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91)
91화
“아키?”
아이칼은 여전히 내 등에 아무렇게나 기대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려 보자, 아이칼의 손에 휘감겨 있는 주황색 오러가 보였다. 내 오러였다.
“내가 알던 것과 다르면, 짜증이 나고.”
고저 없이 내뱉은 아이칼이 손으로 오러를 통 튕겼다. 나는 살며시 미간을 찡그렸다.
“뭐 해?”
“마음에 안 든다.”
무언가 깊이 생각할 때면, 아이칼의 말투는 어느새 다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뚝뚝하게 돌아가곤 했다. 소년이 흘끗 눈만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무거워졌어, 카티. 알고 있어?”
“……키가 좀 커서 그래.”
“그거 말고. 오러.”
아이칼의 손에 휘감기는 노을색 오러가 점차 증식했다. 갑자기 머리가 핑글 돌았다. 나는 펜을 툭 놓고 이마를 짚었다.
“야아……, 너무 많이 뽑지 마아라아. 나 어지러워.”
오러는 살아 있는 개체가 가진 고유한 생명 에너지다. 피와도 같아서, 조금 뽑아 간다고 목숨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과하게 죽죽 흘려보내면 몸에 무리가 왔다. 작게는 빈혈부터 크게는 오러 순환 장애, 오러 불균형 등 특이 질병이 오기도 한다.
평범한 사람은 오러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니 그런 병에 걸릴 확률도 극히 낮지만, 오러에 민감한 타입이나 오러 유저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흔한 질환이었다.
“무거워. 탁하고.”
아이칼이 달아나려는 내 오러를 콱 틀어쥐었다. 내 호흡도 함께 틀어 막혔다. 데구루루 굴러간 펜이 탁자 아래로 툭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헐떡거렸다.
‘으, 적응 안 돼…….’
아이칼이 말하는 ‘무겁다’는 뜻이 뭔지 물론 안다. 내가 지난 늦여름, 영령의 탑을 다녀온 이후부터 아이칼은 비슷한 소리를 반복해서 했다.
사실 육안으로 보여서 부정할 수도 없었다. 밝고 불순물 없이 맑은 노을빛이었던 내 오러는 어느새 아주 짙은 주황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탑, 가지 마.”
아이칼이 매번 하는 말을 또다시 했다. 오늘은 짜증이 조금 섞여 있었다.
내 오러의 색이 변한 주요 원인은 뻔했다. 영령의 탑에 있는 귀어스트 때문이다.
나는 영령들과 약속한 대로 달에 한 번 탑을 올랐다. 지난 8월부터 매달 한 번씩 갔으니 벌써 횟수로는 다섯 번을 채웠다.
탑에서 귀어스트를 몇 번 토닥여 주고 오면 여지없이 오러의 색이 진해져 있었다. 하지만 오러 소유자인 나 정도나 겨우 알아차릴 만한 미세한 변화였다.
‘공작님도 그다지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고 하셨고. 파장은 그대로라니까.’
자라면서 오러의 색이 변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공자님만 해도 어렸을 땐 아르닌 언니처럼 하늘색에 가까웠다고 했고.
하지만 역시 찜찜한 일이기는 했다. 어찌 되었든 타락한 마기에 영향을 받는다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니까.
아이칼이 못마땅하게 말했다.
“차가워도 참아.”
아이칼의 손에 휘감겼다가 풀려난 내 오러가 점차 본래의 노을빛을 회복하고 있었다.
이건 일종의 정화 작업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오러는 귀어스트의 마기를 반, 힐라이야의 오러를 반씩 닮은 모양인데, 영령의 탑에만 다녀오면 마기가 차지하는 지분이 높아져 오러가 짙어지는 것이다.
이 현상을 원래대로 회복하려면, 반대로 힐라이야의 오러를 더 집어넣어 주면 된다. 균형이 적절히 맞도록.
나는 슬그머니 어깨를 들썩여 아이칼을 떼어 냈다.
“귀찮으면 안 해도 돼, 아키. 사는 데는 전혀 지장 없는 모양이니까.”
