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80)
80화
“공작님은 어디로 가셨어요?”
“아버지는 안 오시겠대.”
“네?”
아르닌이 저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세월의 정원 근처에 잘 안 오시기는 해. 그리고 뭐…… 할아버님이 보고 싶지 않으실 수도 있고.”
“그렇구나…….”
어쩐지, 어제 의미심장한 말투로 내게 잘하고 오라며 격려하더니. 처음부터 배웅은 안 해 주실 생각이었나 보다.
이제 내가 좀 껄끄러워지셨나 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축 늘어졌다.
‘역시 부담스러웠던 거야. 난 공작님 속사정도 잘 모르는데.’
헤르젠 할아버지를 만나면 정확하게 물어봐야겠다. 대체 11년 전에 이 가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나는 공작의 서재가 있을 저택을 돌아보며 손을 높이 흔들었다. 다녀올게요!
“자, 여기 손을 올려, 카티.”
아르닌이 내 손을 직접 잡아다 탑의 외벽으로 가져갔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무언가 손끝에 걸리는 느낌이 났다. 아주 유연하고 촘촘한 그물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듯했다.
“어, 어?”
내 손끝에서 무언가가 희미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오러였다.
노을색 오러가 보이지 않는 벽 너머로 스며들었다. 쩌엉 하는 소리와 함께 탑을 둘러싼 결계가 크게 요동쳤다.
“들어가, 카티.”
아르닌이 내 어깨를 떠밀었다. 베르너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휘휘 저어 주었다.
그 손길에 용기를 얻어 막 결계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강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말랑하던 결계가 순식간에 유리벽처럼 단단하게 변했다. 나는 벽에 이마를 쾅 얻어맞고 뒷걸음질 쳤다.
“아야야…….”
“카티, 괜찮아?”
아르닌이 놀라 나를 돌려세우고 이마를 확인했다. 눈앞에 별들이 날아다녔다.
베르너가 금방 원인을 찾아냈다.
“아무래도 저 눈표범이 원인인 것 같은데.”
“아.”
그렇구나. 신수라도 탑에 허락받지 못한 존재인 건 마찬가지지.
내가 저를 내려놓으려는 것을 안 아이칼이 발톱을 세웠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새끼 눈표범을 안은 채 어정쩡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키, 괜찮아. 이 안에는 우리 할아버지가 계신다니까.”
내 소맷자락을 이로 꽉 문 아이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푸른빛이 번진 은회색 눈동자에 고집이 가득했다.
나를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떨어져 있기가 싫은 건지…….
크르르……. 낮게 으르렁대는 아이칼의 몸에서 작은 눈가루가 떨어졌다. 인간화하려는 신호였다.
나는 기겁해 얼른 아이칼을 꼭 끌어안았다.
“스톱, 스톱! 안 돼!”
아르닌과 베르너가 지켜보는 와중에 아이칼의 정체를 들켜 버리면 이 무슨 재앙이란 말이야. 심지어 안에 데리고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나는 침착하게 아이칼의 등을 쓸어 주었다.
“자, 아키. 딱 열 밤만 혼자 자는 거야.”
도리도리.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지금 너를 데리고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오히려 나를 더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야.”
도리도리…… 멈칫.
“내가 허락받지 못한 자를 탑에 들였다고 영령들께 분노를 사면 어쩔래? 그럼 나는 살 곳도 없고, 유산도 못 챙기고, 알거지가 되어서 당장 몸 누일 곳도 없이 거리로 쫓겨날 텐데?”
침묵.
“여기서 나가면 우리 갈 곳 없어, 아키. 어디 못된 고용주의 집이나 남의 가게에서 걸레질하고 설거지나 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한다고. 너 날 그렇게 살게 할 거야? 나는 그렇게는 못 살아.”
다시는 그렇게 안 살 거야.
내 강렬한 소망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쏘아져 나왔다. 이제 아이칼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 이제 채찍을 주었으니 당근도 제시할 때다.
나는 태도를 싹 바꿔 아이칼을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 혼자 잘 버티면, 앞으로 네가 아침마다 날 이불로 꽁꽁 말아 놔도 뭐라고 안 할게.”
아이칼의 귀가 슬그머니 위로 솟았다.
“그리고 네가 원할 때마다 언제든 안아 줄게.”
가로로 미친 듯이 흔들리던 꼬리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아무래도 이놈은 정말로 나를 이동 수단으로 여기는 게 분명해.
나는 아이칼의 두 발을 꼭 쥐고, 결연하게 마지막 당근을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나 들어줄게. 뭐라도 상관없어.”
마침내 아이칼의 그르렁거림이 잦아들고, 귀가 눈에 띄게 쫑긋거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눈표범의 두 앞발을 풀밭에 고이 내려 주었다.
“그럼 딱 열흘 동안만 잘 있는 거야?”
