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72)
72화
* * *
“뭐야, 넌?”
아르닌은 황당한 눈으로 제 방문에 기대고 선 베르너를 바라보았다.
“카티샤는?”
“날 여기 밀어 놓고 가 버렸다. 너랑 화해하라던데.”
“……엉덩이 맴매 맞아야겠네, 우리 카티.”
아르닌이 쳇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어제 열을 냈던 것에 비해선 많이 침착한 모습이었다.
“…….”
“…….”
어색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베르너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카티샤가 일러 준 메뉴얼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사과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녜요, 공자님. 민망해서 괜히 뻗대며 자존심 세우는 게 진짜 꼴사나운 거라고요.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어!”
부드럽게.
진심을 다해, 민망해 얼버무리지 말고.
베르너는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미안하다. 내가 그동안 말 함부로 했던 거.”
“…….”
“난 네 어깨가 그런 줄 몰랐어.”
알았더라면 결단코 그런 망발은 지껄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른쪽이 자꾸 빈다느니, 무기를 꾸밀 시간에 기본 훈련이나 더 하라느니…….
뒷골이 뻐근하게 당겨 왔다.
베르너는 손등으로 눈가를 가리고 깊은 한숨을 지었다.
“……알았으면 그런 사이코 같은 말을 했겠냐? 내가 아무리 머리가 돌이라도.”
“자꾸 그 화제 입에 올리지 마. 쪽팔리니까.”
아르닌이 기운 없이 대꾸했다.
그녀는 어제 공작의 서재로 가던 길에 카티샤가 조잘거렸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언니. 할아버지가 그랬는데요. 가끔은 피하는 것도 능사지만, 사실은 이겨 내고 극복하는 게 정말 건강한 방법이랬어요.”
그 말이 맞는다는 걸 아르닌도 물론 알고 있다. 인정하기 싫을 뿐.
육체가 겪었던 고통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한다. 사고 이후로 몇 년이나 노력했지만, 오른쪽에서 공격을 받을 때 몸이 움찔 굳는 것은 아직도 나아지지 않았다.
‘베르너에겐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멍청이가 땅굴 팔 게 뻔하니까.’
하지만 그래. 이왕 들킨 거, 지금 그냥 다 해치워 버리자.
아르닌은 굳게 마음먹고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내가 어젠 실언을 했는데, 내가 마차에 깔린 건 너 때문이 아냐. 그건 사고였고, 어쩌다 보니까 내가 네 아래로 굴러떨어져서, 그렇게 된 거야. 우연이고, 사고고, 다시는 일어날 일 없는 불운이지. 그러니까 괜히 땅 파지 마.”
“……진짜야?”
“물론, 내가 넋 빼고 있는 널 뒤로 잡아당기긴 했어.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난 너 대신 희생한 게 아니라 그냥 널 구해 준 거야.”
“그게 그거잖아.”
“달라. 야, 생각을 해 봐. 둘 다 팔 부러지는 거랑 한 놈이라도 멀쩡한 거랑 같을 순 없잖아. 난 최선의 선택을 한 거라고.”
“……내가 지긋지긋한 마차 트라우마 때문에 꼼짝도 못 하는 사이에 말이지.”
아르닌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어깨만 들썩였다. 쏟아 내고 나니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반면, 베르너는 뭐라 더 할 말이 없이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그걸 왜 지금까지 말을 안 하고…… 아니, 아니다.’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도 남매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게다가 늘 자신을 이기고 싶어서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아르닌이었다. 그 쇠심줄 같은 자존심에,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었을 리가 없다.
어찌할 바 모르는 베르너를 아르닌이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툭, 나직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공작님 말인데.”
“…….”
“그분은 우리한테 충분히 잘해 주셨어, 오빠. 난 알아.”
어제 수면 위로 끌려 올라왔던 화제의 연장선이었다.
베르너는 길게 침묵했다.
공작은 아주 엄격한 데다 말을 부드럽게 하는 성정도 못 되었지만, 아이들에게 쏟는 관심이 적지는 않았다.
남매가 각각 열 살을 넘긴 뒤로부턴 본인이 직접 검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남매가 저택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달에 한 번은 꼬박꼬박 친필로 안부 서신을 써 보냈다.
“너도 알잖아? 우리를 많이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거.”
“…….”
“나랑 너, 그리고 블라스코를 지키기 위해서 오래 노력해 오신 분이야. 그런 분의 기분을 좀 생각하라는 뜻이었어, 어제 내가 한 말은.”
베르너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공작에게 어엿한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어렸을 때도 이걸로 싸웠지.”
“그래. 오빠 네가 죽어도 그분을 아버지라곤 안 부르겠다며 고집을 부려서.”