“싫어?”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싫다기보단. 나는 끄응 소리를 내며 고심했다.
그게 아니라, 네가 몇 달 전처럼 날 산 채로 얼려 버릴까 봐 그러지.
그 일은 내가 세 번째 시험을 마치고 돌아온 날 밤 벌어졌다. 고작 엿새 떨어져 있었다고 내게 마구 애교를 부리던 아이칼이 돌연 사악 표정을 굳혔다.
그러더니 내 오러를 멋대로 끄집어내 만져 보곤 딱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뭐야, 이건?”
그러곤 앞뒤 생각하지도 않고 제 오러를 내게 쑤셔 넣어 버렸다.
‘다시 생각하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아이칼은 자기가 얼마나 차가운지 체감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몸속을 파고든 오러가 급속도로 성에처럼 얼어 버리는데, 하마터면 여름철에 동사해 죽을 뻔했다. 그 뒤로 아이칼은 반성의 의미로 몇 달간 자기 발로 걸어 다녔다.
게다가 애초에 신수의 오러를 한낱 인간이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별 모양의 구멍에 동그란 틀을 억지로 밀어 넣으면 구멍이 터지겠지, 당연히!
어쨌든 그래서, 몇 달 전부터 우리는 좀 더 온건하고 간접적인 방법을 찾은 참이었다.
짙은 주황색 오러가 아이칼의 몸을 한 바퀴 통과하고 나왔다. 원래의 노을색을 회복한 오러는 다시 내게로 스며들었다.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으, 차가워.’
아이칼을 한 번 거쳐 다시 내게로 돌아온 오러에도 미미한 찬기가 스미어 있었다. 내가 몸을 달달 떨자 아이칼이 옆에 널브러져 있던 담요를 끌어와 어깨에 덮어 주었다.
나는 손끝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오러를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정말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왔네.’
이렇게 정기적으로 정화 작업을 거치면 사실 내겐 좋은 일이다. 걱정 없이 영령의 탑을 들락거려도 되니까.
핑글핑글 돌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정화가 끝나자마자, 어깨 너머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또 갈 거야?”
“당연히, 가긴 가야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랑 약속했는걸.”
아이칼은 길게 침묵했다.
원래도 말이 많은 편은 못 되지만, 저조한 상태로 입을 다물고 있을 때와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또 이러네.’
요즘, 아이칼이 조금 이상하다.
그래도 꼬박 반년 넘게 온종일 붙어 있었던 덕인지, 이제 나는 아이칼의 목소리나 표정의 미세한 변화로도 기분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 그가 성을 낼 땐 단순한 짜증, 기분 나쁨, 반항심 정도의 온도였는데.
‘가끔 조금, 스산한 분위기가…….’
정확히 영령의 탑이 기점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시험지를 덮고 꾸물꾸물 돌아앉았다.
“아이칼.”
“……왜?”
과연, 나를 뚫어져라 직시하는 아이칼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말라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섬뜩하다.
아이칼이 이런 눈을 할 때면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지금 우리, 마법처럼>의 가장 최근 회 차에서 묘사한 그의 표정이 딱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아니면 백의 교단에서 마물이 들끓는다는 북해를 수없이 들락거려야 했을 때의 얼굴이 꼭 이렇지 않았을까?
“이리 와 봐.”
나는 담요의 한쪽 끝을 쥐고 끌어당겨 아이칼의 어깨에 폭 덮어 주었다. 커다란 담요는 우리처럼 조그만 어린아이 두 명쯤은 거뜬히 덮고도 남았다.
나는 담요 속에서 몸을 움직여 아이칼의 어깨를 톡 쳤다.
“화내지 마. 너 화내면 나 마음 아파.”
“마음이 아파?”
소년이 고아한 눈썹을 한껏 찡그렸다.
“왜?”
“나는 널 엄청 좋아하는데, 넌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아이칼에게선 잠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를 담은 은푸른빛 눈이 수없이 깜빡거렸다.
