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52)
52화
* * *
활짝 열어 놓은 창문 밖에서 꺄륵거리며 웃는 아이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오던 오후였다. 제미언은 도무지 집중하지 못하고 창가 쪽을 연신 힐끔거렸다.
루티어드는 꽤 칭찬할 만한 인내력으로 창가를 등지고 있었지만, 귀가 그쪽으로 곤두서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자, 이거 물어 와, 아키!”
카티샤가 경매장에서 무려 2000골드나 들여 데려온 새끼 눈표범은 하루 종일 제 주인 곁을 맴맴 돌았다.
얼핏 순한 성격인 듯했지만 주인에게서 떨어뜨려 놓을라치면 눈을 시퍼렇게 뜨고 그르렁거리는 게, 본성까지 얌전하지는 않은 게 분명했다.
창문 너머에서 카티샤가 서럽게 애걸하는 소리가 올라왔다.
“야아, 너무한 거 아니냐아. 나는 너 들고 다니느라 팔에 알통 생겼는데 넌 원반 하나 못 물어다 주냐고!”
카티샤는 표범을 종종 사람 대하듯 했다. 느긋하게 몸을 만 새끼 표범 앞에 쭈그리고 앉아 징징 떼를 쓰는 게 눈에 띌 때면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나랑 놀아 주는 것도 네 임무란 말이야. ……또 무시해. 또!”
언니 알기를 빈 밥그릇처럼 알아! 카티샤가 결국 왁왁 소리치고 나서야 눈표범은 느긋하게 일어나 꼬리를 세로로 휙휙 저으며 원반을 찾아 나섰다.
그러면 카티샤는 또 분에 겨워 어쩔 줄 몰랐다.
“와…… 쟤 꼬리 좀 봐……. 날 놀려 먹고 있어. 기가 막혀…….”
결국 제미언은 이번에도 손수건을 꺼내 훌쩍훌쩍 눈 밑을 닦았다.
“너무 귀엽지 않습니까, 각하……? 요즘 저 조합만 보면 심장이 무너지는 기분입니다. 한번 깨물어 보고 싶어서 도무지 일에 집중이 되질 않…….”
루티어드는 카티샤가 표범이 물어 온 원반을 반대편으로 냅다 던지는 것까지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서야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일어난 채 창밖을 관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조금 머쓱해져서,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저 애가 귀여운 게 하루 이틀이야? 핑계 댈 생각 하지 말고 계산 똑바로 맞춰. 지난번에 187골드 차액 남은 것 어디서 구멍이 난 건지 찾기 전에는 퇴근 같은 거 없다, 젬.”
그러나 그는 말을 맺자마자 곧장 실수를 깨달았다. 아, 제길.
제미언이 그의 만면에 짙게 스쳐 간 낭패감을 읽곤 눈치 없이 낄낄거렸다.
“어휴, 그래도 아기씨가 각하 눈에도 귀여워 보이기는 하나 보지요? 하기야, 아기씨뿐만이 아니기는 하지요!”
어떻게 참고 있나 모른다. 제미언은 루티어드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것을 벌써 다섯 차례나 목격한 참이었다.
하기야, 누구보다 못 참을 사람은 다름 아닌 공작일 것이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공작의 은밀한 취미로 보건대, 카티샤가 눈표범을 안고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을 때마다 스스로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기분일 터였다.
똑같은 성격의 소동물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 눈을 도록도록 굴리고 있으니 아무렴 눈길이 안 갈까? 저 세상 제일가는 동물 애호가가 말이다.
제미언의 음흉한 시선을 느낀 루티어드가 눈을 부릅떴다.
“어허, 어딜 주인을 그런 불손한 눈으로 보지? 월급 삭감당하고 싶나?”
“어휴, 참. 찔리시기는…….”
“방금 그 발언으로 5% 깎였다. 어디 월급 두 동강 나고 싶으면 더 떠들어 봐.”
제미언은 당장 입을 다물었다. 월급쟁이에게는 그보다 더 잔혹한 협박이 따로 없었다.
서재에는 잠시 주판알을 미친 듯 튕기는 소리와 펜촉이 사각거리며 종이를 긁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대충 결산안 한 뭉치를 해치우고 한숨 돌린 뒤, 루티어드는 휴식을 취할 겸 몇 시간 전에 본가로 도착한 서신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십수 개나 되는 서신들 사이에 고급스러운 푸른 공단을 두른 서신이 끼어 있었다.
오오, 그것의 정체를 바로 알아본 제미언이 탄성을 질렀다.
“두 번째 시험 내용이 나왔나 보군요!”
봉투에 블라스코 방계의 무늬 없는 나비 인장이 찍혀 있었다. 봉한 서신을 뜯고 내용을 확인한 루티어드의 미간에 깊은 금이 패었다.
“이번 주로군.”
“생각보다 빠르군요. 시험 과제는 뭡니까?”
카티샤가 치르고 있는 상속 시험은 총 네 가지 과제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중 두 개는 방계 쪽에서, 나머지 두 개는 직계 쪽에서 도맡기로 결정했다.
첫 시험인 아스트로카 중앙은행의 금고 해금과 네 번째 시험인 아카데미 입학시험 수준의 필기 테스트는 직계인 공작 쪽에서 제안한 것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시험은 게스파 숙부님이 수장으로 있는 방계 회의를 거쳐 정해졌다.
서신의 내용을 훑어 내리는 루티어드의 표정이 점차 싸늘하게 식었다.
