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50)
50화
* * *
내 납치 사건이 일단락되고 난 이후, 블라스코의 직계들은 곧바로 다시 아르템으로 돌아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수도 펠라임이 황실의 영향권 아래 있다 보니 이곳에 굳이 더 머무를 필요를 느끼지 못한 듯했다. 심지어 내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 있기까지 하니, 볼일이 끝난 이상 빠르게 아르템으로 귀환하는 쪽이 좋았다.
‘그래도 수도에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나는 조금 아쉬운 눈으로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마법 도시의 모습을 구경했다. 마차는 환상의 승차감을 자랑하며 펠라임을 서서히 등졌다.
아쉬운 마음이 얼굴에 표가 난 모양이었다. 내 옆에 앉아 일상적인 침묵에 동조하던 아르닌이 슬쩍 속삭였다.
“시험 다 끝나고 나면, 다음에 또 놀러 오자. 내가 같이 와 줄게.”
“……빈말 아니죠, 언니?”
“속고만 살았니? 약속.”
아르닌이 새끼손가락을 흔들었다. 나는 냉큼 손을 걸었다. 맞은편에서 이쪽을 흘끗 일별하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더니, 공작이 어딘지 미묘한 묘정으로 나와 아르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전부터 블라스코에 감도는 침묵이 심상찮다.
“베르너 오빠는 어디 있어요?”
“오빠는 무슨.”
아르닌이 깜짝 놀랄 만큼 크게 팽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밴댕이 소갈딱지는 신경 쓰지 마. 말을 타고 오든, 걸어오든 알아서 하겠지.”
음, 또 싸웠구나. 나는 슬쩍 아르닌의 어깨며 팔, 허리춤을 주욱 훑었다. 부자연스러운 부위가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니 이번에도 칼부림을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나중에 베르너에게도 슬쩍 다가가서 영문을 살펴봐야겠다.
‘그나마 시벨이 사라지니 훨씬 쾌적하다.’
내가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시벨 블라스코는 이미 수련소라는 곳으로 보내진 뒤였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한 것을 보니 공작에게 제대로 찍힌 모양이다.
아마 지금쯤 몸과 마음이 꽤 힘든 지경일 것이라며 카렌이 아주 후련하게 웃었었다.
다만 문제라면 마가렛도 아직 그 ‘수련소’라는 곳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인데……. 설마 마가렛도 몸과 마음이 우울한 상태는 아니겠지?
‘아르템으로 곧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금방 다시 오겠지.’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사이, 마차는 수도의 성벽을 통과했다. 나는 탑루에서 펄럭거리는 아스트로카의 국기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 펠라임. 언제 다시 이곳에 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더 안전한 곳이 되어 있기를.
아이칼이 무릎 위에서 기분 좋게 갸릉거렸다.
마차가 인근의 이동국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갔다.
* * *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따끈한 햇살과 포근한 공기. 아르템의 초여름은 언제나처럼 맑고 화창했다.
창틀에 복슬복슬한 두 앞발을 착 올려놓은 새끼 눈표범은 정신없이 창밖에 펼쳐진 풍경을 내다보았다.
잘 가꾼 파릇한 정원과 장엄하게 펼쳐진 대저택의 외벽, 동쪽의 거대한 연무장. 저 멀리 손가락 만하게 보이는 회색빛 탑과 그 너머에 펼쳐진 후끈한 초원까지. 사방이 다 처음 보는 것투성이였다. 놀라우리만큼 새로운 세계다.
아이칼은 조금 낯선 기분이 들어 두 앞발로 턱을 마구 긁었다.
그는 세상에 교단보다 더 큰 곳이 있을 거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백의 교단이 세워진 곳은 대륙의 최북단에 있는 이렐 반도로, 앞으로는 눈과 얼음으로 영원토록 뒤덮여 있다 하여 영원의 설원이라 이름 붙은 땅이, 뒤로는 온갖 마물이 들끓는 얼음장 같은 북해가 펼쳐진 곳이었다.
인세와는 멀리 떨어진 고요한 백색의 성에서 눈을 뜬 것이 아이칼이 가진 첫 기억이다.
“신수 이클라스의 하프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검 힐라이야를 계승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사료됩니다.”
교단은 몹시도 삭막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검은색과 흰색, 회색을 제외한 그 어떤 색채도 없고,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이 오거나, 눈이 오지 않거나, 북해의 마물이 절벽을 타고 기어오르거나, 기어오르지 않거나. 그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인 적요한 공간. 그곳이 아이칼이 51년간 살아온 곳이다.
그러나 새로이 발을 들이게 된 이곳 아르템은 교단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비단 둘러싼 풍경뿐만이 아니다. 한 마리의 마물도 없는 평화로운 땅, 푹신한 침대, 매일 바뀌는 식사 메뉴, 그리고…….
