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56)
56화
베르너는 어느새 다시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진짜 쓰란 소리가 아니라, 최악의 경우에만 쓰란 얘기야.”
“우와…….”
“그리고 내가 이런 걸 줬다는 건 아르닌이나, 각하께는 비밀로 하고. 당연히 방계 쪽에도 입 다물고, 시벨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
“와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얼떨떨했다. 왜 먼저 이런 걸 내주는지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나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베르너가 재빠르게 덧붙였다.
“어린애가 들짐승에게 물려 죽어 있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아. 위험에 처했는데도 방조하고 있지는 않을 거다.”
아, 그렇구나. 이것 역시도 인도적인 차원의 호의인 것이다.
나는 금세 납득하고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도련, 공자님!”
“감사한 게 아니라, 이건 너무 당연한…….”
베르너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려다, 이내 포기하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됐어. 나머진 네가 알아서 해. 간다.”
베르너는 쌀쌀맞게 제 할 말만 톡 쏘아붙이고는 돌아서 버렸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손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육각뿔 모양으로 깎은 석영 조각 안에 오러와 마나가 복잡하게 얽힌 채 아지랑이처럼 휘돌고 있었다.
‘소환석…….’
어떤 이유에서든, 일단 위험할 때 구하러 와 주겠다는 뜻이겠지?
내가 비약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으면 했다.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다는 데서 오는 감동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역시 방계와는 다르구나.’
이 집 직계들은 잘 들여다보면 참 다정한 사람들인데 대체 어쩌다 [지.우.마>에는 그런 썩을 놈의 악역들로 박제되어 버린 걸까?
나는 소환석을 고이 주머니에 넣었다. 베르너의 소환석을 얻었으니 굳이 관리자로 그를 지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베르너가 추천한 기사들 중 한 명인 루시스 경에게 찾아갔다.
“관리자가 되어 달라는 말씀입니까?”
루시스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제가요?”
“네. 저는 루시스 경에게 관리자직을 맡기고 싶어요.”
“저를, 왜……?”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는지, 루시스 경의 낯에 희미한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와는 지금껏 크게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놀랄 만했다.
“제게 무얼 맡기시려고요?”
나는 힘주어 대답했다.
“제가 시험을 보는 동안 다른 관리자들, 그러니까 사바나의 마법사들을 가까이서 살펴봐 주셨으면 해요.”
“마법사들을 말입니까?”
“네! 저어, 아무래도 수도에서 납치당했던 일도 있고…….”
관리자들은 모두 공작이 직접 고용한 이들이었다. 까딱하면 공작의 뒤를 캐 달라는 제안으로 비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나는 눈매와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서글프게 말했다.
“그때도 마가렛과 시벨 님이 곁에 있었는데, 그래도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까. 이번에도 조심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하지만 하필이면 왜 제게?”
“루시스 경은 단순한 어린애의 투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루시스 경은 실력이 출중한 것은 물론이요, 진중하고 입이 무거운 기사였다. 무엇보다, 어린애에 불과한 나를 편견 없이 봐 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원작에서 유일하게 니엘라에게 선의도 악의도 보이지 않았던 인물이니까. 스쳐 지나가는 개미 조연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 사람은 보통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나는 단순히 내 편을 들어 줄 사람이 아니라, 나를 동등하게 믿어 줄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물론 맨입은 아니다.
“사례는 크게 치를게요. 원하는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루시스 경.”
다행스럽게도 난 돈도 많고, 귀중한 보물들도 많다. 아무래도 검사니까 아르닌 언니처럼 무기를 선물하면 좋아할까?
“제가 구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다 드릴게요!”
“사례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루시스 경은 손을 내저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승낙할 테니까요.”
어? 이번에는 외려 내가 당황했다.
루시스 경이 한쪽 무릎을 굽혀 내 앞에 자세를 낮추었다. 눈높이가 엇비슷하게 맞았다.
나를 바라보는 루시스 경의 눈빛이 무척이나 따듯했다.
“오래전에, 모시던 귀족 나리께 실수를 저질러 죽임당할 뻔한 저를 헤르젠 님께서 발견해 주셨습니다. 그분 덕분에 지금까지도 블라스코에 정착해 가주께 충성을 다하고 있죠.”
“아…….”
“그런 분께서 직접 거두고 키우신 후계자가 아기씨 아닙니까. 왜 굳이 저를 고르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유가 있으실 거라 믿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속사정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할아버지의 이름에 잠시 묻어 두었던 그리움이 일렁거렸다.
내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는 사이, 루시스 경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말씀대로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아기씨. 사례는 정말 필요 없습니다. 아기씨께 사례까지 받았다간 질투할 놈들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를 도와주신 건 절대 잊지 않을게요.”
“예. 그거면 충분합니다.”
나는 제법 어른스럽게 루시스 경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루시스 경은 어쩐지 웃음을 참는 얼굴로 나와 악수했다.
엄숙한 악수가 끝나고, 진지하게 표정을 가다듬은 그가 물었다.
“아기씨, 관리자가 된 기념으로, 제가 아기씨의 머리를 한 번만 쓰다듬어 봐도 되겠습니까?”
“넹!”
