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64)
64화
* * *
나와 아이칼, 그리고 베르너는 그다음 날도 평온한 여정을 이어 갔다.
운 좋게도 내가 고른 루트가 변이종들의 출몰 지역을 비껴가는 길인지, 하루 하고 또 반이 지나도록 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이한 일은 점심경에 일어났다. 멀리 보이는 웅덩이에서 물을 마시던 흰 코뿔소 무리 중 하나가 우리 쪽으로 슬그머니 접근해 온 것이다.
“변이종은 아닌 것 같은데…….”
아이칼이 꼬리로 코뿔소의 다리를 톡톡 건드렸다. 마땅찮은 기색으로 꼬리를 휘두른 눈표범이 나를 향해 가늘게 울었다.
“어? 타라고?”
눈표범이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끄덕했다. 그러곤 복슬복슬한 꼬리로 내 발목을 감았다가 놓았다.
‘카티, 발 아파.’
촉촉한 눈표범의 은푸른빛 눈동자가 꼭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어어, 하지만 나 무거울 텐데.”
그러자 뒤에서 팽 하고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척척 다가온 베르너가 나를 번쩍 안아 흰 코뿔소의 등 위에 올려 주었다.
“종잇장 같은 게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태워 준다니까 뿔 잡고 앉아.”
“우왓.”
쑥 들어간 등의 굴곡 사이에 앉자 짐승이 경쾌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아이칼은 코뿔소의 뿔 밑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막상 앉고 보니 편했다. 승차감도 아이칼에 비하면 리무진 수준이다. 코뿔소는 덩치에 맞지 않게 사뿐사뿐 네 발을 움직였다. 가끔 신나게 궁둥이를 흔들기도 했는데, 양옆으로 몸이 왔다 갔다 쏠리는 게 엄청나게 재미있었다.
그래서 금방 적응했다.
“꺄으악, 더 해 줘!”
그런데 뜻밖의 손님은 코뿔소에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 일행 뒤로 동물들이 한 마리씩 슬그머니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쉬어 가기 위해 야영할 자리를 잡으면 갖가지 동물들이 한 마리씩 다녀갔다. 코가 빨간 흰머리 원숭이는 개암나무 열매와 산딸기, 버섯을 내 손바닥에 우르르 쏟아 놓고 갔고, 야생 기린 두 마리는 야영지 주위에 코코넛을 둥글게 굴려 놓고 떠났다.
심지어 하늘을 높이 날던 괴조 수십 마리가 떼 지어 우리가 앉은 바오밥나무 위에 다닥다닥 모여들기도 했다. 이쯤 되니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무릎에 배를 깔고 엎드린 아이칼에게 소곤거렸다.
“솔직히 말해 봐, 너 뭐 했어?”
아이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긴, 그렇지 않으면 이럴 리가 없잖…… 아이, 간지러.”
나는 말을 잇다 말고 낄낄 웃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카나리아 무리가 내 목덜미를 간질간질 쪼고 있었다.
아이칼이 으르렁거리며 앞발을 휘둘러 카나리아들을 쫓아냈다. 그러나 날쌘 새들은 쉽게 잡히지 않아, 새끼 눈표범은 곧 카나리아들을 쫓아 바오밥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야아, 왜 못살게 굴어!”
나는 카나리아를 괴롭히는 눈표범을 잡기 위해 눈표범 뒤를 빙글빙글 따라다녔다. 그러다 나는 그만 출발해야 한다며 다가온 베르너의 오른손에, 아이칼은 왼손에 각각 붙들려 다시 흰 코뿔소 위에 앉았다.
베르너가 신기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동물들이 너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마 아키를 좋아하는 걸 거예요. 신수니까!”
“아닐걸. 오히려 쟤넨 너의 그 눈표범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여.”
그런가? 나는 다시 내 품으로 꼬물꼬물 파고든 아이칼을 쓰다듬었다.
‘경외심 같은 걸까? 아무래도 신수는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하니까.’
확실히 사바나의 동물들은 아이칼보다 내게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아이칼 앞에서는 바짝 얼어 버리거나 고개를 푹 조아리기 일쑤였다.
‘날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 이것 때문인 것 같은데.’
심각하게 내 두 손을 내려다봤다. 아주 희미하지만, 노을색 기운이 손바닥을 한 겹 덮고 있었다.
내 머리카락과 같은 주황색이라기에는 색이 옅고, 붉은빛이 많이 섞인 노란빛에 가까웠다.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오러.’
혈관을 타고 피와 함께 생명체의 몸속을 휘도는 근본적인 생명 에너지, 오러였다.
‘지금까지 내 오러를 본 적은 없었는데.’
나를 따라오는 동물들은 이 오러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머리 위에 거대한 그늘이 졌다. 고개를 들자, 내가 이제껏 본 모든 환상종 가운데 가장 큰 생물이 보였다.
‘날아다니는 가오리…….’
나 같은 꼬마 50명은 거뜬히 태울 것만 같은 초대형 가오리가 유유히 창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다섯 가닥으로 갈라진 꼬리가 제각기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진짜 크다.’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알아챘는지, 가오리가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집채만 하던 가오리는 이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우산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스쾨티모르!’
나는 내가 탄 흰 코뿔소 옆에서 비슷한 속도로 날아오는 거대 가오리에게 손을 뻗었다. 스쾨티모르라는 이름을 가진 이 환상종은 전 세계를 다 뒤져도 세 마리뿐이라고 했다.
‘니엘라가 사바나에서 베어 버린 환상종 중 하나였지.’
스쾨티모르에 대해 모르니까 그렇게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었던 걸 테다.
수중 생물임에도 아무렇지 않게 육지로 올라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이 신비한 생물은 환상종 백과사전에서도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는 희귀종이었다.
