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77)
77화
한여름의 새벽 공기가 적당히 훈훈했다. 비몽사몽 나오느라 신발을 챙겨 신지 않은 맨발에 부드러운 잔디가 사박사박 밟혔다.
나는 자꾸만 깜빡깜빡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전시관의 문고리를 잡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불이 모두 꺼진 내부는 사위를 구분할 수 없이 새카맸다. 아이칼이 꼬리로 내 발목을 휘어 감고 빛 한 점 없는 칠흑 속을 앞서 나갔다.
나는 앞을 보려는 시도를 접고 새끼 눈표범에게 의지해 전시실을 걸어 나갔다. 그렇게 코너를 돌자, 마침내 희미하게 일렁거리는 빛이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촉수가 낮은 등불이 어른거렸다.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아이칼을 안아 들고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등불이 비추는 복도에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공작님…….”
내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공작이 곁눈질로 나를 확인했다.
“카티샤.”
“으응…….”
“왜 안 자고 여기까지 왔어. 이 밤중에, 도둑고양이처럼.”
힐난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평소 나를 대하는 음성과 별다른 음조의 차이도 없었다.
“그냥요……. 잠이 안 와서…….”
“어딜 봐도 한창 자다 깬 얼굴인데?”
“아닌데…….”
평소와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목소리인데, 왜 지금은 이렇게 공허하게 느껴지는 걸까?
나는 눈곱을 문질러 떼고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공작과 똑같은 자세로 벽면의 초상화를 올려다봤다.
“저거, 덜 예뻐.”
자꾸 하품이 나와서 말이 반 토막 났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중얼거렸다.
“수도에서 본 그림이 더 예뻐요. 저는 그게 더 좋아…….”
사실 너무 졸려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도 분간이 안 됐다.
공작이 조금의 틈을 두고 물었다.
“저 사람은 싫어?”
고개를 흔들었다. 재차 질문이 날아왔다.
“그럼?”
“싫은지 좋은지 몰라요. 저는 모르는 분인걸…… 흐하암…….”
“…….”
“하지만 할아버지 아들이니까 저분도 틀림없이 좋은 분이실 거야…….”
좋은 사람들의 가족이니까. 루티어드 님도 분명히 엄청 멋진 분이셨겠지. 나는 겨우 그렇게 웅얼거렸다.
참을 수 없이 잠이 온다. 어쩔 수 없이 여기에서라도 눈을 좀 붙이고 가야 할 것 같았다.
‘아까 아이칼이 그냥 자라고 쓰다듬어 줄 때 들을걸…….’
나는 비몽사몽간에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새끼 눈표범이 내 발등을 따스하게 덮었다.
“……내가 말했던가.”
공작의 조용한 목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딱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죽었고 다른 한 명은 나를 떠났지.”
후자는 헤르젠 할아버지를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전자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 시기상 그의 죽은 형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 뒤로는 10년 동안 아무도 없었는데…….”
“…….”
“너는 뭘까.”
나는 카티샤인데. 우리 할아버지가 키운 꼬마인데…….
“나는 이 생각을 요즘 다시 하게 돼. 너는 뭘까?”
공작이 깊은 눈으로 거의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나를 들여다보았다.
“아버지는 왜 너를 내게 보내신 걸까. 무엇을 깨달으라고.”
“…….”
“처음에는 제대로 된 아버지 역할을 해 보라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수마에 반쯤 깔린 시야에 또다시 두 명의 공작님이 아른거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허상이 아닌 진짜를 잡았다.
“저 공작님 이름 알아요.”
“…….”
“루테…….”
“…….”
“루테 아르텐사 블라스코.”
마가렛에게 들었다. 오래전에 죽어 일평생 도련님으로만 남았다던 헤르젠 블라스코의 차남, 그의 풀 네임.
나는 공작의 오른팔을 꼭 끌어안고 가물가물 중얼거렸다.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코끝이 시큰거렸다.
“이제 내가 불러 줄 거야.”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라도 원래 이름으로 불러 줄 거야. 무슨 사정이 있는지, 왜 원래의 자신을 버렸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많이 불러 줄 거야.
멋진 이름이 불리지 못하고 비석 밑에 묻혀 사라지는 건 너무 슬프니까.
침묵이 흐르고, 이윽고 머리 위에서 허탈한 실소가 들려왔다.
“……그래.”
내가 가득 끌어안았던 그의 팔이 부드럽게 나를 떼어냈다. 불편하게 쪼그렸던 몸이 공중으로 붕 들려 올라갔다. 나는 어느새 무척 익숙하고 편안해진 품에 안겼다.
공작이 내 등을 느리게 쓸어내리며 작게 속삭였다.
“내 이름을 찾으라고 너를 내게 보내셨나 보다, 아버지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이 응축된 목소리가 지독하게 낮고 거칠었다.
아무도 진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삶이란 어떤 걸까. 평생 벗지 못할 가면을 쓰고 살아갈 각오를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다 알지는 못해도 그 적막한 일면이나마 엿본 느낌이었다.
나는 결국 반쯤 눈을 감고서도 훌쩍거리고 말았다.
‘할아버지, 이제 걱정 안 해도 돼요. 내가 아니까.’
꼭 시험 잘 봐서 공작님 옆에 있을 거야. 언니도 공자님도 많이 슬퍼하지 않게 위로해 줄 거야. 내가 여기 있을 거야…….
나는 몸을 꾸물거려 편한 자세를 찾았다. 공작의 어깨에 빵빵한 뺨을 짓누르자 더 이상 반항할 수 없는 졸음이 들이닥쳤다.
