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69)
69화
흰 코뿔소와 들소들이 떼 지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생 기린이 긴 목을 휘두르며 진실의 홀을 쿵쾅쿵쾅 달렸다. 빨간 코 흰머리 원숭이가 방계석 위로 뛰어내려 누군가의 머리에 달라붙었다.
“악, 이게 뭐야!”
“사바나의 맹수들……!”
“저, 저거, 괴조 아니오? 눈이 마주치면 액운이 낀다는…….”
“뭐야, 이쪽으로 오지 마!”
여기저기서 급박하게 검을 빼 들었다. 그러나 살기를 내뿜던 방계들의 기세는 누군가 주먹을 쾅 하고 내리치는 소리에 곧장 꺾였다. 공작이었다.
“내 아기들, 한 마리라도 건드리기만 해 봐. 혈족이고 뭐고 다 반 죽여 놓을 테니.”
“가, 가주…….”
“우리 꼬맹이도 포함이야.”
공작의 새파란 눈이 멀리서도 보일 만큼 섬뜩하게 번뜩거렸다. 이성이고 뭐고 다 집어치운 듯했다.
‘헤헤, 나도 포함이래.’
가슴이 뿌듯하게 펴졌다. 나는 난장판이 된 회의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벌써 두 번이에요, 아저씨들.”
검지와 중지를 펼쳐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 번째에는 저도 뭘 하고 싶어질지 모르겠어요.”
홀을 마음껏 짓밟고 다닌 사바나의 짐승들이 하나둘 내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이칼이 크릉거리며 내 발목 사이로 파고들었다.
동물 친구들은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든든한 친구들은 내가 말만 하면 곧장 무자비하게 공격을 퍼부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나는 또박또박 경고했다.
“이 이상으로 건드리시면, 저 물어요.”
“…….”
“모가지가 형체도 안 남을 때까지 물어뜯을 거야.”
그래서 얘네 밥으로 줄 거야.
크루어드를 비롯한 짐승들이 내게 동조하듯 길게 울었다.
블라스코에 온 이후로부터 살금살금 쌓여 가던 울분이 결국 머리 뚜껑을 열었다. 내 몸을 타고 노을빛 오러가 파도처럼 물결쳤다.
나는 마지막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남은 시험은 방해할 생각 하지 마세요. 다쳐요.”
“…….”
“저, 이제부터 정말 제대로 깽판 칠 거니까.”
가자, 얘들아!
내가 손을 높이 치켜들고 손가락을 탁 튕기자, 나를 에워싸고 있던 환상종들이 제각기 사방으로 돌진했다.
누군가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공격한다……!”
회의실 안이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나는 손바닥을 동그랗게 모아 즐겁게 소리쳤다.
“얘들아아아, 아무리 신나도 먹어 버리면 안 돼-!”
가볍게 데리고만 놀아 주는 거야!
나는 혼비백산해 체면도 집어치우고 달아나는 방계 일족들을 기쁘게 구경했다.
‘봤냐? 나 같은 애도 할 수 있는 게 있다 이거야!’
그러니까, 잠자는 내 코털을 건드리지 말란 말이야, 이 못된 아저씨들아!
* * *
방계 일족들이 꽁지가 빠져라 회의실을 나간 후, 진실의 홀에는 블라스코의 직계들과 카티샤만이 남았다.
카티샤는 사바나에서 꺼내 온 환상종들의 교통정리를 하느라 정신을 홀딱 빼고 있었다.
“자, 순서 지켜서 차례차례 올라가!”
초대형 가오리 위에 갖가지 짐승들이 언제 난동을 부렸냐는 듯 얌전히 올라탔다. 그들 중 몇몇은 공작을 알아보고 반갑게 울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자, 이대로 조심히 날아가는 거야. 공작님께 인사하고. 하나, 두울. 감사합니다아-.”
배꼽에 손까지 포개 놓고 꾸벅 인사한 카티샤가 손을 흔들었다.
짐승들을 등에 태운 가오리가 천천히 날개를 펄럭거리며 날아올랐다. 엄청난 강풍이 불어닥쳤다.
“자, 고우 투 홈! 고마워, 얘들아!”
가오리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거대한 형체가 눈 녹듯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존재감을 완벽히 숨긴 가오리는 유유히 공간을 뛰어넘어 그들의 집, 사바나로 돌아갔다.
썰렁한 침묵이 흘렀다.
꿈꾸듯 황홀한 표정의 아르닌이 중얼거렸다.
“난 이제 쟤가 진짜 내 동생이 아니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
저게 작은 블라스코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이야?
티는 내지 않았지만 베르너 역시도 말문이 막혔다.
‘쟨 정말 잃어버린 내 동생일지도 몰라.’
물론 남매에게 친동생은 없다. 둘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역시 할아버님이 키운 게 맞았어.’
감히 누가 사바나에서 공작의 환상종들을 끌어내, 이 엄숙한 진실의 홀을 때려 부술 수가 있단 말인가?
의석과 계단은 제대로 남아 있는 부분을 찾기 힘들 정도로 다 부서져 있었다. 먼지구름이 뽀얗게 일었다. 심지어 조금 전에는 샹들리에도 추락했다. 과격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딱 우리 과야, 쟤.’
