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75)
75화
* * *
“누구예요?”
아이가 그렇게 묻는 순간, 공작의 머릿속에 당장 저 애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치고 올라왔다.
공작은 얼굴을 굳힌 채 커다란 보폭으로 걸음을 떼었다.
카티샤가 가까워지는 그를 돌아보았다. 의문이 깃든 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공작님이에요?”
“내가 아니면 누구겠어?”
“아닌데.”
마치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아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다시 초상화를 보았다가, 곧바로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공작은 카티샤의 연한 녹색 눈에 떠오른 분명한 거부감을 읽었다.
달라. 아니야.
인상을 잔뜩 찌푸린 카티샤가 그 말을 밖으로 내뱉기 전에, 공작은 서둘러 아이 앞에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새부리처럼 오물거리는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속으로 의구심을 갖는 것과 말로서 확언하는 것은 의미가 천지차이였다.
“저어 고아임 아잉에…….”
입이 막힌 카티샤가 그의 손바닥에 대고 뭐라 웅얼거렸다. 연녹색 눈에는 이제 억울함이 가득 넘실대고 있었다. 아이가 그의 얼굴과 초상화를 번갈아 가며 마구 가리켰다.
결국 공작은 나직이, 그러나 힘을 실어 내뱉었다.
“그만.”
이런 곳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베르너와 아르닌의 낯은 이미 희게 질려 있었다. 애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전시실의 관리인인 노이먼이 아직 근처에 있다. 사용인들의 귀에 들어가 좋을 게 하나 없는 일이었다.
“카티샤, 알겠으니 이제 그만.”
카티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얼굴을 구겨진 깡통처럼 찌그러뜨렸다. 연녹색 눈에 선명한 반항심이 떠올랐다.
공작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
아이가 타협의 여지 없이 완고한 그의 기색을 읽곤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끄덕끄덕.
그제야 공작은 아이의 입을 막은 손을 떼었다.
저를 곧게 직시하는 맑은 눈망울을 어떻게 마주 보아야 할지 몰라, 그는 시선을 피하는 쪽을 택했다. 이런 쪽으로는 전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뭘 어디까지 눈치챈 거지.’
지난 11년의 세월 동안, 그 누구도 저 초상화 속 인물이 현 가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들켰을 때의 변명도 생각해 둔 것이 없었다.
사실 변명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다. 이 애는 수도에서부터 이미 그를 정확하게 알아본 적이 있다. 어쩌면 그때 이미 이런 순간이 닥치리란 게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카티샤는 여전히 갑갑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작은 검지를 입술에 댔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비밀이야.”
“…….”
“감히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무서운 비밀.”
겁이라도 먹어 보라고 일부러 표정을 굳혀 보았지만 카티샤는 떨지도 않았다. 잠깐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른 웃어 보인 것이다.
“알겠어요.”
“…….”
“비밀!”
아이가 그의 손동작을 따라 제 입술을 검지로 눌렀다. 그제야 공작은 안심했다.
그래. 어린아이 한 명에게 들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터였다.
“……이제 가자. 중요한 내용은 다 설명했으니, 잊어버린 게 있으면 나중에 다시 물어봐.”
“네!”
카티샤가 먼저 그의 손을 잡고 앞으로 이끌었다. 눈치가 빠른 아이니 블라스코의 직계 세 명 간에 맴도는 어색한 기류를 충분히 읽어 냈을 것이다.
공작은 카티샤에게 끌려 한 걸음 내디디면서도 아직 초상화 앞에 머물러 있는 남매를 돌아보았다.
“……가요, 아버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쉰 아르닌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뒤따랐다. 그러나 베르너는 여전히 초상화 앞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카티샤가 듣고 있어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르닌이 다 안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으니 그런 표정 짓지도 마시고요.”
“아르닌.”
“오빠도 금세 따라올 거예요. 걱정하실 거 하나도 없어요.”
아르닌이 공작의 손을 잡지 않은 카티샤의 빈손을 잡았다.
“자, 얼른 가자, 카티.”
아르닌이 앞장서고 카티샤가 따라가자, 결국 공작 역시도 걸음을 떼어야 했다. 쓸쓸하게 고개를 떨구던 베르너가 곧 그들의 뒤를 따랐다.
잠시의 균열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전시관을 나온 뒤로, 카티샤는 몇 시간 동안이나 침울해져 있었다. 아르닌과 베르너는 아이를 데리고 온갖 부산을 다 떨었다.
“카티, 이리 와. 밥 먹으러 가자. 언니가 먹여 줄게.”
“밥…… 아까 먹었는데.”
“그럼 연무장 가자, 꼬맹. 아르닌하고 대련하는 거 제대로 보여 줄게.”
“그래! 언니랑 오빠랑 연무장 가자.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부수고 대련만 할게!”
