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92)
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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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비에스토 아카데미 앞은 무성한 인파로 북적거렸다. 오늘은 1년에 한 번, 비에스토 아카데미의 신입생을 뽑는 입학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아스트로카뿐 아니라 전 대륙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명문 아카데미인 만큼, 수많은 아이들이 시험을 보기 위해 아카데미에 모여들었다.
이번 연도에는 특별히 아스트로카의 하나뿐인 황태자도 입학시험을 치를 예정이었다.
인파 사이에는 오르겐 후작가의 마차도 끼어 있었다. 후작은 오늘 딸인 황후 대신, 아끼는 손자이자 장차 아스트로카의 미래를 이끌 황태자를 직접 배웅하러 왔다.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평소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오십시오, 태자 전하.”
“예, 할아버님. 걱정 마세요.”
올해로 열세 살이 된 황태자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내걸었다. 이날을 위해 제국 최고의 선생들이 황성을 들락거리며 황태자를 가르쳤다.
‘황태자의 가정 교사 대부분이 비에스토 아카데미의 교수 출신이니 이변이 일어날 리는 없겠지.’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빼어난 수재라 칭송받았던 황태자였다. 1등은 당연히 황태자의 차지다. 황실에선 이미 시험 결과를 발표하는 날에 맞추어 성대한 축제를 계획하고 있었다.
오르겐 후작은 일부러 두 팔을 벌려 황태자를 가득 끌어안았다. 사이좋은 조손을 보는 이들의 시선에 진한 감동이 섞였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황실과 후작가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후작은 손자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시험이 시작되기 약 한 시간 전이었다. 마지막으로 후작에게 인사한 황태자가 호위 기사들과 함께 교정 안으로 사라졌다.
‘좋군. 역시 오늘의 주인공은 우리 손자지.’
후작이 그렇게 만족스러워하던 때였다.
저 멀리서부터, 소란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아카데미 정문 앞에 와글와글 모인 마차들이 갑작스레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모세의 기적처럼 마차들이 양옆으로 좌악 갈라졌다.
마차에 오르려던 오르겐 후작은 얼결에 물러나 길목을 확인했다. 푸른 나비가 이쪽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브…… 블라스코다.”
누군가 소리 죽여 속삭였다. 정교한 무늬가 들어간 푸른 나비와 칼날의 문양. 아스트로카 유일의 공작가이자 자타공인 제일의 검술 명가이자 살인귀 집단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악명을 떨치는 가문의 상징이었다.
패도의 블라스코. 후작이 눈살을 탐탁잖게 찌푸렸다.
‘블라스코가 갑자기 아카데미엔 왜?’
마차가 아카데미 정문 앞에서 멈추었다. 사람들은 잠깐 마차가 황금 철문을 부수고 교정 안으로 돌진하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그런 몰상식한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마차의 문이 활짝 열리고, 누군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차분한 결의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새파란 눈. 묵묵하고 진중한 인상의 잘생긴 소년이었다. 깔끔하고 흠잡을 데 없는 정복이 훤칠한 키와 균형 잡힌 몸에 맞춘 듯 잘 어울렸다.
지켜보고 있던 이들 사이에 수군거림이 퍼졌다.
“공자다.”
“아, 작년 아카데미 검술제에서 결승 상대를 손으로 때려눕혔다는, 그……?”
“그 운 나쁜 상대가 어느 집 영식이었더라? 이엘로즈 후작가의 장남이었나?”
“반칙패가 아니냐고 거세게 항의했다던데. 결국 재대결했잖아.”
“맞아. 그리고 1분 만에 검집으로 호되게 두들겨 맞고 또 패했지…….”
작년 검술제에서 무슨 이유에선지 블라스코 공자가 눈이 돌아, 결투에서 만나는 상대마다 반죽음으로 만들어 놓은 일화는 아직도 학내에 공포 괴담처럼 돌고 있었다.
소란이 채 갈무리되기도 전에, 마차에서 또다시 누군가 내렸다. 이번에는 기사복을 입은 늘씬한 긴 머리의 소녀였다.
여기저기서 경탄 어린 한숨이 터졌다. 대단한 미모로 소문이 자자한 블라스코 공녀였다. 물론 공녀 역시 미모를 능가하는 화끈한 성격으로 더 유명하다.
