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57)
57화
사바나로 들어가는 마법진 앞에는 이미 관리자인 마법사들 열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감독관 첸 블라스코도 함께였다.
“행운을 빈다, 아인슬리.”
첸이 몹시 재수 없게 내게 덕담을 건넸다.
‘얼굴은 그냥 내가 사바나 안에서 평생 나오지 말았으면 하는 표정인데.’
다행히 감독관을 포함한 관리자들은 사바나 안까지 나와 함께 가진 않는다. 내가 이동진을 타고 초원으로 들어가고 나면 그들은 초원의 출구 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었다.
“공작님, 이거.”
나는 기회를 엿보다 공작의 손에 검은 메달을 살그머니 떨어뜨렸다. 아스트로카 중앙은행의 패스였다.
“……이건 왜?”
대답 대신 파닥파닥 손짓하자, 공작이 내게로 허리를 숙여 주었다.
나는 그에게 작게 귓속말을 건넸다.
“업데이트했어요. 403년부터 437년까지, 34년간 금고 입출금 내역 전부요. 지난번에 수도에서 신청해 놓고 왔거든요.”
은행원 두올이 예상했던 것보다 이틀 정도 늦었지만, 대강 훑어본바, 누락된 햇수 없이 전부 패스에 업데이트되었다.
공작이 표정 없이 나와 패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소리 낮춰 빠르게 속닥거렸다.
“제가 절대절대 블라스코 방계를 무시하거나, 근거 없이 적대하는 게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요. 과연 누가 수도에서 저를 납치하라고 사주했을지요.”
“…….”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조차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같은 거야 사실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이건 직계의 위신을 위해서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까 한 번쯤 대대적으로 금고 내역을 점검해 보셔도…… 아얏.”
“너 같은 거라니.”
또다시 볼이 꼬집혔다.
어리둥절해서 올려다보자 공작이 인상을 팍 찡그리고 있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너 가끔 말 습관이 바람직하지 못하다.”
“어이아여……?(어디가요……?)”
뭔가 실수했나 싶어 내 행적을 되짚어 보는데, 관리자 중 한 명인 노엘이 조심스레 우리를 재촉했다.
“각하, 이제 슬슬 시험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만.”
어느새 태양이 바로 머리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정오였다.
공작은 할 말 많은 눈을 하기는 했지만, 마지못해 내 뺨을 놓아주었다.
“넌 다녀와서 나랑 면담 좀 하자, 오렌지. 이 패스는 잘 써먹을 테니 염려 말고.”
“네!”
“다녀와.”
무뚝뚝한 말투와는 달리 내 등을 떠미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걱정 어린 눈을 한 블라스코 사람들이 제각기 내게 용기를 북돋웠다.
“다녀오세요, 아기씨! 조심하시고요!”
“특식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아기씨!”
“어헝, 누가 날 일주일만 기절시켰다가 깨워 줘…….”
나는 그들의 온기에 힘입어 자신 있게 블라스코의 열대 초원으로 발을 들였다.
* * *
초원으로 향하는 입구로 들어섰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이지 자신만만했다.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이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본격적인 사바나는 입구의 숲을 지나고 나서야 펼쳐진다. 어느새 인간 모습으로 변한 아이칼이 휘적휘적 앞서 나갔다. 내게서 갈취한 아르닌의 창을 대충 쥔 채였다.
나는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너무 빨리 나가도 의심을 사니까, 적당히 시간 때우면서 가야 해. 적당한 곳에 자리 펴고 앉아서 쉬자.”
“오랜만에 몸 풀고 싶은데, 안 돼?”
“뭐, 가볍게 뛰는 거야 상관없는데. 사바나의 짐승들을 죽이면 안 돼, 아이칼. 공작님이 아끼시는 반려동물들이라고 했어.”
