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99)
99화
* * *
다시 팔팔하게 살아난 뒤로, 나는 종종 정원에 나가 공작님과 차를 마셨다. 물론 나는 우유나 주스였지만.
가끔은 아르닌 언니나 공자님과 함께 정원에서 오찬을 들기도 했다.
내가 앓아누운 일주일간 저택에는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제국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오러학 연구자가 저택에 상주하게 되었고, 몸보신에 좋다는 귀한 약재들이 디저트 대신 테이블에 올랐다.
“카티샤.”
나는 오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를 담은 컵을 스윽 밀어내려다 딱 걸렸다. 공작님이 도끼눈을 뜨고 날 응시하고 있었다. 베르너와 아르닌도 마찬가지였다.
“머, 먹어요! 저 약 엄청 잘 먹어요.”
결국 눈물을 삼키며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걸레 빤 맛이 났다.
공작님이 내 입에 사탕 같은 것을 쏙 물려 주길래 얼른 씹었는데, 구리구리한 향이 나는 찐득한 환이었다. 나는 극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공작님이 울먹울먹한 나를 살살 달랬다.
“삼켜, 얼른. 삼키면 선물 줄게.”
“앙 항키고 앙 바들래여(안 삼키고 안 받을래요)…….”
“어허.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아, 아쁘아.”
공작님이 멈칫했다.
나는 이때다 하고 컵에 환을 우웩 뱉은 뒤,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빠!”
저런 걸 생으로 씹어 먹었다간 생명이 위험해질 게 뻔했다.
놀란 듯 나를 빤히 바라보던 공작님이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다고 통할 것 같아? 아주 그냥, 부르랄 땐 안 부르고 저 내킬 때만.”
“저 이거 안 먹고 대신 선물 받을래요, 아빠.”
“안 돼. 이건 오러 안정에 아주 좋은……”
“히잉…….”
“아주 좋은……”
“아빠아…….”
“…….”
“안 먹을래…….”
생존을 위한 필사의 어리광이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인 공작님이 내가 환을 뱉은 컵을 어딘가로 휙 치워 버렸다. 그러고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 양 뺨을 쭉쭉 늘렸다.
“그래, 먹지 말자. 다른 약재는 다 먹었으니까 저건 내일 먹으면 되지, 뭐.”
“헤헤.”
“대신 내일은 어림도 없어.”
아싸. 내일도 똑같이 써먹어야지.
나는 행복하게 소르베를 먹기 시작했다.
“카티, 나한테도 해 봐.”
아예 의자를 이쪽으로 돌려 앉은 베르너가 나를 재촉했다.
“오빠, 해 봐. 오빠.”
“오빠아.”
“……귀여워.”
베르너가 양 손바닥으로 내 뺨을 꾸욱 짓눌렀다. 나는 하마터면 크게 한 입 떠먹었던 소르베를 뿜을 뻔했다.
‘요즘 내 볼이 성할 날이 없네…….’
한참이나 베르너에게 내 양 뺨을 주물럭당하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 우렁차게 나를 불렀다.
“우리 막내 공녀님!”
호미 주방장님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한 손으론 커다란 돔 트레이를 받쳤고, 다른 손에는 디저트 트레이를 든 채였다.
그 뒤로 제미언이 거대한 꽃다발을 들고 따라왔다. 마가렛과 카렌, 로사, 키스 경, 헤겔 경, 루시스 경도 함께였다.
‘뭐, 뭐지?’
왜 다들 이리로 오지?
내가 어리둥절해서 공작님을 올려다보자, 공작님이 저쪽을 보라며 고갯짓했다. 어느새 테이블 위에 커다란 돔 트레이가 놓여 있었다.
“네 거야. 열어 봐.”
“……?”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돔 뚜껑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트레이 위에 놓인 건 알록달록한 봄 과일들로 장식한 오렌지색 케이크였다.
“짜잔! 일등 주방장 호미가 우리 막내 공녀님의 탄신일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생일 케이크랍니다!”
“생일 축하해, 카티.”
아르닌 언니가 싱글벙글 웃으며 케이크를 내 쪽으로 밀어 주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케이크 위에 초콜릿으로 쓴 내 이름과 11이라는 숫자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4월의 첫날이었다. 나는 오늘 열한 살이 됐다.
“이제 진짜 제 주인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해요, 아기씨. 아기씨가 블라스코에 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걱정 없이 무럭무럭 자라는 일만 남으셨어요.”
마가렛과 제미언을 비롯해 항상 내 편이 되어 줬던 이들이 다정한 축하 인사를 건넸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입을 한껏 오므렸지만, 마지막으로 공작님이 입을 열었을 때엔 결국 참지 못했다.
“생일 축하해, 우리 막내.”
“네에…… 히끅, 감사, 힝, 합니다아…….”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나를 축하해 준 모든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어 버렸다. 공작님이 헛웃음을 지으며 나를 안고 토닥토닥해 주었는데, 그 때문인지 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블라스코에 온 걸 환영한다, 카티샤.”
나를 다정하게 내려다보는 공작님의 눈이 꼭 볕에 따끈하게 데워진 바다 같았다. 언제든 할아버지에게 하듯 달려가 안길 수 있고, 어리광을 부려도 되고, 내가 뭘 해도 안전하게 감싸 줄 바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작년 6월, 이곳에 쭈뼛쭈뼛 발을 들였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처치 곤란한 골칫거리에 불과했는데. 이제 이곳에는 나를 환영해 주는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가족도, 친구도, 좋은 사용인들도, 멋진 기사님들도 있다.
