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97)
97화
* * *
세상이 흐릿했다. 몇 번 눈을 감았다 뜨니 시야가 물에 씻겨 나간 듯 또렷해졌다.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 뭔가 이상한데.’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캐노피와 이불의 색으로 보건대 내 방이었다. 이상하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다.
‘뭐지? 분명히 조금 전에, ‘사라진 세계’ 님이랑 이야기 나눌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귀에서 삐이이 이명이 울렸다. 멍하니 누워서 상황을 파악해 보려 애쓰는데, 가까이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아, 아기씨! 정신이 드세요?”
눈을 끔뻑끔뻑하자, 시야에 마가렛의 얼굴이 보였다. 반가움에 그녀를 부르려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다.
‘……?’
그쯤 되니 불길한 감각이 등골을 사악 가로질렀다. 나는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용을 썼다.
마가렛은 이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세상에. 각하, 아기씨께서 깨어나셨어요……!”
그녀의 비명 같은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까운 곳에서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카티샤.”
내가 막 태어난 망아지처럼 낑낑대며 뒤집기를 시도하는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님이다!’
저 좀 일으켜 주세요!
손을 파닥파닥 휘젓자, 곧 몸이 허공에 부웅 떠서 자리에 앉혀졌다. 아니, 앉았다고 생각한 다음 순간, 나는 너른 품에 푹 파묻혀 있었다.
‘어……?’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깜빡거렸다. 오자마자 나를 끌어안은 공작님의 숨소리가 조금 불안정했다.
“공작님?”
“……카티.”
커다란 손이 내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공작님이 갈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괜찮아?”
“네에. 저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지럽다거나, 토하고 싶다거나, 머리가 아프다거나.”
“전혀 안 그래요.”
그럴 리가 없는데, 내 등과 어깨를 쓸어내리는 손이 조금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이나 길게 숨을 내뱉었다가, 참았다가, 다시 짧게 들이켜기를 반복하던 공작님이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었다.
“당분간은…… 탑에 가지 말고. 아카데미 입학도 미루고.”
“네에? 그치만……!”
“그런 걸 시키는 게 아니었는데……. 보통의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작고 약한지 내가 종종 잊는다.”
“어…….”
“미안해.”
공작님은 내 목소리를 듣고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길게 흘려 내는 숨에 자책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로켓에 들어갔다 나온 시간은 바깥 기준으로 1초도 안 되는 찰나일 텐데, 왜 갑자기……?’
공작님도 그렇고, 저만치서 훌쩍이는 마가렛도 그렇고. 또…….
“드디어 일어났구나, 카티!”
어느새 문밖에서 베르너와 아르닌 남매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아래층까지 전달된 듯했다.
아르닌 언니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설움이 왈칵한 표정을 지었다. 베르너가 어깨가 들썩일 만큼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이시여. 제기랄, 신 따윌 찾아본 지가 언젠지…….”
아무래도 내가 쓰러졌던 모양이다. 그리고 쓰러진 날로부터 시간이 꽤 많이 지난 것 같았다.
나를 꼭 끌어안고 있던 공작님이 천천히 팔에 힘을 풀었다. 그제야 난 공작님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작년에 방계의 사업 구조도를 재편성하느라 꼬박 한 달간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을 때처럼, 공작님의 만면에 피로색이 짙었다.
“카티샤.”
“네!”
“학교 안 가도 돼. 꼭 1등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
“아무것도 안 하고 놀기만 해도 돼. 인정받겠답시고 뽈뽈 안 돌아다녀도 되고, 마검 같은 거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이제 아무도 감히 네게 자격을 증명해 보라는 개소…… 아니, 그런 걸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늘 차분하고 여유롭기만 하던 분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초조하고 괴로워 보였다.
공작님이 나보다 조금 밑에서 눈을 맞추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아프지 않고 쑥쑥 크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알겠어?”
“네에…….”
“아무도 너 안 죽여.”
“…….”
“그런 생각도 하지 마.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상황이 조금 심각해 보였다.
내 어벙한 표정을 본 공작님이 꺼질 듯한 신음을 내며 손으로 눈두덩을 꾹 눌렀다.
“그놈의 시험. 내가 괜히…….”
이제 보니 영락없이 걱정에 밤잠 못 이룬 모습이었다.
‘어떡하지, 나 진짜 많이 아팠나 봐.’
곧이어 베르너와 아르닌이 한꺼번에 내게 달려드는 바람에, 그 생각은 곧 확신이 되었다.
* * *
한바탕 눈물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야, 나는 마가렛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공작님과 서재로 올라가시는 길에, 갑자기 아기씨께서 멈춰 서시더니, 불러도 아무런 반응도 없으시고, 듣지도 보지도 못하시는 것처럼 멍하니 서 계시다가…… 곧바로 쓰러지셨어요.”
“힉.”
“그리고 꼬박 일주일 내내 열이 펄펄 끓었어요. 주치의는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지, 열은 내릴 기미가 안 보이지, 아기씨께서는 자꾸 헛소리만 하시지…….”
“히익.”
내가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마가렛이 훌쩍거리며 에이프런으로 눈물을 찍어 냈다.
