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48)
48화
흘끗 보니 아이의 눈높이로는 잘 닿지 않을 높이였다.
‘안아 달라 이건가?’
카티샤가 당당하게 양팔을 활짝 펼쳤다.
루티어드는 낮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눈에는 그가 저를 안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나 의심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말갛고 무구하기만 하다.
아주 오래전에, 저 비슷한 눈빛을 보내오던 이가 있었다.
모래 먼지가 흩날리는 뜨거운 사막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그는 아이의 주황빛 머리카락이 그날 그들을 둘러싸던 노을 지는 모래 언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발목을 간질이는 반짝이는 모래 알갱이들과 너른 사막 위로 길게 나부끼던 밝은 밀빛 머리칼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졌다.
후덥지근하던 열사의 공기. 정수리를 따갑게 내리쪼이던 태양 볕.
다 잊은 줄 알았던 심장 어귀의 둔통이 아스라이 되살아날 즈음이었다. 카티샤의 발랄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공작님?”
그가 움직이지 않고 서서 가만히 아이를 내려다보고만 있자, 카티샤가 고개를 갸웃하며 펼친 팔을 흔들었다.
당장 나를 높이 들어 올려 주지 않고 뭐 하냐는 듯 쳐다보는 표정이 당당하기까지 했다.
역시 닮은 구석이 있다.
‘……내칠까.’
형제와 연인이 죽고, 아버지가 그를 버리고 떠난 날 이후로 루티어드는 더 이상 사람을 믿고 싶지 않았다. 버팀목들이 사라진 이후로도 그가 지켜야 할 것들은 차고 넘쳤고, 그 이상으로 늘리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저 아이를 키워 보고 싶다는 마음 역시 진심이기는 했다.
눈길을 주고 흥미를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아이였다.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대사라는 것은 알지만, 그를 겁내고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는 카티샤가 처음이었으므로.
하다못해 베르너와 아르닌마저도 그를 서먹해하지 않았던가?
길어지는 침묵에 주춤한 카티샤가 활짝 벌렸던 팔을 슬그머니 내렸다. 금세 시무룩해지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까지 하던 생각과는 정반대로 손부터 나갔다.
루티어드는 열 살치고는 아무래도 지나치게 가벼운 아이를 어렵지 않게 안아 올렸다.
“됐냐?”
“헤헤…… 네에.”
카티샤가 좋아라 웃으며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복도 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거 볼래요. 저기 세기의 명화가 있는 것 같아요.”
“여기 걸린 모든 그림이 다 세기의 명화다만.”
“아니에요. 저 초상화가 제일 아름답고 멋져요!”
카티샤가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그를 재촉했다. 이 갤러리를 돌아보는 것조차 몇 년 만이라, 아이가 가리키는 쪽에 뭐가 걸려 있는지 금세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작지 않은 보폭으로 한 발 한 발 그림에 가까워질수록, 루티어드는 아이가 무얼 보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걸음이 거대한 초상화 앞에서 멈추었다.
‘……이게 여기 걸려 있었나.’
커다란 캔버스 위에 꼭 실물처럼 섬세한 사내가 그려져 있었다.
흑단처럼 새카만 머리칼이 자유로이 흐트러져 있었다. 몸에 걸친 정복 역시도 브로치가 미묘하게 비뚤어지고 칼라가 방만하게 풀어 헤쳐져 있는 등 단정치 못했다.
“헤헤, 잘생겼다.”
카티샤가 헤실헤실 웃으며 괴상한 소리를 했다.
“나이를 안 먹어야 진정한 미남인 걸까요?”
“무슨 소리야?”
“지금이랑 똑같잖아요, 공작님. 솔직히 이건 반칙이야!”
“……뭐가 뭐랑 똑같은데?”
으잉? 아이가 외려 의아한 소리를 내며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고는 곧 초상화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가리키며 조잘조잘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매도 지금이랑 똑같고요, 푸르스름한 안광도 똑같고요. 입꼬리가 올라간 모양도 지금이랑 각도가 같아요.”
“…….”
“솔직히 지금이랑 진짜 큰 차이 없어 보이는데, 혹시 금지 약물 같은 거 드시고 계신 거 아니죠? 연금술사들 중에 그런 비기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대요…….”
루티어드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초상화 속에서 강렬한 눈빛으로 갤러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는 그가 맞았다. 공작이라는 작위를 넘겨받기 전, 한창 대륙의 실력자들을 무릎 꿇리는 재미로 살아가던 치기 어린 시절의 그였다.
루티어드는 한차례 호흡을 골랐다.
“그러니까…… 네 눈에는 저게 나로 보인다 이거지.”
“……?”
카티샤가 몹시 이상한 말을 들은 것처럼 코끝을 한껏 찡그렸다.
그의 의중을 짐작해 보려는 듯 아이의 미간은 한참이나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숨을 멈추었던 루티어드는 이윽고 나직한 실소를 흘렸다. 허탈함과 감탄이 뒤섞인 미묘한 웃음이었다.
“아냐. 나 맞아.”
가벼이 인정하는 음성에 후련한 기색이 섞였다. 그는 구깃해진 카티샤의 미간을 검지로 문질렀다.