“구혼자들을 새로 개발한 무기의 성능 테스트용으로 쓴다는 그…….”
“공녀가 가는 곳에는 폭발이 일어난다며?”
“남부 하와인의 대장간에 도둑이 든 적이 있는데, 공녀가 그 도둑을 직접 잡아서 한나절 동안 성벽 꼭대기에 거꾸로 매달아 놨대. 그리고 채석광 일꾼으로 보내 버렸다지. 그 뒤론 감히 공녀의 대장간을 넘보는 이가 없다던데.”
“그런데 공자와 공녀가 아카데미까지는 무슨 일이래? 둘 다 입학시험을 볼 나이는 아니잖아.”
누군가 의문을 제기한 순간이었다. 공자와 공녀에 이어, 마지막 사람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등장하자마자 조용히 숙덕대던 구경꾼들이 알아서 입을 닥쳤다.
‘공작이다.’
블라스코 공작.
등장만으로도 수백 명의 입을 다물게 한 사내는 30대 후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수려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그가 일삼고 다닌다는 흉악한 칼부림이나 다혈질의 성격, 아르템의 사바나에 관한 소문만 아니었더라면 공작저의 집무실엔 절절한 연서들이 궤짝으로 쌓여 있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참, 더할 나위 없는 귀족의 정석인데…….’
저런 완벽한 육체에 그런 말 못 할 성격이 깃든 것을 빗대어 신의 농간이라고 한다. 사람이 너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면 인간미가 없으니 성질머리를 더한 것이라며.
사람들이 불안하게 서로를 곁눈질했다.
블라스코 공작이 직계들을 이끌고 아카데미를 방문했다. 대체 왜? 오늘 시험을 보는 아이들 중에 블라스코와 원수진 가문이 있나?
‘오늘 우리 애 시험 치는 날인데, 대체 무슨 깽판을 놓으려고!’
의문은 금세 풀렸다. 공작이 마차 안으로 상체를 기울였을 때였다.
짜리몽땅한 팔이 불쑥 문밖으로 나와 공작의 목을 껴안았다. 그가 누군가를 한 팔로 가볍게 들고 마차에서 끄집어냈다.
‘어린애?’
밝은 주황색 머리카락이 봄 햇볕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주인공은 하얗고 통통한 뺨과 새순 같은 커다란 연녹색 눈동자를 가진 조그만 어린아이였다.
이제 여덟 살, 아홉 살 정도 되었을까? 작은 여자아이는 손에 든 커다란 공책에 얼굴을 거의 파묻다시피 하고 있었다.
‘……인질인가?’
생소하다 못해 안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블라스코 공작과 어린 여자아이라니?
물론 미남과 귀여운 어린아이의 조합이란 사랑스럽지 않기가 더 어렵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현혹되기엔 블라스코가 그간 쌓아 온 악명의 벽이 높디높았다. 사람들 사이에 안타까운 탄식이 퍼졌다.
“어떡해, 인질인가 봐!”
“세상에. 이제는 어린애까지 건드린단 말이야? 그래도 약자는 공격하지 않는 거 아니었어?”
“불쌍하기도 하지. 한입거리도 안 되어 보이는데…….”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공작에게 편안하게 안긴 아이가 공책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는데, 표정이 티 없이 해맑았던 것이다.
심지어 아이는 공작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눴다.
“시험장이 어디랬지, 오렌지?”
“아카데미 서관 3층, 1학년 B반 교실이에요!”
“바로 올라갈래?”
“으으음, 5분만……. 저 이 챕터만 다 읽고…….”
그러고 보니 아이가 입은 옷도 최고급이었다. 노란색 어린이용 드레스는 섬세한 레이스와 프릴이 층층이 잡혀 있었고, 목깃과 소매에는 앙증맞은 리본이 달려 무척 깜찍했다. 거기다 뽀글뽀글한 프릴이 달린 양말에 검은 에나멜 슈즈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신경 쓴 티가 났다.
“사람 진짜 많다! 다 제 라이벌들인가 봐요.”
노트를 금세 다 읽은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다 이쪽을 봐요, 공작님?”
