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88)
88화
이클라스족의 신수들은 하나같이 인세에 무심하다던데. 저 어린 신수는 무심한 것을 넘어 인간에 대한 반감만 극심해 보였다.
‘쿼터, 라기에는 오러가 범상치 않고.’
저 아이는 최대한 갈무리한다고 하는 모양이지만, 방심하는 찰나에 스며 나오는 오러의 파장까지 완벽하게 감추지는 못했다.
애초에 신수의 오러는 인간의 것과는 아예 달랐다. 아주 조금만 새어 나와도 감이 좋은 자라면 금세 알아챌 수 있다. 특히 공작 자신의 눈을 속이기는 더더욱 어렵다.
‘하프인가?’
그가 알기로 현재 대륙에 나타난 이클라스의 하프는 둘뿐이었다. 하나는 벌써 200년 넘게 산 성체고, 다른 하나는 백의 교단 소속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백의 교단은 내부의 정보를 철저히 은폐하기 때문에 세간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백의 교단 소속의 하프라면 당연히 성검 힐라이야의 주인이라는 사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
‘카티샤가 힐라이야의 주인을 데려온 거라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겠는데…….’
원래도 상극인 백의 교단과 척을 지면 여러모로 귀찮아진다. 황실과 오르겐 후작가를 견제하기도 바쁜데 적을 늘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애가 직접 데려왔으니 뭔가 생각이 있었을 테고.’
공작은 생각을 정리하며 신수를 불렀다.
“아가.”
그 호칭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표범이 즉각 고개를 쳐들었다. 공작을 노려보는 은푸른색 눈동자에 반항기가 가득했다.
게다가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질색을 하며 물러난다. 손을 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바로 어제도 눈표범을 들어 카티샤의 방에 데려다 놓으려던 시녀의 손등을 피가 나도록 박박 긁어 놓았다.
이쯤이면 이런 아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안고 다니는 카티샤가 대단해 보일 지경이다.
‘인간화는 아직인가?’
공작은 엄하게 눈표범을 손으로 막았다.
“어허.”
크르르……. 눈표범이 사납게 목으로 울었다.
“카티샤가 나를 물면 안 된다는 말은 안 했나?”
그 말에, 막 공작의 손가락을 물어뜯으려던 아이칼이 멈칫했다. 신비로운 빛깔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공작은 그 틈을 타 검은 무늬가 난 보송보송한 등을 쓰다듬었다.
‘……귀엽군.’
종을 불문하고 새끼들은 모두 사랑스럽기 마련이다.
아키라는 깜찍한 이름의 눈표범은 당장 그를 뿌리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용케도 참았다.
‘카티샤가 길을 잘 들여 놓았나 본데.’
아이에게 위험하지는 않을까? 손끝으로 눈표범의 오러를 더듬어 보는 공작의 눈이 깊어졌다.
비단 이클라스족뿐 아니라, 모든 신수는 기본적으로 인세에 무관심하다. 차갑고 변덕스러우며, 인간과 굳이 공생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인간의 일에 끼어들기를 싫어한다. 그건 그들의 본능에 새겨진 습성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카티샤를 지나치게 좋아한다. 카티샤가 풍기는 독특한 오러의 파장에 신수마저도 영향을 받는가? 환상종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러고 보니 카티샤의 오러가 눈표범에게 흐르는 서늘하게 정제된 오러와도 살짝 비슷한 것 같다. 그 아이의 정체는 점점 더 오리무중에 빠지고 있었다.
공작은 잠깐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뭐, 이유가 무엇이든 신수의 비호를 받는다면 나쁠 건 없지.’
이 아이가 카티샤를 배신할지 하지 않을지는 앞으로 주의를 기울여 감시하면 될 일이고.
그는 눈표범의 턱 밑을 부드럽게 쓸었다.
“잘 지켜라, 네 주인님.”
눈표범이 새침하게 고개를 팽 돌렸다. 네가 그렇게 당부까지 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잘하거든! 뭐 그런 비슷한 표정이었다.
‘성질 하곤.’
공작이 그렇게 혀를 찬 순간이었다.
