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95)
95화
나는 궤짝 안에서 다시 눕지도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뻣뻣하게 굳었다.
궤짝의 가느다란 틈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나는 덜덜 떨며 그 틈에 눈을 가져다 댔다.
내가 늘 높이를 맞추기 위해 쿠션 하나를 깔고 앉곤 했던 책상 앞 의자가 보였다.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마구 타자가 쳐지는 타자기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저게 왜 자기 혼자 타이핑을 하고 난리야, 무섭게!’
일단 나 이외에 다른 존재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의자 밑에 그림자가 없다. 숨소리도 안 나고.
‘나 외에 누가 이곳에 들락거리는 건 아닌 거지.’
그런데 그러면, 지금까지 [지.우.마>의 새 회 차가 열릴 때마다 저렇게 타자기가 혼자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었단 말인가?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귀신 들린 타자기 아니야……?’
타다다닥.
타다다다닥.
타다닥.
타다다다닥.
타자기는 그 뒤로도 엄청나게 많은 글자들을 쏟아 놓고는 뚝 멈췄다.
나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떴네.”
책상 위에서 반투명한 스크린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역시!’
이제 슬슬 새 회 차가 열리지 않을까 하고 예상해 왔던 차였다. 내가 블라스코에 정식으로 입적되었으니까.
‘그러면 정말 내 가설이 맞았던 거야.’
내가 원작에서 니엘라의 몫이었던 것들을 하나씩 내 것으로 가져올 때마다 원작의 새로운 회 차가 열린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스크린을 넘겼다. 페이지가 넘어가며,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로운 내용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내 어머니는 오르겐 후작가에서 일하던 청소 하녀였다.>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했다.
[지.우.마>의 169 화는 아이칼이 니엘라의 목을 조르는 장면에서 끝났다. 그다음 장면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달리, 170 화는 니엘라의 과거 회상으로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오르겐 후작의 술주정뱅이 아들과 불같은 사랑에 빠졌던 하녀. 달콤한 사랑 고백을 믿고 한 철의 행복에 불나방처럼 몸을 던진 멍청한 여자가 내 어머니였다.>‘니엘라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나 보다.’
그런데 니엘라가 오르겐 후작가의 사생아였다고?
나는 그 대목에서부터 뭔가 수상쩍음을 감지했다.
그 뒤로는 니엘라의 어머니였던 여자가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가 몇 페이지에 걸쳐 서술되었다. 그 긴 회고의 끝에서 니엘라는 이렇게 다짐한다.
[나는 그 여자처럼 어리석게 살다 죽지는 않을 거야.> [어떻게든 내 쓰임을 증명해, 제국 최고 권력자 아래에 붙어 있으리라. 사생아 취급을 당하며 비참하게 죽임당하지는 않겠어.그렇게 다짐하며 내 조부, 오르겐 후작을 찾아갔다. 내 쓸모를 이리저리 재어 보는 그에게 살려만 주시면 어떤 위험하고 더러운 일이라도 다 하겠다고 빌었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이지.”
“예, 각하. 제게 오르겐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뭐, 좋다. 마침 적당한 어린애 하나가 필요하던 참이니.”
오르겐 후작은 내게 검을 배우게 했다. 몸을 단련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기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받게끔 했다.>
“마기에 익숙해지는 훈련?”
그건 블라스코 직계들이나 받는 훈련인데?
나는 표정을 구기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렇게 몸을 단련하길 수 년, 마침내 후작으로부터 지시가 내려왔다.“아르템으로 가라. 블라스코의 문하생부터 시작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가문에 입적되도록 해.”
“예? 하지만 각하, 제가 어떻게…….”
“마검의 후계자가 되는 거다, 니엘라.”
내가 맡은 임무는 최고의 검술 명가이자 오르겐의 숙적, 블라스코 공작가에 첩자로 잠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역할은 앞으로 5년 간, 블라스코를 비롯한 세상을 상대로 대대적인 사기극을 벌여야 하는 사기꾼이었다.>
“…….”
나는 조용히 내 뒤통수를 문질렀다.
남주가 여주 목을 조르는 것보다 더한 막장 전개가 바로 여기 있었다.
‘그러니까 종합하면, 결국 니엘라는 사기꾼이고 아이칼을 속인 배신자가 맞는다는 말이네?’
열일곱 살에 블라스코의 문하생으로 들어와서, 마검과 공명해 블라스코에 입적되고, 아이칼과 백의 교단을 포섭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뒤, 마침내는 마검을 되찾기 위해 블라스코로 돌아오는 게, 죄다 오르겐 후작과 작당한 사기극이었다는 말이지.
