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76)
76화
* * *
그날 밤, 공작은 다시금 역사 전시관을 찾았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라 관리인 노이먼도 퇴근한 지 오래였다.
그의 손에 든 등불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묵직하게 흔들렸다. 어둑한 저택을 비추는 한 갈래의 불빛이 그 움직임에 맞춰 일렁거렸다.
공작은 복도 끝까지 걸어 나갔다.
그리고 초상화가 바로 보이는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었다. 오늘 오후 카티샤의 손에 떨어져 나간 덮개는 여전히 아무렇게나 떨어진 모양 그대로였다.
“…….”
공작은 커다란 초상화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신과 꼭 닮은 이목구비를 천천히 타고 올라가, 비슷한 채도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오랜만이네, 형.”
나직한 인사를 건네며, 그는 초상화 옆의 작은 그림에 흘끗 시선을 주었다. 꼬마 베르너와 꼬마 아르닌이 부모의 품에 안겨 말갛게 웃고 있었다.
몇 시간 전, 아무래도 첫애가 걱정되었던 공작은 결국 베르너를 서재로 불렀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봐서 당황했을 뿐이에요. 아까 카티가 위로해 주기도 했고요.”
베르너도 아르닌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릴 때와는 달리 아이들은 이제 그 못지않게 속내를 감출 줄 알았다. 그래서 표정만으로는 읽어 낼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최근에 카티샤 덕분에 아르닌과 옛날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제가…… 그동안 부모님을 편히 보내 드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베르너.”
“하지만 이제 앞으로 나아갈 때인 것 같아서, 노력해 보려고요.”
그리움이 옅어졌다?
공작은 생소하게 그 표현을 되뇌다, 선선히 납득했다.
‘애들은 그럴 수 있지. 고작 여섯 살, 네 살이었으니까.’
오늘은 성냥을 들고 오지 않았다. 태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두 점의 그림은 블라스코에 유일하게 남은 형제의 흔적이었다.
‘아……. 아닌가.’
입술 틈을 비집고 실소가 새어 나왔다. 아니다. 반대였다.
사실 블라스코의 전부가 다 형의 것이다. 유일하게 외따로 떨어진 것은 그 자신이었다.
아버지는 11년 전 그의 선택에 크게 반발했다.
“네 그런 선택 따위는 존중할 마음 없다. 루티어드도 그딴 걸 바라지 않을 거고. 하물며 세레이나는?”
“세레이나는 안전한 곳으로 미리 피신시켰습니다. 어차피 아버지도 종종 혼동하실 만큼 형과 저는 닮지 않았습니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겁니다. 지금 황실과 오르겐 후작가에 약점을 내보이지 않으려면 그 방법이 최선입니다.”
“이 썩을 놈아. 나는 블라스코보다 내 새끼들이 먼저란 말이다!”
엄격한 말투나 표정과는 다르게 속정이 깊던 아버지였다. 헤르젠은 언제나 가문의 위신이나 사명보다는 당신의 울타리 안의 사람들을 더 우선시했다.
“한 번 황실에 굽히고 들어가면 그만이다. 잠깐 굽히고 훗날을 도모한다고 큰 흠이 되진 않아. 역사에는 무능한 가주로 남겠지.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이냐?”
“그래서 형을 죽인 놈들에게 고개를 조아리라고요? 차라리 죽고 말지, 저는 절대 그렇게 못 합니다.”
헤르젠은 꽤 오랫동안 둘째 아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원점 근처만을 맴돌았다.
“나는 말이다, 루테. 하나 잃은 것만으로도 족해. 남은 너까지 잃어야겠느냐, 내가?”
“죽지만 않으면 됐죠.”
“네 모든 걸 숨기고 하나부터 열까지 루티어드를 흉내 내야 할 텐데. 네가 그러겠다고? 네 성정에? 세레이나까지 숨겨 가면서? 웃기지 마라…….”
결국 부자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치기 어린 젊은 시절의 그는 당연히 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여겼다. 반면 헤르젠은 그 꼴을 보느니 내가 나가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대쪽 같은 성격이 서로 꼭 닮아, 결과는 뻔했다.
“제대로 산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전까진, 평생 내 옷깃 한 자락 못 볼 줄 알아!”
공작은 길고 착잡한 한숨을 흘렸다.
결국 그는 가문을 우선시한 대가로 평생에 하나뿐이었던 연인을 잃었다.