영령의 탑 주위에 친 보이지 않는 결계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동시에 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탑 안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얏챠.”
괴상한 기합과 함께, 허공에서 노란색 신발을 신은 작은 발이 쏙 나타났다.
“끄으으응……차아.”
뒤이어 해괴한 파란 체크무늬 치맛자락이 쏙 튀어나왔다. 결계는 이내 조그만 주황머리 꼬마를 뱉어 냈다.
“휴. 나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탑을 빠져나온 카티샤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슥슥 빗어 정리했다. 옷에 묻은 먼지도 톡톡 털었다.
공작이 아이를 부르기도 전에, 엿새 동안 꼼짝도 하지 않던 신수가 풀밭을 재빠르게 달려 나갔다. 제게 우다다다 가까워져 오는 눈표범을 발견한 카티샤가 활짝 웃었다.
“아키! 주인님 없는 동안 잘 있었어?”
카티샤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눈표범에게 마구 뺨을 비볐다.
“아무도 안 물고 얌전히 있었지? 아이, 착하다.”
어린 짐승이 온갖 재롱을 부리며 카티샤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공작은 기가 차 실소했다. 그리고 아이를 불렀다.
“오렌지.”
“……!”
눈표범과 감격의 상봉을 하던 카티샤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공작을 발견한 아이의 연녹색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공작님!”
눈표범을 야무지게 챙겨 안은 카티샤가 이쪽으로 도도도 뛰어왔다. 온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 피어 있었다.
공작은 부러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바로 두 걸음 앞까지 달려온 아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살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인다. 귀어스트에게 해를 입지 않을 거라곤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배꼽에 양손을 포갠 카티샤가 꾸벅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씩씩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공작이 손짓하자, 카티샤가 얼른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뿌듯하고 당당한 얼굴이 말도 못 하게 사랑스러웠다.
그는 저택에 처음 왔던 날보다 조금 더 통통해진 아이의 뺨을 아프지 않게 찔렀다.
“괜찮았어?”
“네! 다들 너무 좋은 분들이세요.”
“증표는?”
“여기……!”
카티샤가 앞주머니를 뒤적여 푸른 나비가 달린 고리 장식을 꺼냈다. 정교하게 세공한 나비에 귀어스트의 마기, 그리고 그 마기를 누르는 32명의 영령들의 숨결이 은은하게 깃들어 있었다. 귀어스트의 검자루에 매여 있던 장식품이다.
영령들의 인정을 받았음을 이보다 더 확실히 보여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제야 공작의 입가가 한결 편안하게 허물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보슬보슬한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고지식한 분들이시라 설득하는 게 힘들었을 텐데.”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잔뜩 생긴 기분이에요!”
“귀어스트는?”
“귀귀도 생각보다 엄청 순하던걸요. 만져도 아무렇지 않았어요.”
“그걸 만졌어?”
공작은 기함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카티샤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배시시 웃었다.
“할아버지가 그래도 된다고 했어요. 괜찮으니까 저한테 준 거라고 하시면서.”
“할아버지가 무슨 만능이야? 그 양반이, 진짜…….”
“괜찮아요! 귀귀는 저 안 괴롭혔어요.”
“귀귀는 또 뭔…….”
설마. 그는 경악스럽게 인상을 우그러뜨렸다.
‘탑에서 마귀를 데리고 대체 뭘 하는 거야?’
“제가 아직 어려서 귀귀도 제 영혼을 잡아먹고 싶지 않은가 봐요! 그런데 사실 맞아요. 저 같은 걸 먹어 봤자 입가심도 안 될 거예요.”
공작은 그 조잘거림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아이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앞뒤 모두 멀쩡했다. 특이한 오러의 파장도 그대로였다.
‘아니. 아주 약간 짙어졌나?’
그러나 민감하게 느낄 정도는 아니다. 공작은 카티샤가 어지럽다며 해롱대고 나서야 아이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그래도 앞으로는 만지지 마. 위험해.”
“조심할게요!”
얼른 대답한 카티샤가 우물쭈물하며 양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무언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있잖아요……. 혹시 마중 나와 주신 거예요?”
