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98)
98화
* * *
아이칼을 달래며 머리를 굴린 탓에 과부하가 왔는지, 나는 초저녁부터 도로롱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깊은 밤중 어느 순간, 내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고 이마를 짚는 손길에 부스스 눈을 떴다.
“……?”
할아버지?
덜 뜬 시야에 검은 머리카락이 너울거렸다. 헤르젠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혀 꼬인 소리로 상대를 불렀다.
“공작님…….”
“더 자. 괜찮아.”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오히려 잠이 달아나 버렸다. 퍼뜩 아이칼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같이 잔 것 같은데.
다행스럽게도 아이칼은 다시 본체로 돌아가 있었다. 내 팔을 베고 잠든 눈표범의 따끈한 등이 고르게 오르내렸다.
사위는 어두컴컴했다. 새벽이 오려면 한참이 남은 한밤중이었다. 공작님의 표정은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걱정되어서 오신 걸까?’
몇 달 전이었다면 이 무슨 민망한 비약이야, 자의식 과잉은 금물.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혔을 텐데…….
이제 나는 조금씩 깨달아 가는 중이었다.
‘공작님이 성도 주셨고, 미들 네임도 주셨어.’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살라고, 여자인 데다 방계 출신이라는 약점을 안고도 블라스코의 가주 자리에 오른 가주님의 이름을 내 미들 네임으로 붙여 주었다. 공작님에게서 헤르젠 할아버지의 얼굴이 어렴풋이 겹쳐 보였다.
내가 점점 더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는 걸 어둠 속에서도 보신 모양이었다.
공작님이 작은 소리로 나를 얼렀다.
“왜 안 자? 아픈 꼬맹이는 푹 자야 해. 눈 감고 코 자.”
“잠 깼는데에…….”
자야 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공작님 같았다.
나는 이불보를 쥐고 쭉 잡아당겼다. 열심히 당겼지만 아주 조금 빠져나온 이불 끄트머리가 공작님의 무릎 어디쯤에 덮였다. 공작님이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세레이나가 너를 봤으면 마음에 들어 했을 텐데.”
“세레이나……?”
세레이나가 어느 분의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무척이나 다정하고 따듯한 분이셨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공작님의 목소리에 저렇게 그리움이 가득 배어 있을 리가 없다.
또 그때처럼 공허한 눈을 하고 계실까?
나는 몸을 뒤척이며 고개를 들었다. 차차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보니 공작의 안색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
시선을 허공의 어느 한 지점에 아무렇게나 내던지듯 두고서, 공작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리고 나를 쥐 잡듯 잡았겠지. 이런 식으로 안일하게 굴면 안 된다고.”
“…….”
“아이는 혼자 자라는 게 아니니까…….”
그러나 깊이 모를 상념에 잠겼던 푸른 눈은 곧, 매서운 안광을 덧입었다.
“나는 더는 못 잃어.”
“…….”
“그러니 너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키울 거야.”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렸다. 미묘하게 달라진 오러의 흐름에 어깨가 흠칫 말렸다.
아무래도 내가 쓰러진 일이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 모양이었다. 공작님은 무언가를 잃는다, 혹은 잃을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 자체에 극심한 괴로움을 느끼는 듯 보였다.
보이지 않는 짐이 공작님의 넓고 반듯한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아마도 가주라는 자리가 그에게 지우는 버거운 책임감일 것이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나는 혼자서도 잘 클 수 있는데…….’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은 못 되더라도, 옆에 함께 쪼그리고 앉아서 혼자가 아니라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고 싶다. 나는 공작님 이름을 아니까.
꿈지럭대며 베개 밑에서 납작하게 접은 종이를 하나 꺼냈다. 내가 블라스코의 호적에 이름을 올린 날 신이 나서 써 두고 매일 밤 몰래 열어 봤던 것이다.
“이거어…….”
내가 우물쭈물 그걸 내밀자, 공작님이 그것을 가져가 펼쳤다. 그리고 얼마간, 침묵이 이어졌다.
종이 위에 또박또박 누운 글씨를 한동안 응시하던 공작님의 입매가 아주 천천히 허물어졌다. 나는 잠결에도 민망한 기분을 무릅쓰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아, 아빠.”
“…….”
“아부지…….”
위태로운 지금의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드, 듣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는데.’
이미 저질러 놓고도 나는 은근슬쩍 눈치를 살폈다.
오래 침묵하던 공작님이 마침내 긴 한숨에 웃음을 섞어 흘려보냈다. 어둠 속에서 들짐승의 것처럼 형형하게 빛나던 푸르른 안광이 스륵 걷혀 나갔다.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 공작님이 이불을 내 코 밑까지 꼭꼭 덮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장난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오냐.”
“헤헤…….”
“자고 일어나면 아버지랑 아침 먹자.”
“네에.”
공작님이 한결 편안해진 모습을 보니 덩달아 내 기분도 좋아졌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나 봐.
나는 머릿속 페이지에 공작님의 원래 이름을 쓰고, 그 옆에 등호를 그려 넣은 다음 ‘아빠’라고 적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제 매일매일 부를 수 있지!’
입꼬리가 헤실헤실 올라갔다. 공작님이 잠들 생각을 하지 않는 내 눈을 아예 손바닥으로 가려 버렸다.