블라스코 사람들은 왜 하나같이 머리 쓰다듬기를 좋아하는 걸까? 의문이었지만 나는 순순히 루시스 경에게 정수리를 내줬다. 닳는 것도 아닌걸, 뭐!
그렇게 관리자까지 지정하고 나니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자, 그럼 이제 준비는 다 끝났다.
* * *
시험 디데이.
나는 이른 아침부터 들이닥친 마가렛의 기운찬 노크 소리에 부스스 일어났다. 한동안 수련소에서 특별 훈련을 받고 왔다던 그녀는 평소보다 더 의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씻고, 아침 드시고, 옷 갈아입으셔야 해요, 아기씨!”
마가렛이 나를 번쩍 들고 욕실로 옮겼다.
비몽사몽 씻고 나오니 테이블에 든든한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내가 끄덕끄덕 졸며 먹는 둥 마는 둥 하자, 마가렛이 아예 나를 무릎에 앉히고 밥을 떠먹여 주었다.
“든든히 먹고 가셔야죠, 아기씨! 아 하세요!”
“네엥……. 아…….”
‘어제 로켓에서 너무 오래 있었어…….’
시간은 흐르지 않았지만, 하도 머리를 굴렸더니 푹 자고 일어난 뒤에도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아침을 다 먹자, 마가렛이 흐느적거리는 나를 바로 세우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혔다.
“철저한 무장!”
나는 그녀에게 휘둘려 베이지색 쫄쫄이를 아래위로 입고, 안감에 웬 얇은 철판을 덧댄 재킷과 반바지를 입었다. 재킷과 반바지에는 주머니가 엄청나게 많이 달려 있었다.
단추까지 꼼꼼히 다 채운 마가렛이 손을 탁탁 털었다.
“밀색과 어두운 녹색, 완벽한 보호색!”
“…….”
“사바나에 들어가면 눈에 띄지도 않을 거예요, 아기씨!”
나는 내 얼굴에 끈적끈적한 위장 크림까지 바르려는 마가렛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도망쳤다.
마가렛이 검지에 위장 크림을 푹 찍은 채 “아기씨! 이것까지 발라야 완성인걸요!” 하며 나를 뒤쫓았다.
‘히익, 이렇게까진 안 해도 되는데……!’
아이칼이 내 옆에서 가볍게 달려 나갔다.
그렇게 약속 장소인 사바나의 입구로 향하는 길 내내, 나는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던 블라스코의 기사들에게서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씩 건네받았다.
“아기씨, 이건 불을 쉽게 피울 수 있는 화염 부싯돌이에요. 아무 바위에나 내리치기만 하면 불꽃이 튄답니다.”
“이건 독성이 있는지 판별해 주는 슬라임이에요. 독이 들어가면 이 슬라임이 새파랗게 변하면서 먹은 걸 토해 낸답니다. 버섯 같은 거 채취해 드실 때 꼭 미리 먹여 보세요.”
“보온 마법이 걸린 침낭입니다! 제 단골 가게에서 특별히 초소형 사이즈로 주문했답니다. 초여름이라도 아침저녁으론 쌀쌀하니 꼭 안에 들어가 주무십시오!”
겨우 정원으로 내려왔을 때 내 주머니는 가득 차다 못해 곧 찢어질 것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저래서 제대로 걷기는 하겠어?”
멀리서 한 짐 가득 지고 뒤뚱뒤뚱 걸어오는 나를 보고 공작이 던진 첫마디였다. 그는 내가 품 안 가득 안은 물건들을 한 번에 쑥 빼앗아 가더니, 아르닌의 창을 제외한 것들을 노란 배낭에 우르르 쏟아 넣었다.
“우와.”
나는 그가 가방의 세 배는 될 법한 침낭을 손쉽게 욱여넣는 것을 놀라운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공작이 내 팔을 한 짝씩 들어 올리곤 가방을 꿰어 주었다.
“아공간 마법이 걸려 있다. 배낭에 손을 넣고 찾고 싶은 물건을 외치면 곧장 손에 잡힐 거야.”
“오오!”
“몸에서 떼어 놓지 말고 잘 메고 다녀.”
“네!”
공작의 손에선 몹시 작아 보이던 가방은 내 몸통보다 더 컸다.
이어 공작이 내 머리에 노란 모자를 씌워 주었다.
“초원은 태양 볕이 강하다. 새카맣게 타서 오지 말고 모자 꼭 쓰고.”
“네!”
“이것도 잘 들고.”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아르닌의 창을 쥐여 주었다. 나는 한 팔로는 아이칼을 꼭 끌어안고, 다른 손에 미니 창을 쥐었다.
공작이 무겁게 목소리를 깔았다.
“준비됐나?”
“네! 준비됐어요!”
씩씩하게 공작을 올려다보자 그가 세상 근심이란 근심은 다 짊어진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간 잠자기는 글렀군…….”
“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루시스에게 구조 요청해야 된다. 미련하게 버티고 있으면 안 돼. 알겠지?”
“네에에엡!”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러나 공작의 만면에 낀 먹구름은 점점 더 짙어지기만 했다.
“애는 소풍이라도 가는 줄 알고, 걱정은 이쪽이 하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