“아르템의 사바나.”
“예?”
제미언의 낯에서 핏기가 가셨다. 루티어드가 뭐 씹은 표정으로 방계로부터의 서신을 테이블에 내던졌다.
“사바나 생존이다.”
* * *
아르템의 사바나.
대륙 중앙부에 자리 잡은 아스트로카 제국. 그중에서도 동부에 위치한 블라스코의 본가 아르템은 기후가 온난했고, 영지 북쪽은 대부분 삼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니 사바나, 즉 사막과 열대 우림 중간 기후의 드넓은 초원이 형성될 만한 조건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르템 북부에 버젓이 초원 지대가 형성되어 있느냐?
그 이유를 짚어 보려면, 10년 전부터 생겨난 공작의 취미 생활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10년 전. 블라스코에서 일어난 대형 참사가 얼추 수습되고 가문에 얽힌 수많은 가업들이 다시 재정비된 이후로, 블라스코 공작에게는 특이하다면 특이한 수집벽이 하나 생겼다.
바로 사납고 길들지 않은 멸종 위기의 환상종들을 하나둘씩 아르템으로 들여오기 시작한 것이다.
공작이 환상종이라면 닥치지 않고 수집해 사바나에 풀어 두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제국 전역으로 퍼졌다. 그 소문은 블라스코의 악명을 드높이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블라스코의 심기를 거스르는 자들은 지하 감옥 대신 공작의 사바나에 던져진다더라.
인공적으로 형성된 그 초원에는 전 세계 각국의 진귀한 야생 동물들이 우글거리고 있는데, 짐승뿐만이 아니라 신수와 마물, 심지어는 언데드까지 잡아다 넣어 놓았다더라…….
공작은 구태여 그 소문의 진위를 바로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기실 전부 틀린 말들은 아니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그 사바나에 그가 아닌 다른 인간을 들여놓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베르너와 아르닌조차도. 사바나는 오롯한 공작만의 공간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두 번째 시험 장소로 제격이지요.”
첸 블라스코가 거드름을 피우며 검지를 치켜세웠다. 그는 수련소에서 아직도 나오지 못하고 있는 아들 시벨 대신 감독관의 자격으로 본가를 방문했다.
“블라스코의 직계가 함양해야 할 역량들을 한꺼번에 시험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장소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본적인 체력과 근력은 물론이요, 지략과 위기 대처 능력까지 한 번에 측정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유들유들하게 웃는 첸과는 대조적으로, 공작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카티샤가 열 살이라는 건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형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베르너와 아르닌이 열 살이었을 때 그 사바나에 떨어졌다면 어땠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이 정도의 시련은 코 후비는 것보다 더 쉽게 돌파하지 않으셨을까요?”
첸 블라스코가 손가락으로 나를 척 가리켰다.
“저 아이가 정말로 직계의 자격이 있다면, 사바나를 통과하는 건 사흘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저 아저씨가, 왜 삿대질이야?
아침나절부터 불려와 저 탐욕이 득실득실 흐르는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속이 안 좋은데.
나는 조금 발끈했지만 참았다.
공작이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말장난은 이만하시지요. 카티샤를 베르너와 아르닌에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그렇기는 하지요. 저런 아이를 찾으라면 길가에 널린 돌멩이만큼이나 많을……”
“아이에 따라 특출한 영역이 다른 법인데, 고작 육체적인 능력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편협한 가치관은 버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날 아무것도 못 하는 무능력한 꼬마로 취급하지 않는 공작에게 고마움이 샘솟았다. 하지만 혹시라도 공작이 강경하게 나와서 첸 블라스코가 물러나면 곤란하다.
나는 이 시험을 꼭 봐야만 했다.
공작이 무어라 더 말을 얹기 전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볼게요, 그 시험!”
공작의 미간에 팬 골이 깊어졌다.
반면 첸 블라스코는 비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이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이대로 진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가주님, 빠른 시일 내로 시험 규칙을 제정하도록 하지요.”
“네, 좋아요!”
나는 공작이 훼방을 놓을까 봐 냅다 끼어들었다.
“와아, 사바나라니. 정말 기대돼요.”
“그래. 맘껏 기대하고 있으려무나. 네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제대로 준비해 둘 테니.”
“정말요? 감사합니다!”
첸 블라스코의 눈가에 맺힌 탐욕이 더욱 짙어졌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며 허리를 숙였다.
“아주 재미있을 거야, 꼬마야. 내 아들이 아직도 갇혀 있는 그 망할 수련소보다 더.”
그 속삭임은 오직 나만 들을 수 있었다.
“돈 좀 만졌다고 기고만장해지지 마라. 하기야, 초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 네 주제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겠지.”
“…….”
“어디서 비루먹던 걸 데려와서는, 쯧.”
나는 입가에 냉소가 스칠 뻔한 것을 가까스로 숨겼다.
‘이 아저씬 내가 자기 아들을 고발이라도 해서 수련소에 넣었다고 생각하나 봐.’
굳이 정정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기쁘게 눈을 휘었다.
“조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저씨! 저 열심히 할게요.”
첸이 픽 코웃음 치며 내 머리를 성의 없이 헝클어뜨렸다.
나는 일부러 더 천진난만하게 방실거렸다.
‘어린애가 뭣도 모르고 마냥 신난 것 같지?’
머릿속에선 이미 원작의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다.
어디 덤벼 보라지. 정말 블라스코에서 치워지는 게 어느 쪽이 될지 직접 알려 줄 테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