벽난로가 타닥타닥 타오르는 평화로운 소리가 흘렀다. 어차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데, 꼭 소곤소곤 말해야 할 것 같아 나는 괜히 목소리를 줄였다.
“있잖아, 아키. 약속은 중요한 거야. 사람이 살아가는 데 신의가 얼마나 중요한데. 신수는 홀로도 완벽하니 이런 거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인간은 함께 사는 동물이니까. 함께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야 해.”
“네 그 수많은 ‘친구’들처럼?”
“그렇지.”
역시나, 이 대목에서 아이칼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질투라고 여겼는데 최근 들어서야 다르다는 걸 알 것 같다. 신수는 인세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인간들의 삶이 아니라 그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단 한 명의 인간이다.
그만큼 그들은 독점욕이 강하다. 제 것을 누군가에게 빼앗겨 본 역사가 없으니 더더욱.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관심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는 게 그들의 습성이니까.
어제까지는 짙은 소유욕을 내비쳤다가 내일이면 한 끗만치의 미련도 없이 돌아설 수 있는 존재들이 바로 신수다.
‘그래서 신수와 인연을 맺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그들의 흥미가 어떤 식으로 상처를 남길지 모르니까.
다만 아이칼은 그중에서도 특이한 경우였다. 그는 인간을 향한 뿌리 깊은 적개심을 품고 있다. 백의 교단의 압제에 당한 세월 탓이다.
그래서 아이칼은 내가 많은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웬만해서는 내게 티를 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지만…….
‘다 보인단 말이야.’
이대로 두면 질투가 독점욕으로 변질될 게 뻔했다.
나는 아이칼이 뭐라 더 말을 붙이기 전에, 황급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랑 담요 같이 덮을 수 있는 친구는 너뿐이잖아.”
“…….”
“내가 자는 동안 이불에 똘똘 말아서 옷장에 넣어 버릴 수 있는 것도 너뿐이고.”
“…….”
“나랑 하루 종일 같이 있는 사람…… 음, 존재도 너뿐인걸. 나를 제일 잘 아는 게 너잖아. 그런 친구는 너 하나밖에 없어.”
아이칼을 달래려고 듣기 좋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랬다.
나는 전생에 친엄마를 따라 반년에 한 번씩 터전을 옮기며 살았던 탓에 오래 인연을 이어 간 친구가 없었다. 헤르젠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거리낌 없이 내 속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 역시 아이칼이 유일했다.
나는 조곤조곤 그에게 속삭였다.
“다른 사람이랑 조금 놀아도, 나는 금세 네게 다시 돌아갈 거야.”
“……늘?”
“항상! 네가 먼저 나를 버리지만 않으면.”
“안 버려.”
아이칼이 힘을 주어 대답했다. 말을 이어 갈수록 아이칼의 눈매에 드리워 있던 예기가 조금씩 걷혀 가고 있었다.
나는 안도감을 느끼며 씩 웃었다.
“그렇지? 그러니까 기분 나빠할 거 하나도 없어.”
단순하다니까, 정말.
나는 소년의 입꼬리에 손가락을 걸고 양쪽으로 쭉 끌어 올렸다.
“그러니까 질투하지 마, 바보야.”
“……흐지 마(하지 마)…….”
아이칼이 눈꺼풀을 내려 흔들리는 눈빛을 감췄다. 그게 귀여워서 나는 매끈하고 보드라운 뺨을 꼬집어 주었다.
창밖에는 눈이 왔다. 우리는 사이좋게 벽난로 앞에서 불을 쪼이며 그 뒤로도 한동안 더 투닥거렸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는 스르륵 잠이 들었고, 복슬복슬한 새끼 눈표범을 안고 당당하게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꿈을 꿨다.
불볕 같던 여름이 전부 꿈이었던 것처럼, 그해의 마지막은 무척이나 포근하게 지나갔다.
그렇게 시간은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빠르게 흘렀다. 마침내 한 해가 지나고, 겨울의 끝자락을 넘어 드디어 3월.
마지막 상속 시험을 치는 봄이 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