그제서야 돌아보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목에 서 있었다. 악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옛말에 어른 말씀은 틀린 게 없다고 했던가? 공작은 그 말을 지난 11년 동안 아주 조금씩 깨달아 갔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라고 여겼으나, 사실 그는 루티어드와 세레이나를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매일 매분 매초, 그를 그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전히 후회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후회하는 순간 지금껏 복수를 위해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이 의미를 잃고 퇴색할 테니까.
그저 아주 가끔씩 공허했을 뿐이었다.
‘그것마저도 최근 몇 년은 괜찮았는데.’
오늘 있었던 예기치 못한 일이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답지 않게 감상에 빠져 있기나 하고.
공작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러다 문득, 복도 저편에서 나는 작은 소음을 들었다.
바스락바스락.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나는 몇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깨어났다.
‘졸려…….’
잠기운과 싸우며 한참이나 이불을 휘감고 뒤척거렸다.
저녁 내내 공자님과 언니에게 번갈아 안겨서 훌쩍거린 탓인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잠든 것 같았다.
내가 꿈질거리자 옆에서 작은 손이 불쑥 나타나 뺨을 도닥도닥 쓰다듬었다. 아이칼이었다.
“더 자, 카티.”
“으응…….”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시간은 많이 지난 것 같은데 충분히 자고 일어난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꿈도 이상한 거 꿨어…….’
처음에는 아까 한참이나 끌어안고 훌쩍거렸던 베르너와 아르닌이 나왔다. 둘 다 나보다도 더 어린 모습이었다. 그들은 어느 묘비 앞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나는 그 서글픈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어딘가로 휙 날아갔다.
어둠 속에 까만 관이 하나 나타났다. 관을 덮은 주황색 공단에는 황금빛 모래가 잔뜩 묻어 있었다. 나비 문양이 없는 걸 보니 블라스코의 관은 아니었다.
그 관 앞에 공작님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한참 올려다봤다. 온몸을 짓누르는 충격과 잔인한 현실의 무게에 숨도 못 쉬는 것 같은 그 얼굴을.
그러다 나는 또 어딘가로 휩쓸려 갔다. 이번에는 블라스코의 푸른 나비 문양에 감싸인 헤르젠 할아버지의 관이었다. 그쯤 되니 형체 없는 작은 홀씨 같았던 내게도 지금의 몸이 생겼다. 나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눈물 콧물을 다 빼고 있었다.
장면은 또 바뀌었다. 다시 공작님이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명이었다. 공작님과 공작님인 척하는 사기꾼이 내 앞에 척 버티고 섰다. 그러고는 갑자기 싸워대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루티어드다!”
“뭐라는 거야, 이 사기꾼이? 내가 진짜 루티어드다.”
“흥, 오렌지는 누가 진짜인지 단번에 구분할 수 있을걸!”
“아이에게 책임을 떠넘기다니, 명예롭지 못한 놈. 카티샤는 당연히 나를 선택할 거다. 내가 쟤 아빠거든!”
그렇게 둘이 옥신각신 싸워 대는 통에 나는 꿈에서 쿨쩍거리던 것도 잊고 정신을 홀딱 뺐다. 나는 멍하니 두 명의 공작을 번갈아 보다, 양 뺨을 부여잡고 꽥 소리를 질렀다.
“도플갱어다-!”
그리고 내게 진짜 아빠를 고르라며 쫓아오는 공작들을 피해 도망쳤다. 그러다가 꿈에서 깼다.
‘이게 뭔 개꿈이야……?’
우스꽝스러운데 슬프고, 슬픈데 우스꽝스러웠다. 이게 뭐야.
나는 한참을 이불 밑에서 뭉그적거리다가, 결국 아이칼을 안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졸려…….’
그래도 나는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발이 향하는 곳은 오늘 낮에 다녀왔던 블라스코의 역사 전시관이었다. 그곳에서 봤던 초상화가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공작님이 자꾸 생각났다.
“누구세요?”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를 보던 그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듯 어쩔 줄 모르는 얼굴. 나는 그렇게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흘러나온 공작의 얼굴을 처음 봤다.
‘아까, 공자님이랑 아르닌 언니도 똑같은 얼굴을 했어…….’
그래서인지, 이상하게도 지금 당장 가 보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직감이 서재가 아니라 역사 전시관으로 날 이끌었다.
‘내가 짐작한 게 맞는 거라면.’
그렇다면 진짜 공작님 옆에는 아무도 있어 주지 않은 거잖아. 11년 동안이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