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8)
8화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건 헤르젠 할아버지가 직접 하신 말씀이기도 했다.
“할아버지, 수도에는 정말 한 번도 안 가요?”
“내가 뭔 꼴을 보려고 거길 간다냐? 가 봤자 속만 뒤집어질걸.”
“보고 싶지 않아요? 아들도 있고 손주들도 있다면서.”
“보고 싶기야 하지. 하지만 가서 보는 게 더 마음 쓰려서 안 간다.”
“그치만…….”
“뭐, 어차피 언젠가는 거기로 돌아가기도 할 테고. 때가 오거든 다시 안 보겠냐? 그리고 카티 네가 자식새끼들 세 명분은 거뜬히 하니 됐다.”
어쩌면 헤르젠 할아버지는 친자식과 친손주들이 그리운 마음에 대신 나를 키운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쉽다거나 한 건 아니다. 하지만 가끔 할아버지가 무척 쓸쓸한 눈을 하시는 걸 보면, 괜히 나까지 마음이 시큰거리곤 했던 것이다.
나는 포크질을 하며 공작을 흘끔거렸다.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받았으면 한 번쯤 와 주지…….’
공작은 내 표정에서 이미 속으로 삼킨 말을 읽어 낸 모양이었다. 그가 오른손으로 나이프를 돌리며 무뚝뚝하게 못 박았다.
“얼굴 한 번 본다고 메워질 골이 아니었다.”
“…….”
“블라스코를 내팽개치고 간 건 아버지야. 버림받은 쪽은 이쪽이고.”
한발 물러날 생각은 조금도 없는 듯했다.
하기야, 그럴 수 있다. 가족이라고 모두 끈끈한 유대감을 가진 건 아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격언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불과했다. 당장 전생의 나만 해도, 내게 사채 빚을 뒤집어씌우고 돌아가신 친아빠에게 그 어떠한 인간적인 감정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블라스코 공작에게 내 존재는, 마치 친아빠가 내게 떠넘겼던 3억의 빚 같은 걸까?’
무책임한 부모가 내맡기고 간 달갑지 않은 유산처럼 말이다.
공작이 비딱하게 고개를 틀었다.
“자식도 손주도 내버리고 종적을 감춘 인간이 애지중지 키운 꼬마라……. 노인네가 아낀다고 하니 이걸 확 내버릴 수도 없고.”
“아, 저라도 그러고 싶겠어요.”
“뭐?”
“저도 이해해요. 얼마나 없애 버리고 싶을까…….”
생각만 해도 앞이 캄캄해지던 3억의 빚을 떠올리니 절로 아련해지는 한편,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울분을 토해 냈다.
“아주 멱살을 잡아 짤짤 흔들고 싶으시겠죠! 공중 분해되었으면 소원이 없겠고. 욕이라도 시원하게 날리고 싶으실 거고, 눈 감고 입 닫고 나 몰라라 배 째고 싶으실 거예요. 그렇죠?”
공작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뭐. 그 정도까지는…….”
“너무 걱정 마세요. 상속 문제만 잘 해결하면 금방 떠나 드릴 테니까요!”
그리고 그 문제의 로켓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때까지만 신세 져야지.
공작은 이제 아주 기묘한 것을 보듯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어제는 깔끔하게 상속 포기하겠다더니. 하룻밤 사이에 야망이 생겼나 봐?”
“제 야망은 처음부터 별거 없었어요. 텔파에 있는 헤르젠 할아버지의 3층집, 그거 하나만 주시면 되는데…….”
“그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공작은 아주 재수 없게 나와 할아버지의 보금자리를 모욕했다.
“그걸 누구 코에 붙여? 두 발 뻗곤 자나?”
“……저 같은 꼬마 서른 명은 들어갈걸요.”
이 대기업 회장님 같은 사람……. 마차 삯이 얼마나 하는지도 모를 아주 가증스런 인간이야.
내가 썩은 표정을 짓자, 뭐가 웃긴지 공작이 피식 실소했다.
‘어?’
나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보는데……?’
내가 벌써 댓 번은 본 비웃음 섞인 사악한 미소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편안하고, 시원스러웠다.
흉흉한 표정과 험한 말투에 가려져 있던 미모가 그제야 빛을 발했다.
그 확연한 변화에 얼이 빠진 사이, 공작이 키득거리며 손등에 비스듬히 턱을 괴었다. 여전히 시선은 내게 고정한 채였다.
종전과는 달리 장난기과 흥미가 섞인 눈으로, 그가 툭 물었다.
“넌 정말로 내가 안 무섭나 보다. 처음 봤을 땐 오들오들 떠느라 바쁘더니.”
“……솔직히, 아주 조금은, 좀…….”
나라고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악명이 좀 드높은가? 하지만…….
나는 힐끔 공작의 눈치를 보았다. 여전히 그의 얼굴 근육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용기를 내 보았다.
“그래도…… 할아버지 자식이시니까…….”
“…….”
“그리고…… 방도 너무 좋고요. 인형들도 너무너무 귀엽고. 밥도 맛있고. 어, 욕도 안 하시고. 때리지도 않으시고…….”
“때려?”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공작이 눈을 홱 치켜떴다. 머리 뒤에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던 보기 좋은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날카로운 질문이 우르르 떨어졌다.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때려? 누가? 왜? 아버지가? 널?”
“아니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헤르젠 할아버지는 가끔 지팡이로 내 뒷덜미를 낚아 올리거나 빗자루로 엉덩이를 팡팡 두들기는 것 외엔 나를 체벌한 적이 없으셨다.
그러니 얼마나 복 받은 인생인가? 1회 차의 삶에 비하면.