아르닌은 빠르게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지만, 베르너는 그게 힘들었다.
‘나는 역시 아직 못 하겠어.’
공작이 미워서는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존경하고, 또 가족으로서 사랑한다. 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카티샤가 부러울 정도였지만, 베르너는 아직도 공작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르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라고는 절대 못 불러.’
그건 꼭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죄를 짓는 일처럼 느껴졌다.
자꾸만 부모님의 얼굴이 희미해지는 게 싫다. 그분들의 얼굴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친동생인 아르닌은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아, 가끔은 화가 났다. 속 편해서 좋겠다 싶었다.
그때, 아르닌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도 우리 아빠 보고 싶어, 오빠.”
“…….”
“엄마도 보고 싶고. 나라고 안 그런 거 아냐.”
베르너는 말문이 막혀 침묵했다.
반대로 꺼질 듯하던 아르닌의 목소리에는 점차 다시 심지가 섰다.
“하지만 이제 나는 어렸을 때처럼 매분 매초 그리워서 울진 않아. 그때 나 네 살이었어. 지금 와선 잘 기억도 안 나. 물론 넌 나보다 두 살 많았으니까 기억하는 게 더 많겠지만.”
“…….”
“하지만 그 대신, 난 먼저 가신 그분들께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거야.”
“부끄럽지 않은…….”
베르너는 가만히 그 말을 입속으로 되뇌었다.
후, 작게 심호흡한 아르닌이 씩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늘에서 우리끼리 이렇게 치고받는 거 보시면 기분이 좋으시겠어? 아닐걸. 아빠가 계셨음 너랑 나 한꺼번에 둘둘 묶어서 공작님 앞에 무릎 꿇렸을 수도 있어. 아빠도 한번 꼭지 돌면 인격이 변했잖아.”
그 말을 듣는데 상황에 맞지 않게도 웃음이 났다.
베르너의 입매가 허물어지자, 아르닌 역시 피실 실소를 흘렸다.
“그러니까 이제 좀 그만 싸우자.”
“…….”
“내가 이렇게까지 했으면 오빠도 한발 물러나 봐, 좀. 공작님 앞에서는 분위기 파악 좀 하고. 어색해 죽겠단 티 내고 있지 말고. 알겠냐?”
“……뭔 말인지는 알겠어.”
베르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티샤에게 속성 과외라도 받아야 하나? ‘공작님께 애교 부리는 법’이라는 강의 제목으로…….
그런 생각까지 하는데, 아르닌이 돌연 눈을 세모꼴로 떴다.
“그리고 너 이 새끼, 한 번만 더 무기 강화하는 헛짓거리 하지 말라고 충고랍시고 던지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허어, 베르너는 종전까지 하던 생각을 싹 지웠다. 그리고 기막힌 헛숨을 토해 냈다.
그는 성큼성큼 동생에게로 걸어가 아르닌의 머리에 꽝 하고 딱밤을 놓았다.
“너 이 새끼? 야, 말본새나 고쳐, 이 망나니야. 어딜 오빠한테. 내가 너보다 2190끼는 더 먹었다.”
“아, 씨. 왜 때려!”
좀 전까지 흐르던 평화로운 화해의 현장은 어디로 가고, 아르닌이 곧장 눈을 치켜떴다.
그때였다.
“우와앙아아! 점심시간이다!”
문이 발칵 열렸다.
주황 머리 꼬마가 이때다 하고 전속력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러곤 어디서 주워 왔는지, 웬 바구니에서 색색의 꽃잎을 한 움큼씩 쥐고 마구 뿌렸다.
“화해한 걸 축하해요, 언니. 그리고 공자님! 와아아! 그럼 우리 이제 호미 주방장님의 특선 코스 먹으러 갈까요? 우와아아, 맛있겠다아!”
온갖 호들갑은 다 떤 카티샤가 아르닌의 왼손과 베르너의 오른손을 각각 잡아챘다. 그러곤 낑낑대며 둘을 문가로 이끌기 시작했다. 그 노력이 하도 가상해, 솟구치려던 짜증도 눈처럼 녹을 지경이었다.
“잘 나가다가 왜 또 주먹다짐으로 번지려고……. 우리 가서 밥 먹어요. 맛있는 거 먹으면 성격이 좋아져!”
“카티, 너 방금 그건 우리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아닌뎅!”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카티샤가 빵긋거렸다. 그 세상 무해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얘기해 보길 잘했네.’
‘성과가 없지는 않군.’
남매는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서로를 흘낏 바라봤다가, 눈이 마주치곤 질색을 하며 각자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그날의 남은 오후는 카티샤의 눈물겨운 노력이 빛을 발해, 거짓말처럼 평화롭게 끝이 났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