그 말에 공작이 눈만 움직여 그들을 둘러싼 인파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그의 눈빛을 받은 이들이 도미노처럼 우수수 고개를 숙였다. 시선으로 전해져 오는 무언의 압박이 강렬했다.
어딜 봐? 눈 깔아.
“엥? 이젠 다들 이쪽을 안 봐요.”
“블라스코 직계가 한꺼번에 왔으니 놀랄 만도. 별거 아니야.”
“그렇구나. 신기하다.”
“신기해하지 말고 적응해. 빤히 쳐다보게 두지 말고. 어딜 건방지게 뚫어져라…….”
“네?”
“아니야. 가자. 교실까지 데려다줄 테니.”
“네에.”
다시금 공책에 얼굴을 파묻은 꼬마 숙녀를 보는 공작의 눈빛이 언제 매서웠냐는 듯 다정하게 풀렸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얼빠질 만큼 확연한 차이였다. 입속으로 중얼중얼 공식을 외우는 아이가 귀여운 듯 입꼬리마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미쳤다. 공작이 웃는다.’
‘웃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미쳤나 봐.’
소리 없이 경악한 이들을 싹 무시한 공작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들 옆에 바짝 붙어 선 공녀가 아이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우리 귀염둥이, 떨리지는 않아?”
“네! 실수만 안 하면 될 것 같아요.”
“시험이 끝나면 갈 식당을 아홉 군데쯤 추려 놨다, 카티. 시간 남으면 뭐 먹고 싶은지 고르고 있어.”
공자가 진지하게 말을 얹자, 아이가 킬킬거렸다. 사람들의 예상처럼 무서워하거나 겁먹은 기색은 한 톨도 없었다.
“그런데 시험장에 반려동물을 데리고 들어가면 안 되겠죠? 아키, 몇 시간 안 걸리니까 얌전히 있어야 해.”
활기찬 조잘거림이 점점 멀어졌다. 블라스코 직계들이 아카데미의 정문을 통과해 교정 안쪽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아무래도 저 애, 소문의 그 아이인 것 같지?”
“그래. 블라스코의 상속녀.”
지난여름 수도에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진 블라스코의 상속녀.
아이의 이름이며 정체가 도통 알려지지 않아, 수도에서는 블라스코가 이미 아이를 처리한 뒤라는 말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그 블라스코가 갑자기 나타난 생면부지의 상속녀를 살갑게 대해 줄 리가 없다. 이미 가진 것을 탈탈 다 털어먹고 야산에 묻어 버렸을 게 틀림없다. 그런 소문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던 중인데.
지켜보고 있던 오르겐 후작의 미간에 깊은 균열이 갔다.
‘이제 보니 전혀 아니잖아?’
아이는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보러 왔다. 무려 직계 세 명이 전부 따라왔다. 심지어는 직접 시험장까지 데려다주기까지 한다.
“그런데 소문으로는 아직 열 살이라고 하지 않았어? 우리 조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데?”
“열 살에 비에스토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친다고? 에이, 거짓말. 떨어질 게 뻔한데.”
쑥덕거리는 이야기들은 후작의 마차 안까지 흘러들어 왔다.
오르겐 후작은 깔끔하게 다듬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루티어드 블라스코가 굳이 제 살 깎아 먹는 짓을 할 놈이 아닌데…….’
하지만 놈이 무슨 수를 쓰든 결과는 바뀌지 않을 터다. 황태자는 오늘 이 시험만을 위해 일곱 살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춰 왔다. 블라스코는 몇 년 전 공자가 낙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힘으로 덤비는 것밖에 모르는 무식한 검가라는 수치를 맛보게 될 것이다.
‘만에 하나 결과가 뒤집힌대도.’
이미 아카데미의 교수진들은 모두 매수해 둔 뒤다. 그러니 이변은 없을 것이다. 오르겐 후작은 흡족하게 마차의 커튼을 내렸다.
그러나 한 달 뒤, 황립 비에스토 아카데미 입학시험 결과가 적힌 공문이 돈 날, 아카데미와 수도는 물론이고 아스트로카의 귀족들 모두가 뒤집어졌다.
합격생 명단 최상단에 황태자의 것이 아닌 낯선 이름이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석. 카티샤 아브릴 블라스코(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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