나는 불쑥 떠오른 새아버지의 기억을 꾹꾹 누르며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진짜 무서운 건 그런 건데, 공작님은 안 그러시니까…….”
공작의 말씨가 다정하다곤 절대 말 못 하지만, 그래도 블라스코의 사람들은 내게 일관적으로 상냥했다.
주인의 태도는 아랫사람들에게도 옮겨 간다. 공작이 정말로 내게 적대적이었다면 제미언과 마가렛, 호미 아저씨를 비롯한 공작가 사용인들이 나를 따스하게 대할 리가 없었다.
내게 주어진 침실도 마찬가지다.
내 방은 선반과 탁자마다 포근하고 아기자기한 오브제들이 가득 차 있었다. 방의 크기가 크면 황량한 분위기가 나기 십상인데, 전혀 그런 느낌이 없는 것을 보면 아무 골방이나 툭 내준 게 아닌 것이다.
심지어 도착한 다음 날이 되니 텅 비어 있던 옷장마저도 빽빽하게 차 있었다.
상냥한 사람들, 딱 나만 한 어린아이에게 맞추어 준비한 방, 호사스러운 식사와 고급스러운 옷가지들까지.
‘아무리 봐도 눈엣가시를 대하는 태도가 아닌 것만 같으니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헤르젠 할아버지를 대하듯 공작을 보는 건지도 모른다. 못마땅하게 투덜거리실지언정, 결국 어떤 어리광이든 다 받아 주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그런 걸 바라면 안 되는 거겠지만.’
공작이 내게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고, 이 집 사람들이 내게 친절하다고 해서 상황이 내게 우호적이라는 건 아니었다.
단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내가 뭐라도 된 양 착각하고 거만해지면 안 된다.
그러니 나는 눈치를 잘 살피고, 공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노력하는 동시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새벽까지 뒤척여 가며 떠올린 답은, 아무래도 공작이 직접 언급했던 ‘시험’에 있었다.
그 화제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속으로 궁리하는데, 뜻밖에도 공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블라스코는 시험을 아주 좋아한다.”
나는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공작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길게 뻗은 눈매가 품은 새파란 눈동자는 무심한 동시에 끝 모르게 깊었다.
공작의 목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가주 결정전, 직계 입적 시험, 사업부 총괄 책임자 선발 시험 등등. 무슨 일이건 대표자나 적임자를 선정할 때는 후보들을 대상으로 자격을 시험하는 절차가 반드시 선행되지. 우수할 뿐만 아니라 각 건에 가장 적합한 엘리트를 발탁하기 위함이다.”
원작에 서술되어 있던 설정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았다.
“모든 시험은 가문 회의를 통해 결정된다. 방계 쪽에서는 당장 소집령을 내리라고 주장하더군. 카티샤 아인슬리의 ‘처분 방안’에 대하여 가문 회의가 열릴 수 있도록 말이지.”
바로 어제 읽었던 내용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니엘라 역시 사방이 적이었다. 블라스코의 직계들을 비롯해 방계들까지도. 하마터면 거기서 즉결 처분을 당할 뻔하지 않았는가?
온몸이 살얼음 낀 호수에 처박힌 것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그 순간, 공작이 나를 냉탕에서 건져 냈다.
“하지만 네겐 다행스럽게도, 난 어린것 욕하고, 때리고, 죽이는 취미는 전혀 없거든.”
도덕관념이 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당연할 그 발언에 바보 같게도 나는 안도했다.
그러나 공작은 곧바로 선을 그었다.
“하지만 자격 미달자에게 중요한 유산을 넘기는 것도 탐탁지 않지. 그러니 한마디로, 지금 아주 처치 곤란이라는 말이야, 너.”
“그러면…….”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때다!
“그러면 저에게 기회를 주시면 안 돼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그 시험뿐이었다. 니엘라가 입적 시험을 쳤다면, 내 경우엔 상속 시험일 테다.
허리를 꼿꼿이 폈다. 눈에 힘을 주고 나를 직시하는 공작의 시선을 받았다.
“저 죽기 싫어요. 어떤 식으로도 ‘처분’당하고 싶진 않아요.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할아버지도 그런 걸 바라진 않으실 거예요.”
“그래서?”
“그러니까 저도 시험 볼래요.”
공작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나를 빤히 보았다. 푸른 유리알 같은 그의 눈에 하얗게 경직한 내 모습이 비쳤다.
정적이 이어지는 가운데 공작이 길쭉한 검지로 테이블을 일정하게 두드렸다.
탁, 탁.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무언가를 재어 보고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이내 공작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러나 뚱딴지같은 말이었다.
“가문 회의에서 입김이 가장 센 쪽은 직계지. 최종 결정권이 직계들에게 있으니까.”
현재, 블라스코의 직계는 세 명이다. 공작과 그의 아들딸, 공자와 공녀.
“보름 뒤, 가문 회의를 소집할 거다. 그때까지 베르너와 아르닌을 잘 설득해 봐. 그 애들을 네게 유리한 쪽으로 편입시킬 수 있다면, 내가 도와주지.”
“어떻게 도와주시는데요……?”
“네가 상속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회의의 분위기를 이쪽으로 끌어와 주겠다. 그러면 적어도 시험을 치르는 동안만큼의 시간은 벌겠지.”
“아.”
“그사이 선대의 영령께서 깨어나시면, 귀어스트와 재합의를 거쳐 후계를 바꾸는 쪽으로 시도해 볼 수 있을 테고.”
인식하지 못한 사이 입술이 벌어졌다. 실로 완벽한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블라스코 직계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유산은 유산대로 상속받고, 마검의 후계자가 되는 것은 유예할 수 있는, 상속 시험의 티켓을 따낼 수 있는 것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