“뭐 해, 아키? 책 다 읽었어?”
생애 첫 친구.
카티샤가 왼편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밝은 주황색 머리카락이 새끼 눈표범의 몸통을 살살 간지럽혔다.
“오늘까지 다 읽어야 한다고 했잖아, [어린이 상식 대백과사전>.”
아이칼은 새침하게 꼬리를 가로로저었다.
응, 싫어.
그 뜻을 알아들은 카티샤가 눈을 치켜떴다.
“세상에 대해 좀 배워야지, 이 인간, 아니, 인간이 아니구나. 이 짐승아!”
아이칼의 몸이 창틀에서 뚝 떨어졌다.
힘겹게 그를 안아 든 카티샤가 침실 한구석에 마련한 아이칼의 공부 탁자로 그를 데려갔다. 그러곤 카랑카랑하게 엄포를 놓았다.
“널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처럼 살게 할 순 없어. 기본적인 상식부터 공부해!”
기세가 대단했다. 아이칼은 별수 없이 흐느적흐느적 백과사전 앞에 자리를 잡았다. 카티샤가 시키는 공부라는 것은 참 하기 싫은 것이었다.
‘그래도 훈련보다는 나으니까…….’
사실 아르템의 모든 것이 교단과는 비할 바 없이 좋았다.
아이칼은 교단을 완전히 나오고 나서야 자신이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은 그곳을 무척이나 혐오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아이칼이 처음으로 탈출 계획을 세운 것은 10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무상하게 흘러가던 반복되는 나날들 중 그 하루만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정해진 시간에 눈을 떴을 때, 거짓말처럼 강렬한 욕구가 들끓었다. 당장 이 백색의 성밖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욕구가.
그래서 박차고 나왔다. 무턱대고 성벽에서 뛰어내렸던 첫 가출은 뭣도 모르고 힐라이야를 꺼내 드는 바람에 세 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나가고 싶은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저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강력한 이끌림 때문이다. 밤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 귓가에 대고 속살거렸다.
‘깨어나자마자 그 답답한 곳을 나가.’
‘어긋난 것을 바로잡아, 아이칼.’
그 뒤로 아이칼은 매년 한두 번씩 습관적으로 가출을 감행했다.
짧으면 하루 이틀, 길면 한 달까지도 도망쳐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죽음마저도 각오한 필사의 탈출이 아니었기 때문에 늘 끝은 똑같았다.
다시 교단으로 끌려와, 먼젓번 것보다 더 강화된 구속구를 목과 팔목, 발목에 차고, 더욱 힘든 훈련을 받고 더 자주 북해로 내몰린다.
얌전히 교단주로부터 내려오는 임무만 수행하며 기회를 보다가, 또 탈출하고, 또 잡혀 들어오고.
큰 의미 없이 그 짓을 수십 번 반복하는 동안 10년이 흘렀다.
그리고 바로 몇 주 전, 아이칼은 드디어 북해를 헤엄쳐 대륙 동부 해안까지 다다르는 데 성공했다.
동부에서 우연히 노예 상인에게 포획되는 바람에 오히려 교단병들의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다. 몇 번인가의 거래를 거쳐, 그는 아스트로카라는 제국의 수도 외곽의 검투장으로 팔려 왔다.
지내기에 편하거나 즐거운 곳은 분명 아니었지만, 교단 밖의 세상에 무지한 아이칼로서는 달리 갈 곳도 없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이라 꽤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며칠 가지 못했다.
적을 처리하고, 몸에 난 상처를 스스로 재생하고, 주는 음식을 먹고, 자야 하는 시간에 잔다. 교단과 별 차이가 없었다.
‘딱히 즐겁진 않아…….’
어차피 도착지가 이런 곳이라면, 어째서 교단을 빠져나오고 싶었던 걸까? 밖에도 별게 없는데.
의문도 점차 사그라지고, 차차 타성에 물들어 갈 때 즈음. 아이칼은 맞은편 우리에 잡혀 온 주황 머리 여자아이를 만났다. 그리고 한눈에 알아보았다.
‘특이한 오러.’
조그만 인간 소녀의 오러는 무척이나 특이했다.
자신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완전히 상극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오묘한 파장. 공존할 수 없는 기운들이 뒤섞인 오러가 아이칼을 끌어당겼다.
“많이 아팠겠다. 지금은 괜찮아?”
‘……어긋난 것.’
평범한 인간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순식간에 흥미가 싹텄다.
저 애는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교단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고 따라나설 가치가.
이번에도 직감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성이 아이칼을 움직였다.
‘잘 찾았네.’
밤마다 속살대던 목소리가 웃음기를 띠고 아득히 메아리쳤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