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53)
53화
* * *
나는 아이칼을 안고 방으로 돌아왔다. 요즘 아이칼의 고정 좌석이 된 뚱뚱한 방석 위에 그를 내려 준 뒤, 손을 탁탁 털었다.
“자, 그러면. 나는 나대로 대비를 해 볼까.”
“무슨 대비?”
“사바나에 들어갈 준비지 뭐겠어.”
아이칼은 방석에 앉기가 무섭게 인간화했다. 소년이 의아한 듯 고개를 슥 기울였다.
“너는 준비할 게 없어. 나만 데려가면 돼.”
“그거야 그렇지만.”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사바나에서 벌어질 일들은 아이칼에게만 일임하기엔 복잡할 거란 말이지.
그러나 아이칼은 내 반응을 달리 해석한 듯했다. 그가 다소 날카롭게 물어 왔다.
“날 못 믿어?”
“뭐? 아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보였나 싶어 얼른 아이칼에게 활짝 웃어 주었다.
“당연히 믿지! 세상에서 제일.”
“…….”
“내가 널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 난 너뿐이야.”
돈으로 얽히긴 했지만 어쨌건 우리는 친구다.
‘죽는 날까지 배신하지 않기로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는데, 그럼.’
심지어 2000골드짜리 호위 기사는 오로지 아이칼 하나뿐이다.
소년이 의심스럽게 되물었다.
“정말 나뿐이야?”
“그럼!”
자신 있게 단언하자, 잠시 멈춰 있던 아이칼이 곧 화사하게 눈매를 접었다. 어느새 댓 발 나왔던 입이 도로 쏙 들어간 뒤였다.
아이칼이 가까이 다가와 내 어깨에 뺨을 비볐다.
“나도 너를 믿어, 카티.”
“으응, 그래.”
요즈음 인간 세상의 상식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한 아이칼은 부쩍 애교가 늘었다.
나는 새끼 눈표범에게 하듯 그의 턱밑을 살살 간지럽혔다.
“그럼 잠시 있어, 아이칼. 주인님 금방 다녀올게.”
“언제 오는데?”
“뭐어, 눈 깜빡하는 사이?”
난 로켓 속의 아공간으로 들어갈 셈이었다.
굳이 언급할 필요 없이 몰래 들어가면 될 일이긴 했다. 어차피 이 시간 선과는 동떨어진 공간이니, 아이칼에겐 내가 1초 정도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감각이 인간보다 월등하게 발달한 아이칼은 귀신같이 내가 아공간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공기가 불안하게 진동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가 내 원피스 자락을 턱 움켜잡았다.
“같이 가.”
“1초면 돌아오는 걸, 뭐.”
“난 네가 내 옆에서 1초라도 사라지는 게 싫어.”
아이칼의 목소리가 낮았다.
나는 입술을 앙다문 소년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고, 요 귀여운 것!’
나는 양 손바닥으로 그의 말랑한 양 뺨을 챱 짓눌렀다.
“그랬어, 우리 아키! 누나가 1초라도 사라지면 불안해?”
“……응.”
“으응, 그래도 안 돼. 의젓한 신수는 혼자 있을 줄도 알아야지.”
나는 아이칼의 머리를 마구 흩트려 준 다음, 그가 방심한 틈을 타 재빠르게 로켓을 열었다.
미안, 아키. 하지만 정말 금방일 거야. 어차피 이곳의 시간은 1초도 흐르지 않는걸.
‘게다가 거기 원작이 버젓이 있는데, 그 주인공인 너를 어떻게 데려가겠어?’
언제나처럼 붉은 빛이 시야에 마구 이지러졌다. 애교 부리던 모습은 간데없고 팍 인상을 찌푸린 아이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 * *
오랜만에 들어와 보는 로켓 안은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지.우.마>의 회차를 확인했다.
‘아직도 169 화.’
새로운 회차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아직 새로운 화가 해금되는 규칙은 찾지 못했지만, 최근 나는 유력한 가설을 하나 세웠다. 168 화는 내가 블라스코에 입성해 마검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걸 안 후에 열렸고, 169 화는 아이칼을 데려온 후에 열렸다.
두 가지 경우를 조합했을 때, 이런 가설이 탄생한다.
내가 ‘원래 니엘라의 것이었어야 할 것들’을 가져오는 순간 다음 회차가 열리는 게 아닐까? 원래라면 블라스코에 마검의 후계자로 들어오는 것도, 아이칼을 포섭하는 것도 모두 니엘라의 몫이었으니까.
‘단정 짓기엔 아직 표본이 부족하지만.’
이 가설이 맞는다면, 아마 원작의 다음 화가 열리는 건 내가 무사히 블라스코에 입양된 이후일 것이다. 정식으로 입적되는 것 역시도 원작에선 니엘라의 몫이니 말이다.
뭐, 지금은 원작의 새로운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니 괜찮다.
나는 쿠션을 괴어 놓은 의자에 냉큼 올라가, 반투명한 스크린을 톡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예]를 눌러 [지금 우리, 마법처럼>의 전체 회차를 화면에 띄웠다. 1 화부터 169 화까지의 모든 화가 주르륵 나열되었다.“어디 보자, 사바나 에피소드가 나왔던 게 몇 화 즈음이었더라……?”
여기 어디 적어 뒀는데.
나는 처음 [지.우.마>를 정독하던 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뒀던 원작 노트를 뒤적거렸다.
