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68)
68화
* * *
두 번째 시험이 끝난 바로 다음 날, 가문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렇게까지 짧은 기간에 회의가 다시 소집된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불참한 사람은 게스파 어르신 한 분뿐이었다. 동대륙으로 나가 계셔서 당장 귀환하실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지지난 달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저택 꼭대기 층의 진실의 방 한가운데 앉았다.
고작 한 달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나를 힐끔거리는 방계들의 눈초리가 그때보다 확연히 무디어져 있었다.
“금고를 단번에 열어젖혔다지?”
“첫 번째는 운이라고 쳐도, 그 악명 높은 사바나에서 살아 돌아온 건 운으로만은 설명이…….”
“그래, 난 사실 그럴 줄 알았어. 무려 헤르젠이 직접 키운 아이라지 않았나?”
그때와 바뀌지 않은 건 내 표정뿐이었다.
나는 지난날과 비슷하게 썩은 표정을 짓고 속으로 툴툴댔다.
‘지금 와서 예쁘게 봐 줘 봤자 별로 안 기쁘거든요.’
공작은 모두가 착석했음을 확인하자마자 가타부타 말없이 회의장 한가운데로 무언가를 휙 던졌다.
한 뼘만 한 무시무시한 두께의 두루마리가 허공의 마법진에 걸려 좌르륵 펼쳐졌다. 어지러운 숫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지난 18년간 헤르젠 블라스코의 명의로 되어 있던 가문 금고에서 고정비 명목으로 지출된 12만 골드 건에 대하여. 내 입으로 말하기도 귀찮으니 제미언 파커가 대신 설명할 겁니다.”
공작의 호명을 받은 제미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첸 블라스코가 수장으로 있던 광산업 쪽에서 발생한 예산 횡령에 대해 그가 줄줄줄 브리핑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인출은 바로 작년 겨울인데, 광산에서 고용한 광부들이 머무를 숙소와 휴게소를 짓고 복지 비용을 댄다는 명목으로 금고에서 7000골드의 예산을 빼 갔지만, 정작 광산엔 휴게실은커녕 앉을 의자 하나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 그런…….”
“본가에서 블라스코가 고용한 노동자들의 처우까지 면밀히 살피지 못한 것은 분명한 과실. 하여 이제부터는 방계의 재량으로 진행하던 예산안 편성과 재정 운용 계획까지 전부 본가에서 맡아 진행합니다. 그리고 분기에 한 번씩 직계들이 직접 현장 감사를 나갈 예정이고요.”
방계들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누군가 손을 치켜들고 조심스레 반박했다.
“하지만 그렇게 일일이 승인을 받아야 하면 일의 진행이 더뎌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주님. 실무는 또 이론과는 다르고…….”
이름 모를 용자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러니…… 예산안을 짜는 건, 직접 사업을 지휘하는 방계의 책임자들이 하는 게 더 효율적……”
“책임자? 책임자 누구?”
존대를 집어치운 공작이 싸늘하게 반응했다.
“돈 뜯어먹으려고 어린아이 한 명 쥐 잡듯이 잡는 그 방계의 책임자? 내 초원을 짓밟고 죄 없는 짐승들을 돌연변이로 만든 그 새끼들?”
“예? 그게 무슨……?”
공작은 대답 대신 손에 쥔 또 다른 것을 내팽개치듯 던졌다.
내가 그에게 주었던 영상석이 허공의 마법진 한가운데서 멈추었다. 그리고 곧 모두가 볼 수 있을 만한 거대한 스크린을 띄워 냈다.
사바나에서 내가 담아 온 모든 광경이 확장과 증폭 마법을 타고 생생한 서라운드 사운드로 상영되었다. 영상의 마지막은 변이종 어구스트가 첸 블라스코를 제 머리 위에 태우고 재빠르게 도망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끊겼다.
스크린이 꺼지자, 소임을 다한 영상석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나는 내가 앉은 의자 밑까지 통통 굴러온 영상구를 집어 앞주머니에 쏙 넣었다.
‘언제 다시 필요할지 모르니 가지고 있어야지.’
모두가 내게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싸늘하고 불안한 침묵이 좌중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적막을 깬 사람은 공작이었다.
“굳이 구절구절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아도 되리라 믿습니다. 저 상황을 이해할 머리들은 있으시려니, 하고.”
“가, 가주…….”
“이래도 내가 그쪽들에게 블라스코의 기둥을 맡겨야 하는지, 어디 지껄여 볼 사람?”
“…….”
“참고로 첸과 시벨 부자 포함, 그들에게 협조한 마법사 세 놈은 그토록 좋아하는 초원 안으로 넣어 줬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엔, 여기서도 손잡고 같이 가야 할 놈이 몇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상석에 앉은 공작의 기세에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또 나왔다. 파란 전류 튀기는 고슴도치 공작님.’
이미 문밖에서 키스 경과 마가렛이 언질을 줬다. 공작님께서 화를 내실지도 모르니, 살기가 너무 아프다 싶으면 언제든 나와도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럴 거면 애초에 안 들어왔지.’
나 역시도 첸과 시벨 블라스코를 본보기로 하는 것에서 그칠 생각은 없었다.
첸과 시벨처럼 탐욕적인 자가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블라스코는 방계의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그거 하나하나 일일이 관리했다간, 아무리 공작님이라도 병나.’
공작님은 하겠다면 정말 하실 것 같아서 더 문제였다. 그러니 이참에, 나를 못마땅하게 보는 방계의 시선을 아예 바꿔 놓아야 했다. 그리고 직계의 위신을 더욱 공고히 세운다.