[지금 우리, 마법처럼>에서, 니엘라는 사바나를 통과하며 공작의 반려동물들을 다섯 마리나 죽였다. 당연히 정당방위에 속하지만, 아끼는 짐승을 다섯 마리나 잃은 공작에게 니엘라가 좋게 비칠 리가 없었다.그 때문에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블라스코 내에서 그녀의 입지는 오히려 더욱 좁아졌다.
“절대 죽이면 안 돼. 약속해.”
나는 아이칼에게 확답을 재촉했다.
아이칼이 가끔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저 날카로운 손톱은 거죽을 파고들고 동맥을 결딴내기 제격이다.
아이칼이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나도 죄 없는 생명을 죽일 생각은 없어.”
“좋아.”
사바나의 짐승들과 우리, 쌍방 안전하고 평화롭게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내 첫 번째 목표였다. 그리고 두 번째 목표는…….
“그리고 이왕 여기 들어온 김에,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만들어 가고 싶어.”
“새로운 친구?”
반걸음 앞서 가던 아이칼이 우뚝 섰다. 그 바람에 나는 그의 어깨에 코를 박고 말았다. 악!
아이칼이 코를 감싸 쥔 나를 돌아보았다. 미묘한 눈이었다.
“친구가 더 필요해, 카티?”
“아야야……. 뭐어, 친구는 많을수록 좋잖아.”
나는 얼얼한 콧잔등을 꾹꾹 누르느라 아이칼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미처 보지 못했다.
니엘라는 이 시험을 단지 통과하는 데만 의의를 뒀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가 볼 생각이었다. 초원을 ‘어떻게’ 통과해서 ‘무엇을’ 얻어 가느냐?
‘위기는 곧 기회로.’
아마 이 두 번째 시험이 끝난 후, 블라스코에서 내 위상은 이전과는 비할 바 없어질 것이다.
나는 뒤이어 떠오른 생각에 아, 하고 탄성을 냈다.
“그리고 하나 더. 혹시 ‘변이종’을 발견하면, 바로 처리하지 말고 일단 내게 알려 줘.”
막 아이칼에게 그렇게 당부했을 때였다.
파삭. 무언가를 밟은 느낌이 났다.
뭔가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발밑에서 푸르스름한 마법진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바나로 통하는 진짜 입구였다.
깨달은 바로 다음 순간, 강렬한 열기가 정수리를 내리쬐었다. 눈앞에 빛이 명멸하며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훅 들이마신 공기였다. 따스하고 시원하던 여름 숲 공기가 무척이나 무겁고 후덥지근하게 뒤바뀌었다. 그다음은 눈을 찌르는 햇빛이었다.
“……!”
눈살이 사정없이 찡그려졌다. 그러자 곧장 이마에 손차양이 드리워졌다. 어느샌가 내 곁에 붙은 아이칼이 무심히 손을 내어 이마에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고마워. 으, 눈부셔…….”
“…….”
아이칼에게서는 금방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의아함을 느끼며 천천히 실눈을 떴다. 뒤이어 일어날 일을 짐작이라도 한 듯 심장이 두근두근 맥동하기 시작했다.
가느다랗게 드러나는 시야의 틈으로 쨍한 햇빛이 들이닥쳤다. 뒤이어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와.’
나는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눈앞을 가득 채운 풍경에 순간 압도되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끝을 모르도록 광활한 초원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키 큰 건초들로 뒤덮인 드넓은 평야에 드문드문 푸른 관목이 자리했다.
멀리 보이는 호수에 길고 뾰족한 뿔을 단 물소 떼가 한가로이 어슬렁거렸다. 탁 트인 시야 저편으로 지평선이 보였다.
갑자기 머리 위에 그늘이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 보니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에 수백 마리의 괴조가 떼를 지어 날고 있었다.
단순한 환각 마법 따위가 비빌 만한 현실감이 아니었다. 인공미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원초적인 야생이었다.
원작에서 스치듯 나왔던 단 한 문단의 설명이 머릿속을 스쳤다.