[지금 우리, 마법처럼>의 초반 회차, 그것도 무려 90 화까지는 니엘라가 블라스코에서 겪은 온갖 수모를 세세하게 묘사해 두었다. 목차마다 내용을 요약해 둔 덕분에 금방 원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찾았다. 니엘라의 입적 시험 에피소드.”
사바나 탈출기. 그것은 바로 니엘라가 블라스코에 입양될 당시 치렀던 입적 시험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는 원작의 잡다한 설정들만 찔끔찔끔 이용해 왔지만, 이번 시험은 다르다. 무려 원작과 겹치는 에피소드인 것이다.
물론 니엘라가 이 시험을 치렀을 땐 열일곱 살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원래도 블라스코의 문하생이었던 만큼 기본적인 검술 실력도 지니고 있었다.
과연, 다시 되짚어 본 원작에서 니엘라는 아슬아슬하게 사바나의 괴수들과 싸우며 시험을 통과해 나갔다.
‘사실 나도 시험을 통과하는 것 자체엔 무리가 없어. 아이칼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관건은 무엇이냐?
사바나에서 나를 반드시 죽이려 들 잠세력들이다.
나는 손끝을 모으고 스크린에 떠오른 활자들을 진지하게 읽었다.
‘아직 내가 니엘라의 운명을 밟아 나간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녀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건 확실해.’
수도에서 납치당했을 때 똑똑히 느꼈다. 나는 니엘라와 엇비슷한 노선을 타고 있었다.
블라스코의 시험을 치르고 있다는 점.
내가 블라스코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 세력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는 처지라는 것.
그렇다면 이번 사바나에서도 분명 습격이 있을 것이다. 니엘라에게 그랬듯이 말이야.
‘내가 시험을 끝까지 치르지 못하도록, 초원에 미리 손을 써 뒀을 게 틀림없어.’
그러니 이쪽도 아이칼만 믿고 있을 게 아니라, 영리하게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이왕이면 방어에서 끝나지 않고 역공까지 가능할 만한 비책을.
니엘라는 그 모든 트랩들을 몸빵으로 막았지만, 어리고 힘없는 나는 머리로 때운다.
‘원작 찬스를 이럴 때 써먹어야지 언제 써먹겠어?’
굴러가라, 머리!
나는 투지를 불태우며 n번째 정주행을 시작했다.
* * *
그날 저녁, 공작의 서재에는 또다시 직계 셋이 머리를 맞대고 모였다. 방에서 홀랑 잡아 온 카티샤와 새끼 눈표범을 뚱뚱한 방석 위에 앉혀 놓고서.
“미친 거 아니야, 당백부님!”
시험의 내용을 전해 들은 아르닌이 왈칵 성질을 부렸다.
“저렇게 손바닥만 한 애를 그런 야생 초원에 던져 놓으라고? 그것도 물도 식량도 없이? 칼 하나만 덜렁 쥐여서? 작은 할아버님은 그걸 승인하셨고? 그렇게 안 봤는데, 그분도 정말……!”
“이건 말도 안 되는 난이도입니다.”
베르너가 진지하게 말을 얹었다.
“10년쯤 전에 스쾨티모르 한 마리를 대형 수조에 담아 들여오셨지 않습니까? 5년 전에는 크루어드 두 마리를 들여 놓으셨고요.”
“그랬지.”
“지금은 개체 수가 한도 없이 늘어났을 거고요.”
“그렇지.”
공작의 미간은 한참 전부터 꼭꼭 뭉쳤다가 편 신문 조각처럼 구겨져 있었다.
크루어드는 녹조가 가득한 늪에 서식하는 검은 식인 악어다. 그리고 스쾨티모르는 바닥에 진흙이 깔린 호수나 바다에서 서식하는 초대형 수중 생물로, 다섯 개의 꼬리가 달린 거대한 가오리 모습의 환상종이었다.
그것들뿐인가?
크라켄의 일종인 대왕 문어 어구스트, 인간과 닮은 얼굴을 지닌 괴조, 금강석보다 단단한 뿔이 세 개나 달린 들소 칸타타…….
‘최근에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완전히 야생일 텐데.’
공작이 입속으로 나직한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이가 듣고 있는 자리라 육성으로 튀어 나가지는 않았다.
이만저만 골이 아픈 게 아니었다. 방계는 정말 저 작디작은 어린아이를 아예 죽으라고 등 떠미는 건가?
“그리고 뭐? 나랑 베르너라면 손쉽게 통과했을 거라고? 나 참, 얘를 우리와 비교하면 안 되죠!”
아르닌이 카티샤의 팔뚝을 덥석 잡았다. 그러곤 공작의 면전에 대고 아이의 짜리몽땅한 팔을 마구 흔들었다.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찰흙처럼 말랑말랑한 팔을 좀 보세요, 아버지! 얘를 야생에 던져 놨다간 하룻밤도 못 버티고 잡아먹힐걸요? 봐요, 야들야들하니 얼마나 맛있게 생겼어요!”
“어, 언니…….”
“심지어 나 좀 잡아먹으라고 머리털까지 주황색이네!”
아르닌에게 반쯤 들린 카티샤가 그녀가 흔드는 대로 달랑거렸다. 그게 재미있는지 아이가 꺄륵거리며 웃었다. 해맑은 얼굴이 둘러앉은 이들의 어두컴컴한 안색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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