남매는 카티샤의 양옆에서 조그만 손을 각각 붙잡고 쉼 없이 말을 걸었다. 카티샤의 표정이 영 안 좋은 탓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어색함을 달래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하필이면 그 초상화가 바로 옆에 걸려 있어서…….’
‘오랜만에 보게 된 건 좋은데, 이런 식으로 보고 싶은 건 아니었어.’
남매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푹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대체 얘는 눈치가 왜 이렇게 빠른 거야?’
블라스코의 비밀을 아는 이들은 영령의 탑에 계신 영령들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 공작 본인과 남매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한 명이 더 늘어났다.
카티샤는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베르너와 아르닌조차 현 공작과 초상화 속의 아버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고작 석 달 머무른 어린아이가 단번에 알아챌 수가 있지?
‘우리는 모르는 탐지기 같은 거라도 있나……?’
‘일단 애기 기분부터 풀어 줘야 해. 지금 엄청나게 불만 가득한 표정이야. 다른 사용인들 붙잡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큰일 나.’
남매는 또다시 눈짓을 교환하며 무언의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대련 보는 거 싫구나, 우리 귀염둥이. 그러면 뭐 할까? 아르템 거리 구경 갈까? 너 좋아하는 릴리번트 약재상 갈까?”
“장난감 가게는 어때? 갖고 싶은 거 없어, 카티? 다 사 줄게. 말만 해.”
카티샤는 조그만 입술을 여전히 불만스럽게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베르너와 아르닌의 손에 양손을 다 붙들려 반쯤 끌려가던 아이가 갑작스레 우뚝 멈춰 섰다.
“왜……?”
카티샤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연녹색 눈에 억울함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베르너와 아르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카티샤는 딱 한 글자만 입 밖으로 내었다.
왜?
거의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다음 말을 아이가 힘겹게 삼켰다.
왜 공작님 아니야?
왜 아무도 몰라?
결국 베르너가 먼저 카티샤의 손을 놓았다. 이대로 넘어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베르너는 아이의 앞에 서서,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자세를 낮췄다.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카티샤, 아까 그 초상화 보고 놀란 거 알아. 하지만 각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그건 우리의 중요한 비밀……”
“그래서 아버지 아니야?”
카티샤가 베르너의 말을 끊고 물었다. 베르너는 순간 아연해졌다.
“그래서 공자님 아버지 아니야……?”
꼬박꼬박 붙이던 존대도 잊어버린 카티샤가 혼란스럽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왜인지,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베르너는 하려던 말을 전부 잊어버렸다. 석 달 전 제가 했던 말이 급작스레 뇌리에 떠올랐다.
“그냥, 아버지처럼 느껴지지는 않으니까.”
“그게…….”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베르너는 말을 더듬었다. 아르닌이 붙잡고 있던 카티샤의 손을 놓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황급히 뺨을 훔쳤다.
카티샤가 그것도 모른 채 자꾸만 말을 반복했다.
“그러면, 그러면…….”
결국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이가 눈으로 물었다.
그러면 공자님 아버지는 어디로 갔어?
“그게, 그러니까…….”
“탑으로 갔어요?”
“아니…….”
등을 보인 아르닌이 손등으로 뺨을 몇 번이나 더 문질렀다. 베르너는 탈색된 머릿속을 겨우겨우 가다듬었다.
“편한 곳으로 가셨어. 영원한…… 영원한 안식으로. 자유롭게.”
“…….”
“카티, 이건 비밀이야. 정말, 정말 큰 비밀이야.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
“……아무에게도. 마가렛에게도, 키스 경에게도, 제미언에게도.”
“…….”
“알았지?”
간신히 말을 맺는데 목소리 끝이 떨렸다. 11년 전 이후로 단 한 번도 이 화제를 아르닌이 아닌 누군가에게 꺼내 본 적이 없었다.
저는 이미 다 잊어 간다던 아르닌은 어느새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가만히 베르너를 들여다보던 카티샤가 그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아이는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난 괜찮아.”
베르너는 갈라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괜찮아, 카티. 각하도, 내가 많이 사랑하는 가족이고, 그리고, 존경하는…….”
제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게 무척이나 낯설고 공허했다.
베르너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카티샤의 보들보들한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그만 몸이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맞아. 공자님 괜찮아.”
“…….”
“할아버지도 괜찮아. 공작님도 괜찮고, 언니도 괜차나. 킁…….”
“…….”
“다 괜차나, 크응. 그런데 할아부지가 걱정 많이 했어…….”
균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월이라는 변명으로 외면하고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흙을 잔뜩 가져다 쌓아 놓았을 뿐이다. 아이가 아주 잠깐 들여다보고, 손으로 살며시 쓸어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드러나는 연약한 위장에 지나지 않았다.
끝없는 비극의 틈새는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너무도 선명하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