‘얘를 만나면 완전 길조인데 말이야.’
나는 손을 뻗어 가오리의 미끈한 날개 표면을 쓰다듬었다.
“친구야.”
스쾨티모르의 가장 큰 특징은 모습을 감추는 능력이다.
스쾨티모르는 거대한 몸체로 품은 모든 것들의 존재감을 완벽하게 숨겨 준다. 게다가 10년에 한 번씩 그들의 몸속에서 자라는 돌멩이인 홍옥은 그것을 가진 자의 모습을 숨겨 주는 능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단순히 보이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소리도, 기척도, 부피와 무게마저도 공기처럼 만들어 준다.
느리게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오리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입을 크게 벌려, 내 손끝에서 흘러나간 노을빛 기운을 삼켰다. 그러곤 행복하게 웃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마음에 들었나 봐.’
그 순간, 머릿속에 반짝하고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손을 동그랗게 모아 입가를 가리고, 작게 속삭였다.
‘있잖아, 친구야. 나중에 나를 좀 도와주지 않을래?’
* * *
사바나의 동물들에게 둘러싸인 이틀간의 여정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중간에는 머리 위를 맴돌던 괴조가 착지해 내게 올라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베르너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
“왜애애……!”
나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베르너에게 매달렸다.
“한 번만 탈게요. 낮게 날아 달라고 부탁할게요! 5분만……!”
“안 돼. 간덩이가 얼마나 부은 거야, 대체?”
그러나 베르너는 내 필사의 어리광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거 타고 날아가다가 떨어지면? 조각조각 부러져서 뼈도 못 추릴걸. 그렇게 허망한 최후를 맞고 싶어?”
“히잉…….”
“히잉은 무슨. 얌전히 뿔이나 잘 잡고 가.”
결국 초원의 상공을 날아 보겠다는 내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에이. 공중 정찰을 해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나, 우리는 마침내 최종 도착 지점 바로 근처에 도착했다.
곧 있으면 블라스코의 청색 깃발이 휘날리는 광경이 보여야 했다. 그리고 그 아래, 마지막 영상구가 있는 게르가 있어야 하는데…….
“어……?”
도착 지점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 멀리, 사바나의 출구인 이동진만이 반짝이며 빛을 흩뿌리고 있을 뿐이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베르너가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아르닌이 다녀간 모양인데.”
“언니도 안으로 들어왔나요?”
“그래. 나는 너를 보호하고, 아르닌은 변이종 발생의 근원지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됐다. 이미 한바탕하고 갔나 보군.”
나는 그를 따라 눈살을 좁히고 게르가 있었어야 할 텅 빈 공간을 살폈다. 건조한 밀빛을 띠는 장초가 군데군데 납작 눌려 있었다. 그 위로 아르닌의 하늘색 오러가 흐릿하게 떠돌았다.
“도망쳤군.”
베르너가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변이종이 도망을 시도한 모양이다. 검기의 흐름이 일방적이고, 방향이 일정해. 표적 하나를 집요하게 뒤쫓았다는 뜻이지. 쫓던 중에 이곳을 지나친 것 같아.”
“아니에요.”
나는 그의 말을 막으며 팔뚝을 문질렀다. 옷 위로 드러난 맨살갗이 미세하게 따끔거리고 있었다. 일전에 쌓은 경험치가 날카롭게 경고를 날렸다.
점차 가까워진다, 뭔가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어.’
변이종의 마기에 뒤섞여, 희미하게 아르닌 언니의 오러도 느껴졌다. 그들이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때, 내게 안겨 있던 아이칼이 밑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전투의 흔적이 여실히 남은 초원 위를 자그마한 눈표범이 뽀르르 달려 나갔다.
아이칼은 곧 입에 영상구와 깃발을 물고 돌아왔다. 장초 사이에 파묻혀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언니가 남겨 두고 갔나 봐요.”
나는 얼른 아이칼의 입에서 푸른 깃발을 빼냈다. 블라스코의 상징 문양이 그려진 이 깃발은 시험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증명하는 증표였다.
‘깃발을 뽑기만 하면 끝난다고 했지.’
나는 그것을 사바나 밖으로 향하는 이동진에 떨어뜨렸다. 푸른 깃발이 곧 이동진을 타고 사라졌다.
좋아. 이로써 시험은 끝났다. 그렇다면 이제 내 전용 관리자를 자유롭게 소환해도 룰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나는 가슴팍에 달고 있던 관리자 소환용 배지를 꾹 눌렀다.
“루시스 경, 들리세요?”
[예. 듣고 있습니다, 아기씨.]지금 저 이동진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을 루시스 경이 곧바로 대답해 왔다.
“나머지 열두 명의 관리자들 중 의심 가는 자들이 있었나요?”
[예, 아기씨. 첸 블라스코 포함, 지난 나흘간 이상 반응을 보이거나 외부와 연락을 취하려 시도한 이들은 빠짐없이 묶어 뒀습니다.]음, 좋아.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존의 관리자들에 새롭게 내가 선정한 관리자를 투입한 이유가 이것이다.
공작의 사적인 공간인 사바나 안에서 방계가 일을 터뜨리려면, 반드시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 가장 유력한 조력자, 즉 배신자 후보는 사바나를 관리하는 12인의 마법사.
‘그러면 당연히, 특수 페로몬이라는 것도 그자들이 만들었을 거란 말이지.’
페로몬은 전염성이 짙지 않다. 하지만 인공적인 페로몬을 만들어 내고 주입하는 과정에서, 범인들의 몸에도 소량이나마 묻어 있을 테다.
그런데 그런 페로몬은 같은 종이 아니면 감지할 수 없다. 인간은 페로몬을 맡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 안에서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