내 무릎 위에 몸을 말고 있던 아이칼이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나는 꼬물거리는 눈표범을 꼭 끌어안았다.
‘여기서 자랄 거야. 누구보다 블라스코답게!’
엄청 잘 커서, 어긋난 것 하나도 없게 내가 다 꿰매 줄 거야. 우리 가족도, 아이칼도, 그리고 니엘라도. 틀어져 버린 모든 것들 전부 다.
할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지난 모든 생일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행복한 나의 열한 살 생일이었다.
* * *
“조심해, 조심조심……. 이봐, 가로 수평이 안 맞잖아. 오른쪽으로 조금 더 들어.”
“옆의 초상화에 부닥치지 않도록 주의해. 그림이 조금이라도 상하면 안 된다고.”
“노이먼, 노이먼! 우리 아기씨 얼굴 뭉개진다!”
늘 적막한 어둠에 휩싸여 있던 블라스코 역사 전시관의 복도에 환하게 빛이 밝혀져 있었다.
오늘 이곳에 새로운 액자가 걸릴 예정이다. 대대로 블라스코의 초상화를 담당하던 화가가 무려 반년이나 쏟아부어 완성한 그림이었다. 가로 길이가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웃돌 만큼 크기가 상당했다.
그림은 푸른 공단으로 가려져 있었다. 사용인들이 주의를 기울여 그림을 벽에 걸었다. 34대 가주의 단독 초상화 옆, 그리고 10년도 훨씬 더 전에 그렸던 34대 직계 가족의 그림 바로 아래의 빈 공간에 새로운 액자가 딱 들어맞았다.
역사 전시관의 관리인 노이먼은 만족스럽게 손을 털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공작을 발견하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 각하. 오셨습니까.”
“다 걸었나?”
“예. 이제 덮개만 벗기면 됩니다.”
공작이 고개를 까딱하자, 낮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하인이 그림의 덮개를 벗겨 냈다. 가려져 있던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
블라스코의 상징인 푸른색이 많이 섞인 그림이었다.
나비와 칼날의 문양을 그린 깃발과 권력을 상징하는 용을 수놓은 깃발이 교차하며 배경을 채웠다. 그림 곳곳에서 광채를 뿜어내는 자수정이 블라스코의 재력과 고귀함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화려하게 수놓은 짙푸른 소파에는 세 명이 앉았다. 나머지 한 명은 그들 뒤에 섰다. 뒤가 베르너, 그리고 소파의 왼쪽부터 아르닌, 카티샤, 그리고 자신이다.
스케치한 순간을 그대로 재현해 낸 듯 인물들의 표정이 다채로웠다. 각자의 자세와 시선도 꽤나 자유분방하다.
루테는 그림의 정중앙을 한참 보다 피식 웃었다.
누가 보아도 검사인 세 명에게 둘러싸인 그림의 중앙에, 혼자 귀여운 프릴을 단 어린이용 드레스를 입은 주황 머리 꼬마가 함빡 웃고 있었다.
“어느 집 막내인지 참 귀엽기도 하지.”
검은색과 푸른색 일색인 그림에 주황색이 당당히 파고들었다. 얼핏 어울리지 않는 색 조합이었으나, 아이의 존재는 어둑한 그림 전체에 생기를 입혔다.
루테는 그 뒤로도 한참을 말없이 벽만 바라보았다. 상념에 깊이 침잠한 주인의 분위기를 읽은 사용인들이 조용히 물러났다.
‘처음인가. 내 얼굴이 이곳에 걸리는 게.’
지금까지 12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가주 자리를 지켜 오며 새로운 그림을 그리라 명령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곳이 언젠가 조카들끼리 오붓이 추억을 되짚을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루테는 굳이 그의 존재를 더하지 않았었다.
그 때문인지, 루테의 눈에는 황량하게까지 보이던 벽이 지금은 세 점의 그림으로 빈틈없이 꽉 차 있었다.
무엇 하나 이질적이거나 외따로 떨어진 것이 없다.
넷의 그림을 그려 이곳에 걸고 싶다는 건 카티샤의 생각이었다. 그림 속 아이가 제 손을 꼭 붙들고 있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끊임없이 일깨워 주듯이.
루테는 충동적으로 중얼거렸다.
“세니, 나는 잘 지내.”
앞으로도 잘 지낼 것 같아. 몇 년이 더 지난대도.
“……그래도 많이 보고 싶다.”
저 그림 속에 너 하나만 더 있다면 실로 완벽했을 텐데.
조금 목이 메었다. 그리운 사막의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무상하게 사라진다.
루테는 그림 한 점 남기지 못하고 떠난 연인을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기다려. 언젠가 네게 갈 때 너와 형을 죽인 것들의 목을 함께 가져갈 테니.”
오르겐 후작, 그 딸, 그리고 그 남편. 아스트로카 황실 그 자체.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든 반드시 뿌리 뽑아 사랑하는 이들의 무덤 앞에 전시하리라.
루테는 이만 시선을 접었다.
그는 아이들을 불러오기 위해 돌아섰다. 아이들에게는 아직 그림을 보여 주지 않았다. 막내는 물론이고, 첫째와 둘째마저도 완성된 그림을 보고 싶어 동동거리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도 그와 정확히 같은 감상을 가지리라는 예감이 든다.
벽에 걸린 세 점의 그림 전체가 비로소 완벽해진 하나의 작품이었다. 맨 꼭대기에 이 거대한 작품의 제목이 새로이 자리 잡았다.
[제국력 438년.34대 블라스코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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