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86)
86화
가끔 역사에 방계에서도 외따로 떨어진 핏줄임에도 직계보다 더 강한 힘을 타고난 자가 가주위에 오른 전례가 있었다.
그러나 헤르젠이 소유주로 있는 정보 길드 ‘밤비’에 비밀리에 의뢰를 맡겨 보아도,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집 앞에 버려져 있던 갓난아이의 부모는 찾을 수 없었다.
아이는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나타났다.
결국 헤르젠은 카티샤를 세상의 눈으로부터 숨기기로 결정했다.
‘정말 블라스코의 피가 섞여 있다면, 황실의 감시망도 피해야 하고.’
헤르젠은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보고, 그가 지닌 지식과 능력을 총동원해 아이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이후부터는 아이를 보호해 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헤르젠은 카티샤에게 막대한 유산을 안겨 블라스코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하나 남은 아들에게로.
아들을 보지 못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어도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루테가 이 아이를 모질게 내치지는 못할 거라는 그런 확신. 자신이 그랬듯이 말이다.
게다가 그의 둘째 아들은 제게 먼저 다가와 치대는 것들을 귀여워한다. 안 그렇게 생겨서는, 첫째인 루티어드보다 더 마음이 무른 데다 작고 귀여운 것들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가 루테였다. 카티샤의 밝은 표정이 그의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헤르젠은 카티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누가 용돈 준다고 해도 덥석 따라가면 절대 안 된다, 카티.]“헤헤, 나 이제 돈 많은데! 백만장자예요.”
[그럼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것으로 꼬셔도 따라가면 안 돼.]“아앗. 아, 아키는 눈표범이니까.”
[그래, 특히 아이칼 그놈! 듣자 하니 이미 교단을 등진 모양이지만, 그래도 경계의 끈을 늦추면 안 돼. 낌새가 수상하다 하면 미련 없이 버려. 알겠냐?]“으응…….”
[정 주지 말고!]“으으으응.”
카티샤가 대답을 얼버무리며 눈을 데루룩 굴렸다.
헤르젠은 미미한 불안감을 느끼며 푹 한숨을 쉬었다.
‘루테가 잘 가르치고, 잘 지켜 주어야 할 텐데.’
다루지 못할 힘은 없으니만 못하고, 남들에게 없는 것을 가졌다는 특이함은 그 자체로 스스로를 찌르는 칼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로켓 속에 들어 있던 글귀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역행한 모든 것이 새로이 시작되었노니, 새 생명이 어긋난 것들을 되맞추리라…….’
블라스코의 추모 헌시와 비슷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까?
가끔 헤르젠은 자신이 굳이 가문을 내버리고 이 먼 시골까지 온 이유가, 바로 이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언젠가 거센 시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지도 모르는 아이가, 어린 시절에나마 밝고 씩씩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보듬으라고. 그게 자신의 역할이라며 운명이 길을 밝혀 준 것만 같은 느낌.
‘세상의 때 한 점 묻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기만 하면 좋으련만.’
할아버지의 근심을 조금도 모르는 카티샤가 다시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근데요, 할아부지. 있잖아요, 나 블라스코 역사 전시관에서 할아부지 젊을 때 초상화 봤는데요!”
[……그러냐. 잘생겼지?]“응! 그래서 할아버지 아닌 줄 알았어요.”
[뭬야? 욕이냐?]물가에 어린애들만 덜렁 놔두고 와 버린 심정이다. 이거야 원, 이미 숨이 꼴깍 넘어간 마당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으니.
헤르젠은 씁쓸함을 삼키며 카티샤에게 사랑의 꿀밤을 놓아 주었다.
* * *
나는 영령의 탑에 꼬박 엿새를 머물렀다.
이곳은 아르템의 사바나만큼이나 초현실적인 공간이었다. 일단 내 로켓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낮도 밤도 없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아르템 땅에 세워진 탑이니만큼, 바깥의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는 딱 이틀만 채워 돌아가려고 했는데, 막상 이틀이 지나니 할아버지를 두고 떠나기가 싫었다.
‘하루만 더……. 딱 하루만…….’
게다가 이 탑에는 신기한 것도 너무 많았다.
뭐니 뭐니 해도 귀어스트.
검을 잡으면 그 안에서 맥동하는 마귀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나에게 끊임없이 무어라 말을 거는 것 같은데, 내 귀에는 둥둥거리는 고동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나를 배척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 있는 게 그 증거였다.
“친구야, 자?”
게다가 귀어스트는 내가 그렇게 부르면 검 밖으로 몸을 비집고 나오기까지 했다.
푸른색이 군데군데 섞인 검은 마기가 날개와 인간의 사지가 달린 거대한 가고일의 형상을 이루었다. 아스트로카 중앙은행의 금고 입구, 그리고 수도의 타운 하우스 앞에 놓인 석상과 똑같이 생겼다.
“으악.”
하지만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도 역시 무서웠다.
나는 황급히 할아버지 뒤에 숨었다. 영령들께서 포르르 날아와 방패처럼 내 앞을 막아섰다.