가끔 이 애는 이렇게 황당한 소리를 자꾸 한다.
공작은 조금 기가 막혀 되물었다.
“그럼 뭐 하러 내가 여기 있는 것 같아?”
“그치만 들어갈 때는 배웅 안 해 줬는데…….”
아, 그게 내심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이번에 그는 금방 대답하지 않고 말을 아꼈다.
카티샤에게 그의 민낯을 들킨 이후로, 공작은 아이를 어찌 대해야 하나 며칠씩이나 고민했다.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재의 문을 발칵발칵 열어젖히고 자꾸만 틈을 벌리는데, 이걸 밀어낼 수도 없고……. 아니, 사실은 모질게 내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마음 편히 옆자리를 내주자니, 제가 공들여 만든 가면이 흔적도 없이 부서질까 봐 겁이 났다. 믿을 수 없게도 그랬다.
그의 눈치를 보던 카티샤가 조그맣게 말했다.
“제가 더 잘할게요.”
“……뭘?”
“착하게 행동할게요! 아르닌 언니와 공자님과도 잘 지내고요. 저택 사람들에게도 잘하고요. 그리고 영령들께도 자주 놀러 가서 안부 인사드리고요. 마검도 제가 지킬게요.”
아이가 또다시 잔잔한 마음의 호수에 조약돌을 던졌다. 퐁, 퐁.
“그리고 비밀은 꼭 지킬 거고요…….”
파문이 점점 더 큰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간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카티샤가 웅얼웅얼 물었다.
“그러니까 공작님 이름 부르면 안 돼요?”
“……내 이름을 부르겠다고?”
“네! 아니, 그러니까. 반말하겠다는 게 아니고요……. 그으, 부르는 게 안 되면 쓸게요!”
“…….”
아, 이번 것은 조금 크다. 작은 돌멩이만 통통 던지던 아이가 어느새 물속에 발을 담그고 참방거리고 있었다.
그는 결국 한숨처럼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어딜 꼬맹이가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불러.”
“히잉……. 그건 그렇지만.”
“속으로만 생각해. 속으로만.”
카티샤가 얼마간 눈을 끔뻑였다.
공작은 아이의 얼굴에 기쁨이 꽃처럼 피어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나? 아버지는 그에게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은 대신, 이 아이를 마지막 선물처럼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 아무도 없을 때만 불러. 공책에 쓰든가. 대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뒤처리는 확실히.”
“넵!”
“약속.”
용수철처럼 튀어 자세를 바로 한 카티샤가 결연하게 그의 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루테는 실없이 웃으며 아이의 볼을 꼬집어 준 뒤, 아이와 아이가 끌어안은 눈표범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이제 가자. 네 언니 오빠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으니까. 마지막 시험도 준비해야 하고.”
“헤헤……. 마지막…….”
좋아 죽겠다는 듯 카티샤의 입꼬리가 승천하기 직전이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마지막 시험 과제는 그가 직접 선정했다. 일부러 아이가 꼬리 흔들며 반길 만한 과제를 골랐다.
“참, 할아부지는 엄청 잘 계세요.”
본저로 올라가는 길에, 카티샤가 루테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근데 저보다 더 쪼그매지셨어요. 그게 많이 슬펐는데, 이제는 괜찮아요. 보고 싶으면 언제든 가서 볼 수 있으니까.”
“……그래.”
“할아버지 동상이 완성되면요, 세월의 정원까지 데려다주세요!”
연녹색 눈이 기대에 차 반짝거리고 있었다. 뭘 노리는지 빤히 들여다보였다. 아버지 앞에 가서 감격의 상봉이라도 하기를 기대하는 것이겠지.
“글쎄, 생각해 보고.”
치이. 그가 생각만큼 쉽게 넘어오지 않자, 카티샤가 쳇 소리를 냈다. 머릿속에 어떻게 하면 그들을 만나게 할 수 있을지 궁리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루테는 속으로만 웃음을 삼켰다.
‘누가 키웠는지 참 귀엽기도 하지.’
어쨌거나, 세 번째 상속 시험도 무사히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시험 하나뿐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