“와…….”
나는 선행된 떡밥 하나 없이 대뜸 반전을 투척한 작가님의 결단에 그만 탄복하고 말았다.
붕어가 된 심정이다. 내가 응원했던 건 불합리함에 고개 숙이지 않고 올곧은 신념을 지키는 정의로운 주인공이었는데.
‘여주가 있었는데, 없습니다. 악녀는 없었는데 생겼어요.’
나는 배신감에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나머지 내용을 쭈욱 읽어 보았다. 170 화 전체가 니엘라의 회상이었다.
블라스코의 문하생 발탁 시험을 친 것부터, 블라스코 기사단에 들어가 훈련을 받다가 귀어스트와 비슷한 마물의 마기를 일부러 흘리고 다니며, 영락없이 마검과 공명했다고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도록 유도하고…….
직계와 방계를 비롯한 블라스코 전체의 경멸을 받아 가면서도 악착같이 버티며, 가문의 정보들을 후작가로 빼돌렸다.
[블라스코 직계들의 눈썰미를 속이는 건 역시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들의 핍박을 단 일주일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아무리 의심이 가는 인간이라도 그렇지, 사람을 이렇게 초주검으로 만들다니. 징그러운 놈들.>
“아니, 이건 무슨 적반하장이야?”
단전에서 깊숙이 끌려 올라오는 빡침에 목을 쓰다듬었다. 아, 고구마 백만 개 먹은 기분이야.
‘이 사기꾼. 네가 지금 당당하게 회상이나 할 때냐!’
얘는 독자 우롱죄로 해피엔딩 박탈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작가님? 내가, 어? 없는 살림에 이 소설 보겠다고 돈을 얼마를 썼는데! 세끼는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블라스코가 니엘라를 죽도록 미워했던 이유가 있었네.’
오로지 니엘라 시점으로 전개된 글이니, 글 밖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지 모른다.
[백의 교단의 협조를 얻어 낼 수 있었던 건 내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그 대목 뒤로는 아이칼에 대한 니엘라의 절절한 짝사랑 이야기였다. 작중에 아이칼의 시점은 나오지 않아서 체감하지 못했는데, 아마 니엘라는 아이칼의 냉막한 태도에 꽤 마음 앓이를 한 모양이었다.
[내가 블라스코였더라면, 귀어스트의 주인이었더라면. 그랬다면 아이칼이 내게 겨우 이 정도만큼의 흥미만 내비치진 않았겠지.힐라이야의 주인, 그는 필연적으로 귀어스트의 후계자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까.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럽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귀어스트의 ‘진짜 주인’이.>
[지.우.마>의 170 화는 그렇게 끝났다.나는 입을 댓 발 내밀고 삐죽거렸다.
“치, 아키를 짝사랑했던 것만큼은 진심이었나 보지?”
이렇게 되면, 아이칼이 니엘라에게 극심한 배신감을 느낀 이유도 대강 알겠다.
원작에서 아이칼은 모종의 이유로 마검의 주인을 찾고 있었던 듯했다. 그때 자신이 마검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니엘라가 찾아와, 자신이 마검을 되찾을 수 있게끔 복수에 동참해 달라고 주장한 거다.
니엘라의 속마음을 보면 아이칼은 일단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확신은 없었던 모양이고…….
“아, 그럼 이다음이 중요한데.”
나는 못내 아쉬워 이전 페이지들을 휙휙 넘겼다.
니엘라가 사기꾼이란 건 충분히 알았고, 그래서 결국 아이칼과는 어떻게 되었으며, 블라스코에 복수는 한 건가? 영령의 탑에서 귀어스트와 조우는 한 거고?
‘오르겐 후작가와는 어떤 방식의 연락책을 쓴 거지?’
결국 실질적으로 중요한 정보들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셈이었다.
‘게다가 다음 화는 이제 언제 열릴지도 알 수 없잖아.’
앞으로 니엘라가 갖게 되는 게 뭐더라? 그걸 내가 먼저 뺏어 와야 하는데…….
머리에서 김이 나도록 생각하며 무심코 화면을 톡톡 건드렸을 때였다.
……가 떠야 하는데. 언제나처럼 [확인] 버튼을 누르고 목록으로 돌아가려 했을 뿐인데, 스크린에는 처음 보는 창이 나타났다.
“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