아이가 그제야 안심한 듯 활짝 웃었다.
“그렇죠? 잘못 봤을 리가 없어요. 세상에 저런 사람이 둘은 없을 거잖아요!”
“왜, 있을 수도 있지.”
“그러면 세상이 진짜 불공평한 거예요.”
단호하게 선언한 카티샤가 다시 헤실거리며 초상화를 감상했다.
“저거 공작님 몇 살 때예요?”
“글쎄…….”
루티어드는 아이가 초상화 밑에 달린 푯말을 보지 못하도록 몸을 돌렸다.
“스물일곱…… 그쯤이었던가.”
11년 전이다. 블라스코에 끝을 알 수 없는 비극이 닥치기 직전, 형제의 고집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그리게 된 초상화 한 점이 이곳에 걸려 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카티샤가 히익 소리를 내며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아무리 봐도 말도 안 돼. 그럼 공작님도 30년만 더 지나면 할아버지처럼 쪼글쪼글해지는 거예요?”
“지금도 저 때에 비하면 늙었어.”
“어디가……?”
루티어드는 아이의 말에 대충 대꾸해 주며 갤러리를 되짚어 걸어 나갔다.
더 구경하고 싶은지 카티샤가 아쉬운 기색을 폴폴 풍기며 뭐라 꿍얼거렸지만, 이만하면 충분했다.
이제 울음도 그쳤겠다,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눈치가 빠르고 영민한 아이라 지나치게 많은 것을 눈치채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맞았다.
“여기 있는 건 아르템 본가의 블라스코 역사 전시관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거기가 훨씬 더 재미있을 테니 돌아가면 구경해.”
“그것들도 다 제 거예요?”
“그래, 네 거다.”
“와아!”
이렇게 재화를 밝히니 심히 걱정이 들면서도, 헤실헤실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뭐 어떠랴 싶었다.
어차피 카티샤에게 블라스코의 재산 3분의 2를 떼어 준대도 남은 3분의 1로 오르겐 후작가 정도는 가볍게 제칠 텐데.
‘검투장에서 긁고 왔다던 2000골드도 다시 환수해 와야겠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공작은 카티샤에게서 약속을 받아 냈다.
“갤러리에서 본 것들은 다른 이들에게는 함구해라, 오렌지. 국보급 보물들도 많이 섞여 있으니까.”
“헉.”
“수천 골드씩이나 하는 명화들을 수도에 버젓이 보관하고 있다고 하면 도둑이 들 수도 있겠지. 그러니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겠지?”
“허억. 네엡.”
아이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카티샤가 입을 꿰매는 시늉을 하며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티샤와 새끼 눈표범을 다시 정원에 풀어놓은 뒤, 공작은 홀로 갤러리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좀 전의 그 초상화 앞에 섰다.
“……세기의 명화라.”
초상화들의 가치는 대개 모델의 사후에 인정받곤 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 걸린 그림들 중 가장 아름답다던 말이 떠올라 그는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성냥에 불을 붙였다.
치익, 손톱만 한 불씨가 튀었다. 공작은 미련 없이 불붙은 성냥을 캔버스로 던졌다.
캔버스의 아랫부분이 불길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공작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작은 불씨가 커다란 초상화를 전부 불사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일렁거리는 불길 속에서 11년 전의 자신이 무어라 외치는 듯하다.
“후회하지 않겠어? 정말로?”
공작, 루티어드의 입꼬리가 비죽이 올라갔다.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 단호히 못 박았다.
“그딴 걸 할 시기는 진작 지났어, 루테.”
공작은 초상화로부터 등을 돌렸다. 훅 솟구친 차가운 오러가 초상화를 활활 태우는 불꽃을 뒤덮어 열기를 꺼뜨렸다.
화려한 액자 밑으로 검은 잿더미가 수북이 쌓였다.
* * *
공작과 함께 블라스코 갤러리를 구경하고 온 뒤로, 내 기분은 아주 약간 나아졌다. 그래 봤자 아주 약간이지만.
거울 속에 통조림 속 복숭아처럼 팅팅 부은 못생긴 애가 한 명 들어앉아 있었다. 옆에 붙어 앉아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던 아이칼이 심각하게 한마디 했다.
“카티샤 눈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잠깐 부은 거야.”
“앞은 보이는 거지?”
이게 진짜. 나는 대답 대신 아이칼의 뺨을 손바닥으로 쭉 밀어 옆에서 치워 버렸다. 그리고 꺼질 듯 한숨을 쉬며 카렌이 챙겨 준 얼 주머니를 눈두덩이에 올려놓았다.
빤히 나를 쳐다보던 아이칼이 열댓 번째 질문을 또 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누군데?”
“…….”
“새벽부터 계속 똑같은 소리만 하고 있다.”
누군가 죽었다며 곡을 했더니, 보는 사람마다 내게 똑같은 것을 물었다. 그러나 나는 차마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누가 죽었냐고? 내가 죽었다. 내가 바로 그 죽은 사람이었다. 더 정확히는 [지금 우리, 마법처럼> 속 카티샤 아인슬리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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