나는 등을 가만가만 토닥거리는 손길을 느끼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블라스코 역사 전시관에 다녀온 뒤로 며칠이 더 지났다.
어느덧 세 번째 시험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간 [지.우.마>와 블라스코의 역사를 음소 하나하나까지 탈탈 털어 분석한 나는 이제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선대 영령들께서 날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지만, 일단 현장 사전 조사는 필수지.’
오늘의 내 가이드는 베르너였다.
“안녕하세요, 공자님!”
“응, 안녕.”
전시관에서 뜻밖에 블라스코의 비밀을 마주친 날 이후로, 우리 넷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모두 그 화제를 모른 척 묻어 두었고, 나도 굳이 다시 파헤치지 않았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나는 베르너의 손을 잡고 본저의 북동쪽에 있는 영령의 탑으로 향했다. 아직 들어갈 수는 없고, 탑의 외관과 그 주변의 정원을 미리 둘러보기 위함이다.
‘공작님이 데려가 주실 줄 알았는데.’
나는 조금 우울하게 생각했다. 영령의 탑에 미리 가 보고 싶다는 내 부탁을 들은 공작은 잠시 고민하다, 베르너를 불러 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직접 데리고 가 주셨을 텐데. 기분이 한없이 울적해졌다.
‘나 실수했나 봐…….’
며칠 전에 꾸벅꾸벅 졸며 역사 전시관까지 가서 대판 실수한 게 분명했다.
공작님 이름은 입 밖에 내면 안 되는 무서운 비밀이라고 했는데, 내가 멋대로 부르겠다고 해서. 그래서 기분이 안 좋으셨나 봐.
‘……아니야!’
나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래도 몰래몰래 부를 거야. 공작님이 자기 이름마저도 까먹어 버리지 않게.
영령의 탑으로 가는 길에, 베르너가 차분하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영령의 탑으로 들어가려면 탑을 둘러싸고 있는 세월의 정원을 통과해야 해. 아마 거기서부터 영령들께서 널 지켜보실 거다.”
“어떻게요?”
“그곳에 영령들의 눈과 귀가 있거든.”
가주 외에는 접근조차 금지된 영령의 탑과 달리, 세월의 정원은 출입이 규제되어 있지 않았다.
탑을 둘러싼 정원은 웬만한 저택의 중앙 후원만큼이나 넓었다. 한쪽에는 미로 정원이 꾸며져 있었고,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는 대리석 벤치와 분수대도 있었다. 잘 다듬은 꽃 덤불과 수목들 사이사이, 역대 가주들의 동상이 서 있었다.
어떤 동상은 가슴까지만 잘라진 흉상이기도 했고, 전신의 움직임을 생생히 표현한 전신상이기도 했다.
‘우와. 꼭 진짜 같다.’
무기를 제련하는 섬세한 일을 하는 집안이라 그런가? 중앙은행의 귀어스트 석상도 그렇고, 이 동상들도 그렇고. 하나같이 꼭 진짜처럼 생동감 넘쳤다.
아직 헤르젠 할아버지의 동상은 완성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대신 나는 미로 정원 입구 안쪽에 있는 어느 귀부인의 흉상에 가까이 다가섰다.
‘엄청 미인이시다……!’
베르너가 곤란한 신음을 냈다.
“음……. 그렇게 너무 얼굴을 들이밀지는 않는 게 좋을걸, 카티샤.”
“왜요?”
“그게 탑 안의 영령들께서 밖으로 목소리를 내시는 창구야.”
“……?”
“그러니까, 영령들께선 탑 밖으로 나올 수 없으시잖아. 그러니 후계들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을 때 그런 동상들의 입을 빌리신다고.”
그 말에 나는 퍼뜩 원작을 떠올렸다.
‘맞다, 분명히 그런 설명이 있었다!’
베르너가 검지로 내 발밑을 가리켰다.
“지금 네가 밟고 있는 그곳, 그러니까 동상 바로 밑에, 관이 묻혀 있거든.”
관? 나는 어벙하게 베르너를 쳐다보다, 사색이 되어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방금까지 내가 밟고 서 있던 곳에 뭐라 글자가 새겨진 납작한 비석이 붙어 있었다.
등골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설마 이게 비석은 아니겠지.’
주위를 둘러보니 가주들의 동상마다 이것과 비슷한 황금 푯말이 붙어 있었다.
“아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걸. 세월의 정원은 역대 가주들의 관이 묻힌 거대한 묘지야.”
베르너가 발끝으로 제가 딛고 선 땅을 톡톡 쳤다.
“영령이 마검의 힘을 빌려 육체가 잠든 곳에 일시적으로나마 깃들 수 있도록, 가주들의 관은 예외 없이 이곳에 안치된다. 그리고 그 위에 신체의 일부를 녹여 만든 동상을 세우지. 영령의 음성을 구분하기 편하도록 말이야.”
나는 당장 발꿈치를 들고 발끝으로 섰다. 어쩌면 아직도 불경하게 관을 밟고 있는 걸지도 몰라!
“기분이 나시면 가끔 말을 걸어오기도 하시는데, 오늘은 어쩐지 잠잠……”
베르너가 막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내가 방금까지 유심히 들여다보았던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네가 헤르젠의 아이로구나?]기품 있는 귀부인의 목소리였다.
나는 깜짝 놀라 다시 흉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흉상의 입술이 품위 있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일자로 무표정하게 다물고 있던 입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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