남매는 별안간 몹시도 뿌듯해졌다.
‘쟤는 우리 가문에 들어와야 해!’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직도 반파한 홀 한가운데 선 아이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카티샤의 연녹색 눈동자에 아직 다 식지 않은 열기가 남아 반들거리고 있었다.
공작은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뭘 하고 싶길래 그런 부탁을 하나 했더니.”
“헤헤…….”
“이게 조금 어지른 거야?”
“에헤헤…….”
카티샤가 머쓱하게 턱을 만지작거렸다.
스쾨티모르에, 크루어드에, 칸타타에, 삭스네이크……. 위협적인 놈들로만 각별히 선별한 게 틀림없었다. 특히 스쾨티모르는 주인인 그조차 사바나에 풀어놓은 뒤로 몇 번 보지 못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는데.’
공작은 베르너가 보고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사바나 안의 환상종들이 유독 카티샤를 잘 따르더라는 이야기였다.
‘오러의 파장이 희한하다고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데, 환상종들에게도 통했나?’
공작은 의문을 제쳐 둔 채 일단 먼지로 퀴퀴한 홀을 나섰다. 아이를 향해 얼른 따라오라고 손짓하자 카티샤가 콩콩콩 달려와 그의 손을 답삭 잡았다.
“화나셨어요?”
“……안 났어.”
공작은 조금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고 꼬마의 손을 잡고 서재로 돌아왔다.
“이제 편하게 남은 시험 볼 수 있겠죠?”
카티샤가 킬킬거렸다.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나왔다.
아무리 봐도 자신과 닮았고, 베르너와 아르닌이 깽판을 칠 때와 비슷했다. 심지어 저 앞뒤 생각하지 않고 일부터 벌이는 행동력은 헤르젠과 똑 닮았다. 솔직히 블라스코라면, 감명을 받지 않기가 어려울 것이다.
블라스코는 강함을 신봉했다. 마검을 비호하며 대륙의 안전을 수호한다는 사명에 대한 자부심도 높았다. 순혈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를 가주로 추대한다.
강함을 증명하는 수단이 꼭 검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역대 가주들 중 검술 실력보다 다른 분야에 더 뛰어난 이들도 숱하게 많다.
‘대체 아버지는 애를 뭐 어떻게 키우신 거지?’
정말 이쪽 피가 안 섞인 게 맞나? 아버지가 늦둥이를 보신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
공작이 속으로 고심하는 사이, 카티샤는 다시금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요, 공작님.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요. 사바나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또 있어서요.”
“또?”
이 이상 다른 일이 어떻게 더 생길 수가 있지?
“네에…… 저어, 그게.”
카티샤가 양손을 머뭇머뭇 맞잡고 말을 골랐다.
공작은 그 익숙한 손동작을 보곤 무심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세레이나가 자주 하던 습관이군.’
너무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이라, 공작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카티샤가 그의 눈치를 보며 운을 떼었다.
“그게요……. 안에서, 공자님과 공녀님이……”
“또 싸웠어, 걔네?”
카티샤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닌데요. 제가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만날 때마다 말싸움을 하시는 것 같아서.”
더 듣지 않아도 알겠다. 루티어드는 갑갑한 한숨을 토하며 관자놀이를 꾹꾹 짚었다.
“맨날 그래. 대체 왜 그렇게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그 애들은.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죽일 듯이 싸워 대니.”
“근데 제 생각에는, 저어, 서로 말을 안 해서 더 싸우는 거 같은데.”
“……그래서?”
“그래서 제가 두 분을 도와드리면 어떨까 하는데…….”
“어떻게?”
그가 흥미롭게 듣는 티를 내자, 카티샤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언제 눈치를 보았냐는 듯 아이가 조잘조잘 떠들었다.
“일단 차분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요, 언성이 높아지기 전에 적당히 끼어들어서 싸움이 나지 않게 막고, 딱 15분 정도만 속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주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주의를 기울였더니, 한다는 말이 고작 그랬다.
그게 뭐라고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을 붙이지?
의아함에 눈썹을 살짝 찡그렸더니, 카티샤는 그것을 내키지 않는다는 표시로 받아들인 듯했다.
카티샤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물론 제가 두 분의 비밀 이야기를 엿듣겠다는 뜻은 아니고요! 저는 그냥, 공자님과 공녀님이 제게 하시는 말씀의 반의반이라도 서로에게 하시면 금방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냥, 그런…….”
“…….”
“괘, 괜한 참견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할게요.”
공작은 오래 침묵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가 불안해하는 것을 느꼈으나 쉬이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퍼뜩 머릿속을 침범한 탓이다.
“내게 한 이야기의 반의반이라도 형님께 하면 금세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걸요. 내가 장담해요. 그러니 먼저 다가가 봐요, 내 사랑.”
그제야 공작은 몇 분 전, 자신이 무심코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잊기 위해 쌓아 올렸던 바리케이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뜻하지 않게 날것들이 밀려들어 온다. 생생한 목소리와 비밀스럽게 찡끗하던 눈매, 다정한 조언 같은 것들이.
목이 잠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