“그런 원인 모를 증상은 보통 오러 순환 장애에서 비롯하곤 하니까……. 루테 도련님도 그렇게 돌아가셨으니까요…….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
아.
나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그제야 헤르젠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기억이 났다. 루티어드 님께서 오러 폭주로 손쓸 틈도 없이 돌아가셨다고……. 그제야 공작님의 유난히 떨리던 손과 과민하게 반응하던 목소리가 이해가 갔다.
마가렛이 내 뺨을 쓰다듬으며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전 그분께서 그렇게 새하얗게 질린 걸 11년 만에 처음 봤어요. 무사히 깨어나셔서 너무너무 다행이에요, 아기씨…….”
오러 장애와 같은 특수한 질병에는 약도 없었다. 오러 유저 자체가 대륙에 열 명도 채 안 되니, 연구 자체도 느렸다. 유력한 원인만 몇 가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과도한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공부 안 해도 된다고 하셨구나.’
블라스코 사람들은 내가 네 번이나 되는 상속 시험을 치르며 스트레스를 있는 대로 다 받다가, 결국 시험을 모두 무사히 통과하자마자 쓰러졌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래서 내게는 당분간 절대 안정이라는 처방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젠 정말 멀쩡한데.’
혹시나 해서 오러를 끄집어내 봤지만, 지난번 아이칼이 정화해 준 덕분에 여전히 내 오러는 맑은 노을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러 불균형이나, 순환 장애 때문은 아닌데, 그럼 난 왜 쓰러진 거지?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도 달라졌다.
지금까지 로켓 속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바깥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 갑자기 일주일이 지났다니?
‘사라진 세계와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가?’
그 이유가 가장 유력했다. ‘이어지는 세계’는 내가 ‘사라진 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분명했다. 하기야,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니까.
‘그럼 로켓 속에서 ‘사라진 세계’와 만날 때마다 시간의 흐름이 꼬이는 건가 보다.’
더해서 내 몸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말이지.
한바탕 앓고 나니, 온 저택의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극도로 조심하는 것이 느껴졌다. 멸균실에서 막 나온 시한부 환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당분간은 푹 끓인 오트밀이나 부드러운 야채 스튜 같은 것만 드셔야 해요, 아기씨.”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11년 전의 그 일이 다시 반복되는 줄 알고…….”
“예끼, 이 인간아. 입조심해. 말이 씨가 될라!”
나는 그 모습들을 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절대 건강하자.
‘블라스코에 그런 비극은 한 번이면 족해.’
게다가 안심시켜야 할 이는 공작님과 공자님, 아르닌 언니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이불을 코까지 내리고 힐끔 침대맡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인간화한 아이칼이 오도카니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칼은 공작님만큼이나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심지어는 입술에까지 핏기가 없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다 새하얬다.
나는 아이칼이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아키, 안아 줘.”
이불을 넓게 펼치고 손짓하자, 아이칼이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소년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곧장 침대 위로 올라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에구. 얘는 또 얼마나 놀랐을까.’
안쓰러운 마음에 아이칼을 꼭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내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푹 파묻은 아이칼이 한참 만에 중얼거렸다.
“거기 들어가지 마…….”
“응, 알겠어.”
“거짓말.”
“에이. 거짓말 아니야.”
“이렇게 말해도 다시 들어갈 거면서. 카티는 내 말은 하나도 안 듣는다.”
아이칼의 목소리에 서러움이 한가득이었다.
‘짜식, 나랑 열 달이나 붙어 지냈더니 이제 날 제법 잘 파악하고 있군.’
나는 잘게 들썩거리는 소년의 등을 도담도담 쓸었다.
“진짜야. 당분간은 안 들어갈 거야. 영령의 탑에 가는 횟수도 줄일 거고.”
어차피 당분간 [지.우.마>의 새 회 차가 열릴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상황이 진정되고 나니, 로켓 안에서 ‘사라진 세계’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다시 떠올랐다.
‘니엘라의 등장으로 어긋나 버린 것들.’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이가 바로 아이칼이었다.
니엘라 때문에 마검에 잠식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지독한 배신감을 느끼며 그녀의 목을 졸라 버리기도 하는, 원작의 말미에서 무척이나 불안정해 보였던 인물.
‘그 세계가 결국 멸망했다면, 어쩐지 아이칼도 한몫을 단단히 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는 턱밑을 얕게 스치는 불규칙적인 숨결을 느끼며 계획을 구체화했다.
일단 첫 번째, 니엘라가 아이칼에게 절대 접근하지 못하도록 훼방 놓는다.
흥.
나는 콧김을 뿜으며 아이칼의 부드러운 머리 타래를 전투적으로 쓰다듬었다.
내 친구는 내가 지켜!
‘그리고 또 뭐가 있지? 니엘라가 등장함으로 인해 완전히 망해 버린 거.’
블라스코의 악명들?
아, 그래. 니엘라가 정보를 후작가로 퍼다 나르는 바람에 블라스코가 손해를 봤던 게 몇 개 있었다. 이웃 왕국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황실의 훼방 때문에 어그러진 적도 많았다.
‘그것들을 한꺼번에 무산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면.’
역시 하나뿐이다. 나는 비장하게 눈을 빛내며 결론을 내렸다.
니엘라가 블라스코에서 활동을 개시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녀를 잡아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