[블라스코 공작이 마도 학술원 출신 고위 마법사 12명을 특별 기용해 구현해 낸 인공적인 사바나. 실은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아스트로카 마법의 보고일지도 모른다…….>원작에는 틀린 말이 없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얼이 빠졌다. 그리고 이미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을 다시 했다.
‘공작님, 무슨 취미 생활을 이렇게 본격적으로 해……?’
* * *
그러나 채 500미터도 걷기 전에, 우리를 둘러싼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자연이 주는 경탄은 씻은 듯 사라졌다. 대신 숨도 쉬기 힘들 만큼 엄청난 뙤약볕이 우리를 반겼다.
‘더워!’
초원은 미친 듯이 더웠다. 온몸의 수분이 실시간으로 바짝바짝 말라 갔다. 그나마 나는 사정이 나았다. 아이칼은 거의 죽어 가는 중이었다.
“카티, 나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독에 당한 걸까?”
“너 더워서 그래, 지금.”
“카티샤가 두 명이다.”
나를 빤히 들여다보는 아이칼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의 몸 주위로 얇게 살얼음이 끼었으나, 작열하는 태양열에 금세 줄줄 녹아내렸다.
‘아, 하긴. 그럴 만도.’
아이칼은 평생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설원과 빙하가 떠다니는 얼음장 같은 북해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아르템의 푸릇한 초목과 따사로운 초여름 햇살조차도 처음 겪어 하루 종일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아이칼이 이런 극한의 한여름을 버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나는 키스 경이 주었던 온도 조절용 마정석을 만지작거렸다.
‘한 개인데……. 이거라도 일단 줘야겠다.’
난 그냥 조금 덥고 말지, 뭐. 그렇게 결정하고 마정석을 건네려는데, 아이칼이 더 빨랐다.
내게서 풍기는 찬 바람을 인식한 그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곤 내 손을 탁 잡아 쥐었다.
“어?”
내 주위를 맴돌던 찬기가 아이칼에게로 고스란히 옮겨 가는 게 느껴졌다.
“아, 그러네. 손을 잡으면 되겠다!”
나는 얼른 아이칼의 손을 깍지 껴 제대로 잡았다. 그걸로도 모자랄 것 같아 두 손으로 꼭 맞잡자, 시원한 공기가 그에게로 흘러들어 갔다. 아이칼의 은푸른빛 눈에 초점이 또렷이 돌아왔다.
나는 아이칼의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
“괜찮아? 이게 바로 덥다는 거야, 아키.”
“더워…….”
“너는 지금 더위를 먹은 거고. 정신 차려 봐. 이렇게 손잡고 있으면 금방 시원해질 거야.”
새하얗게 질린 아이칼의 관자놀이를 타고 땀방울이 또륵 떨어졌다.
‘아이고, 얘를 어쩐담!’
하릴없이 마음이 약해졌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주자, 아이칼이 곧장 내 허리에 매달려 서럽게 칭얼거렸다.
“나갈래. 나가자. 여기 너무 더워. 더 있기 싫어…….”
“많이 더워? 그래도 안 돼. 적어도 5일은 여기서 버텨야 하는걸.”
“싫어…….”
“쉬엄쉬엄 가면 돼. 동굴 같은 곳에서 낮잠이라도 자면서.”
“싫어. 당장 갈래.”
“뭐? 아니, 이렇게 빨리는 안 된다니까…… 악!”
내 허리를 감은 아이칼의 팔에 꽉 힘이 들어가나 싶더니, 그가 땅에서 무를 뽑아내듯 나를 쑥 들어 올렸다. 그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어?
나는 멍하니 멀어지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
도움닫기조차 없었다.
나는 상황을 깨닫자마자 아이칼의 하늘하늘한 옷자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야, 야, 아키! 잠깐만!”
이렇게 빠르면 안 된다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