‘찍소리도 못 하게 눌러 버려야 해.’
방계가 가주의 분노에 납작 엎드릴 때, 바로 지금을 빌려서.
“공작님.”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 발언해도 되나요?”
“허락한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즉시, 나는 주머니에서 가지고 온 영상석을 꺼내 힘껏 내던졌다. 영상석은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머리 위의 마법진에 걸렸다.
팟, 소리와 함께 새로운 영상이 켜졌다.
내가 첸 블라스코에게 빈정거리는 장면이 모두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저도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요. 제가 절대 용납 못 하는 게 딱 한 가지 있어요. 뭔 줄 아세요?”》
《“우리 할아버지를 모욕하는 거예요.”》
나는 지난 두 번의 시험으로 똑똑히 깨달았다. 이 블라스코에서, 얕보이는 건 곧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었다.
어린아이의 아양은 통하지 않는다. 비굴하게 굴면 밟힌다. 사바나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이 가문 전체가 세대마다 무력으로 재편성되는 인간들의 사바나였다.
내가 쥔 유산은 양날의 검이다. 나를 풍요롭게 하지만, 동시에 나를 위태롭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얕보이지 않으면 돼.’
굽히고 들어가지 않는다. 강약약강의 세계인 이곳에선 법과 상식은 멀리 있었다. 말보다 주먹이 빠르다.
‘좋아. 그렇다면 맞춰 주지.’
한마디로, 나는 헤르젠 할아버지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은 블라스코의 성깔머리를 고대로 재현할 생각이었다.
“할애비 믿고 깽판 쳐라, 카티! 개싸움이 되더라도 네가 이기면 장땡인 것이야!”
나는 눈을 길게 감았다가 힘주어 떴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소맷자락 사이로 노을색 오러가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제가 저번에 가문 회의에서 그랬죠. 할아버지는 제게 호구처럼 당하고 살지는 말라고 가르치셨다고.”
달라진 내 태도를 알아챘는지, 이쪽을 향한 시선들이 더욱 곱지 않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검투장에 납치된 날, 결정했어요. 첫 번째 시험을 치르며 제 수중으로 들어온 블라스코의 금고가, 제가 아닌 다른 이에게 열리는 일은 다시는 없을 거라고.”
“뭐!”
의석의 누군가가 경악해 외쳤다.
“대대로 물려지는 유서 깊은 금고에 감히 무슨 짓을 한 거냐, 너!”
“이건 공작님께서도 합의하신 사항이니 그렇게 아시고요. 그리고 두 번째, 사바나에서 변이종을 맞닥뜨렸을 때.”
말을 하면 할수록 더 화가 나기 시작했다.
“또 결심했어요. 이렇게까지 치사한 수를 쓴다면, 나라고 정정당당할 필요는 하나도 없겠다.”
내가 호구야? 번번이 당해 주게.
내 품에서 벗어나 폴짝 바닥으로 내려선 눈표범이 고개를 빳빳이 치켜세웠다. 그와 동시에, 나와 아이칼이 디딘 부분을 제외한 회의장의 바닥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내부의 온도가 족히 5도는 뚝 떨어졌다.
“신수……. 이클라스족의 신수다.”
누군가 침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10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한다는…….”
땡, 틀렸지롱. 10년마다 나타나는 쿼터가 아니라 수백 년에 한 번 보일까 말까 한다는 하프다.
그러나 굳이 아이칼이 인간화까지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바닥에 낀 유리 같은 얼음 위에 소복이 눈이 쌓이고 있었다. 동시에 천장에서 자라 내려오기 시작한 고드름이 방계석을 위협적으로 겨눴다.
쩌저저적. 홀의 어딘가가 불길한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그러나 놀라운 광경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오러가 감도는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즐겁게 내 새로운 친구를 불렀다.
“이제 나와도 돼! 스티.”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급작스레 모두의 머리 위에 검은 그림자가 졌다. 둘러앉은 이들의 고개가 위를 향해 꺾였다.
의석은 물론이고, 진실의 홀을 전부 덮을 만큼 거대한 가오리가 드높은 천장 아래서 천천히 날갯짓하고 있었다.
가오리가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는 빛의 가루가 아름답게 휘날렸다. 가히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의석에 앉은 방계들이 입을 쩍 벌렸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소개했다.
“초원에서 사귄 제 새로운 친구들이에요.”
위를 향해 손짓하자, 가오리가 우아하게 상공을 휘저어 고도를 낮추었다. 엄청난 바람이 불어닥치며, 가오리의 등에 타고 있던 존재들이 샹들리에 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 숨넘어가는 침음을 냈다.
“허억. 환상종들이다…….”
쿠웅-. 나를 태워 주었던 흰 코뿔소가 육중한 소리와 함께 회의실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높이 들고 공기를 찢어발길 듯 위협적으로 울어 젖혔다. 뒤이어 식인 악어 세 마리가 주둥이를 쩍 벌리며 기어 내려왔고, 그 뒤를 독니를 품은 거대한 뱀 삭스네이크가 뒤따랐다.
환상종 스쾨티모르의 최상급 능력은 거대한 몸체로 품은 모든 것들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존재감을 완벽히 감추는 것.
내가 사바나에서 가오리의 등에 태워 데려온 동물 친구들이 하나둘 회의장을 디뎠다.
진실의 홀은 곧 각양각색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사람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