사실 열흘씩이나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것일 뿐. 실제로는 이삼일이면 끝나겠지?
아이칼이 딴소리를 하기 전에, 나는 후다닥 그를 아르닌에게 안겼다.
“제 방에 데려다주세요, 언니. 얘가 성격이 썩 좋진 않아서, 굳이 놀아 주실 필요는 없고, 저택을 돌아다녀도 그냥 그러려니 하시면 돼요. 얘가 성질머리가 좀 있어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니라서요……. 제때 밥만 주면 돼요!”
다행히 내 제안이 꽤 구미가 당겼는지, 아이칼은 송곳니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아르닌을 물어 버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눈표범의 턱 밑을 간질여 주고 촉촉한 콧등에 뽀뽀해 준 다음 물러났다.
“잘 다녀와, 카티.”
“잘할 수 있을 거다.”
베르너와 아르닌이 나를 격려했다.
나는 그들을 차례로 꼭 안은 뒤 조심스럽게 결계를 건드렸다. 이번에는 탑의 결계가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몸이 부드럽게 결계의 그물 속으로 파묻히는 느낌이 났다.
결계를 완전히 통과했을 때, 방금까지 내 뒤에 서 있었던 이들의 모습은 간데없이 사라졌다.
긴장감에 입술이 말랐다. 나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탑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입구가 드러나 있었다. 문 같은 건 없었다. 직사각형으로 뚫린 입구 안쪽으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좋아, 가 보자고.”
나는 주먹을 다부지게 움켜쥐고, 계단에 발을 올렸다.
* * *
겉으로는 이 정도로 좁아 보이지 않았는데, 나선형 계단은 무척이나 폭이 좁았다. 게다가 한참을 올라가도 다음 층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올라가야 하는 거야?”
그렇게 혼잣말로 투덜거린 순간이었다. 내가 그렇게 불평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딱딱한 돌벽에서 무언가가 쑤욱 튀어나왔다.
[사막의 냄새.]“끼야아아아악!”
나는 기겁해 하마터면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누, 누, 누, 누구세요!”
갑자기 돌벽을 뚫고 나온 건 뭉글뭉글한 하얀 안개 뭉치였다.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 양쪽 돌벽에서 허여멀겋고 불투명한 덩어리가 연속으로 튀어나왔다. 크고 작은 목소리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나. 뜨겁고 건조한 모래바람의 냄새가.] [이상한데. 차가운 기운도 섞여 있어. 북해의 삭풍 냄새도 난다.] [뜨겁고 차가워. 절대 ‘평범’한 아이는 아닌데, 유제니?]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건 영령들의 목소리다. 그들이 존재하는 곳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끝도 없이 이어진 나선형 계단 위쪽을 힘주어 노려보았다. 그리고 멈추었던 발을 재게 놀리기 시작했다.
‘그럼 할아버지도 저 위에 있다는 거지!’
할아부지, 카티가 지금 만나러 가요!
숨이 턱까지 찰 즈음, 드디어 계단의 끝이 보였다.
“도, 차악……! 허억, 헥, 흐에엑…….”
맨 마지막 계단을 딛자마자 허리가 앞으로 푹 꺾였다. 목구멍에서 피 맛이 났다.
한참이나 가쁜 숨을 쉬는 내 곁으로 무언가가 스르륵 미끄러져 왔다.
[괜찮니, 아가야?]익숙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내가 세월의 정원에서 들은 것보다 훨씬 또렷하고 가까웠다. 나는 고개를 들었고, 우아한 인상의 귀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올라오느라 힘들었겠구나.]“어…… 가주님?”
나는 멍하니 되물었다. 대답은 영 엉뚱한 곳에서 돌아왔다.
[가주님, 어느 가주님? 앞에 번호를 똑바로 붙이거라, 아가야.]수십 명의 ‘가주님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양옆을 돌아보았다.
‘서른 두 명의 역대 가주들의 영령…….’
이건 그간 내가 머릿속으로 열심히 상상해 왔던 그림은 아니었다. 거의 5억 광년은 떨어져 있었다.
유제니 블라스코의 영령이 내게로 포르르 날아왔다.
나는 얼결에 손바닥을 들어 그녀를 받쳤다. 유제니 님이 내 손바닥 위에 편히 자리를 잡으셨다. 그래, 내 손 위에…….
“자, 작아.”
외람되게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작았다. 영령들은 대부분 내 손 두 개를 나란히 겹쳐 놓은 크기였다. 내 손바닥 위에 걸터앉을 수 있을 만큼 다들 미니미했다. 비단 유제니 님뿐만이 아니라, 나를 옹기종기 둘러싼 서른 명이 넘는 영령들이 전부 다 그랬다.
‘요정……?’
성스러운 영혼, 영령. 그들은 꼭 동화에 나오는 요정처럼 작고 앙증맞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