“이제 자. 아이는 이런 밤중에 깨어 있는 거 아니다.”
“네에!”
나는 눈을 꼭 감았다. 잠들기 전에 가시면 어쩌지 했는데, 수마가 솔솔 쏟아질 때까지 내 등을 토닥이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 * *
아이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뒤, 루테는 자신의 침실로 향하지 않고 곧장 서재로 내려왔다. 서재에는 제미언이 아직 대기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는 서신 보냈어?”
“예, 각하. 하지만 이 제안을 교수진들이 받아들일지는……. 이제껏 입학을 보류한 사례는 없다고 합니다.”
“안 되면 되게 하면 되지. 쟤를 지금 어딜 보내? 언제 또 오러가 날뛸 줄 알고.”
블라스코로 들이자마자 멀리 떼어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이가 갑작스레 쓰러지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했을 것이다.
아르템령 밖에는 승냥이들이 많다. 블라스코의 약점을 찾기 위해 근방을 호시탐탐 맴돌고 있을 황실과 오르겐 후작의 수족들.
어차피 수도에 아이의 존재가 드러난 것, 대놓고 얕잡아 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아예 대대적으로 아이의 이름과 그가 직접 내린 미들 네임을 퍼뜨렸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겠는데.’
엄밀히 따지면, 카티샤가 일주일이나 앓은 것은 정적들의 술수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루테에게 11년 전의 악몽을 생생히 되살리기에는 충분했다.
오러 폭주. 그 전조 증상이 전신에 감도는 불길한 붉은 빛과 오감이 차단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반응하지 않는 몸이었다.
황성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오르겐 후작과 두어 마디를 섞고, 마차에 올라 막 황성을 나온 순간 그 일이 벌어졌다. 오러 순환계를 교란시키는 특수한 물질을 형에게 주입했던 게 틀림없다. 빌어먹게도 심증뿐이었지만.
“……후우.”
루테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손쓸 틈도 없이 숨이 끊긴 형제의 시신을 간신히 뇌리에서 잡아뗐다.
‘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하게 두진 않을 테니.’
하루도 경계를 늦춘 적이 없건만, 새삼스럽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열에 들뜬 아이가 장황하게 중얼대던 헛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나도, 살고, 싶었…….”
“살려 주세……. 돌아갈래…….”
깨어나고 나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아이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빌어먹을. 아직도 믿음을 못 줘서.’
루테는 이를 뿌득 갈았다. 간신히 자괴감을 밀어내고 이성적으로 생각을 이어 붙였다.
‘내부의 적은 다 처리했으니, 이젠 외부의 적에 집중할 때인가.’
황실과 오르겐이 가장 먼저 노릴 만한, 가장 만만한 블라스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제미언. 앞으로 1년 내로 비에스토 아카데미 검술부 선생들, 블라스코 직속 기사들로 싹 갈아 치워. 다른 교직원들 중에도 이쪽 사람으로 교체할 만한 인간들이 있나 알아봐. 특히 학내 관리인과 경비원들, 순찰병들까지 싹 다.”
“알겠습니다. 아마 한자리 차지하고 앉은 늙은 교수들 외에 다른 젊은 인력들은 건드려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위험 요소가 단 하나도 없도록 신경 쓰도록.”
사실 루테는 아이를 아르템에서만 꼭꼭 숨겨 두고 키우고픈 마음이 굴뚝이었다. 문제라면, 카티샤가 학교라는 곳에 굉장한 기대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 달란 대로 다 들어주고 싶으니 큰일인데.’
루테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아이가 잠결에 제게 준 쪽지는 아직도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특별 취급을 해 주는 건지, 그의 이름은 펜으로 꼭꼭 눌러 굵게 써 놓았다. 그리고 제 이름 밑에는 작은 이파리가 달린 오렌지를 하나 그려 놓았다. 눈 코 입도 야무지게 콕콕 박아 놓았다. 카티샤가 그에게 깜찍한 쪽지를 쓸 때 늘 그려 넣곤 하는 제 자화상이었다.
다시 보아도 하릴없이 실소가 비어져 나왔다. 이렇게 예쁜 짓만 골라 하니 안 들어줄 수도 없고…….
그 밑에는 마찬가지로 또박또박, 두어 줄이 더 적혀 있었다.
“…….”
제미언이 물러간 뒤에도, 루테는 한동안 그 구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래오래. 함께.
‘함께…….’
오래 함께하지 못했던 이들의 얼굴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루테는 책상 구석에 놓인 손바닥만 한 흉상에 흘끗 시선을 던졌다. 세월의 정원에 놓을 헤르젠의 동상을 제작하며 작은 크기로 따로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잘 지킬 수 있겠죠, 아버지.’
당신이 남긴 아이.
이제는 자신의 양녀가 된 아이.
‘무사히 잘 자랄 수 있겠지. 베르너와 아르닌처럼.’
완벽한 아버지는 못 되어도 최소한 외부의 풍파에 다치지 않게 지킬 수는 있겠지.
혹여 어려움이 생기더라도, 이제까지와는 달리 루테에게는 곧장 찾아갈 탑이 있었다. 헤르젠은 그곳에서 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노력해 보겠습니다. 제 힘이 닿는 한, 끝까지.”
루테는 나지막하게 그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훅, 가볍게 분 촛대 끝에서 불꽃이 사그라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