고 정원으로 나왔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왜긴. 카티샤가 산책이라는 말에 조금 눈을 빛냈다가, 어림도 없다는 그의 일갈에 도로 시무룩해지는 걸 정면에서 봐 버렸기 때문이다.
아이가 경매장에서 데려온 작은 눈표범 한 마리가 꼬리를 바짝 세운 채 그들을 뒤따랐다.
어디서 꼭 저 같은 것을 주워 왔는지, 태어난 지 겨우 다섯 달은 되었을까 싶은 어린 짐승은 깜찍할 정도로 맹랑하기 그지없었다. 공작이 제 주인을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줄 알고선 바짓단을 덥석 물어 버린 것이다.
카티샤가 코맹맹이 소리로 눈표범을 저지했다.
“물지 마, 아키. 공작님은 나 안 잡아먹어…….”
그러나 눈표범은 외려 그 말에 더 성질이 났는지, 아예 바짓단을 한가득 입에 물고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나 참, 동물 버전 카티샤를 보는 것 같아 기가 찰 따름이다.
카티샤는 여전히 의기소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침마다 서재 문을 제 방문마냥 벌컥 열어젖히며 달려들던 꼬마가 물에 젖은 솜뭉치마냥 축 늘어져 있으니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다.
‘어린애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뭘 보여 줘야 풀리나.’
항상 발랄하고 제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강단이 있다 싶었는데, 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그림 같은 걸 보여 주면 좋아하려나?’
4층에 블라스코가 수집하는 아트 갤러리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그 역시 선대가 카티샤의 이름으로 넘겨준 수집품들이니 아이도 좋아하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루티어드는 곧장 정원을 벗어나 4층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조차 아주 오랜만에 걸음 하는 공간이었다. 그는 갤러리의 잠금 장치를 해제하고 카티샤를 가볍게 추어올렸다.
“자, 네 거 여기 있다. 봐.”
쿨쩍거리던 카티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양옆을 빼곡히 메운 명화들을 본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제 거예요?”
“그래. 네 할아버지가 네 이름으로 돌려놓은 예술품 컬렉션의 일부다.”
“와아…….”
카티샤가 당장 눈물을 그쳤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눈물이 방울방울 고여 있던 연두색 눈이 반짝거리며 좌우 벽에 걸린 명화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게 다 얼마짜리야! 조그만 머리통에서 금화 짤랑거리는 소리가 다 들릴 지경이다.
“가까이 가서 봐도 돼요?”
“그래라.”
그가 아이를 바닥에 내려 주자, 카티샤는 꽁무니에 부스터라도 달린 것처럼 슝 하고 갤러리를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멀어진 아이가 연신 감탄사를 외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이를 놓칠세라 새끼 눈표범이 열심히 그 뒤를 쫓았다.
‘저걸 알기 쉬워서 좋다고 해야 할지.’
가만 보면 카티샤는 은근히 욕심이 많았다. 어린애치고 탐욕스럽게 눈을 빛내면서도 정작 가져가는 건 고작 잔돈푼에 그친다는 게 아이러니했으나, 일단 돈과 재물을 밝힌다는 건 확실했다.
‘누가 용돈 준다고 하면 좋다고 따라나설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제 모습을 보며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벽에 달라붙을 기세로 그림들을 구경하던 카티샤가 갑자기 우뚝 멈추었다.
“……?”
카티샤가 황소처럼 그에게로 두두두 달려왔다. 그러고는 서슴없이 그의 손을 붙잡고 흔드는데, 루티어드는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왜, 왜? 뭐 해 달라고?”
“저기, 오른쪽에 있는 그림, 더 자세히 보고 싶어요!”
“……어떤 거?”
“위에서 두 번째 걸린 초상화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