[워어, 귀귀. 이렇게 코딱지 같은 애는 간식거리조차 안 될 거다.] [그래. 먹어 봤자 감질만 날 거야.] [애기가 놀랐잖니. 어여 검으로 다시 들어가거라.]위엄 있는 영령들의 말씀에 귀어스트가 스르륵 다시 검은 연기로 흩어졌다.
귀어스트의 몸체와 영혼은 갈기갈기 찢기고 녹아 검에 스며든 상태이고, 남은 건 이 거대한 마기 덩어리뿐이라고 했다. 이지는 없지만 거칠고 사나운 기질은 그대로 남았다고.
유제니 님이 생경하게 중얼거리셨다.
[네가 오고 나니 귀귀가 아주 얌전해졌구나. 지금쯤 온 탑을 마구 들쑤시고 다녀야 할 시간인데. 저렇게 순순한 건 처음 봐.]탑에 더 오래 계신 영령들께서도 처음 보는 광경인 듯했다.
[귀귀가 저렇게 순하게 군다면……. 이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는걸.] [어떻게 보십니까, 가이우스 님?] [심지어 저 아이, 귀귀와 저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데도 오러가 깎여 나가지 않습니다.]보통은 마검의 후계자가 되는 즉시 생명 에너지인 오러가 뭉텅뭉텅 깎여 나간다고 했다. 그러나 내 노을빛 오러에 일어난 변화라곤 색이 조금 더 짙어지고 무거워졌다는 것뿐이었다.
[……지금껏 마검의 후계자는 곧 블라스코의 가주였다. 그 둘이 동일인이 아닌 경우는 거의 없었어.]아직도 꿈나라를 헤매고 계신다는 3대와 4대, 5대 가주님 대신 대표로 2대 가주, 가이우스 님께서 나를 굽어보셨다. 복잡한 표정이셨다.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두 손을 꼭 부여잡았다.
‘통과, 통과. 제발 통과……!’
이만하면 영령들께서도 내가 꽤 마음에 드신 것 같고, 마검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걸 증명한 셈이었다.
하지만 아직 나는 영령들에게서 증표를 받지 못했다. 영령의 탑을 대표하시는 가이우스 님께서 결정을 미루고 계셨기 때문이다.
한참을 침묵하던 가이우스 님께서 드디어 입을 여셨다.
[하나 묻자, 아이야.]“네!”
[가주가 되고 싶으냐?]나는 물끄러미 가이우스 님을 올려다보았다.
이것 역시 영령의 시험이려나?
그렇다면.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지? 블라스코의 힘이 탐이 나느냐?]가이우스 님은 내 맹랑한 대답에 흥미를 느끼신 듯했다.
나는 이번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힘이 있으면 물론 좋겠죠. 돈은 많을수록 좋고요. 하지만 그 이유는 아니에요.”
[그럼?]“저는 공작님이랑, 아르닌 언니랑, 공자님이랑 오래오래 함께 있고 싶어요.”
[……오래오래?]“네. 공작님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실 때까지요. 그러고 나서 공작님께 드릴래요, 마검. 물론 공작님이 허락하신다면요!”
그러면 공작님도 한 50년쯤 더 사시고, 돌아가신 담엔 영령이 되셔서 또 보고. 그런 꼼수였다.
‘지금 공작님이 귀어스트를 승계하면 할아버지보다도 더 일찍 돌아가시는 거잖아.’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지만, 그렇게 빠른 이별은 싫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이라니.’
본인이 의연하대도 나는 싫다. 공작이 아니라 베르너나 아르닌이라도 마찬가지였다.
헤르젠 할아버지를 보고 나니 더 생각이 더 굳어졌다. 어차피 마검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적임자가 있는데 굳이 블라스코의 가주들이 사명을 짊어져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
“저는 귀어스트를 잡아도 멀쩡하잖아요. 그러면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가주 대신 마검을 지킬래요.”
[블라스코의 사명을 이어받겠다는 말이냐? 죽음 이후의 안식을 영원히 빼앗겨야만 하는데도?]“괜찮아요.”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나는 남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거짓말로 꾸며 낸 허울이 아니니 긴장하고 떨 것도 없었다.
혼자는 싫다. 무섭고 외로워.
“게다가 여기 이렇게 많은 영령들이 계시는걸요. 죽어서 영령이 돼도 혼자 아니에요. 저는 그거면 돼요.”
[…….]“그리고 마검의 주인만이 가문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거라면, 가주도 그냥 제가 할래요.”
나는 자신 있게 말을 맺었다. 하지만 솔직히 마지막 건 말도 안 되는 객기였다.
‘가주는 아무나 하나!’
후계자는 공자님이나 아르닌 언니 둘 중 한 명이 하고, 나는 검만 지키면 되잖아?
그러면 모두가 해피엔드였다. 당연히 가이우스 님께서도 가주직까지 넘기는 건 안 된다고 하겠지? 그러면 나는 못 이기는 척, 그럼 검만 제가 가질게요. 하고 물러나면……
[그래. 나쁘지 않을 듯하군.]되는, 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