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Overlord RAW novel - Chapter 475
제475화 멍청한 나귀야 어서 가자
항소운은 걸음을 재촉하여 호위 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혹여 호위대장이란 자가 말을 바꿀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역시 보법에선 따라올 자가 없었다. 전속력을 다해 내달리자, 제존에 버금갈 정도로 빨라졌다.
속도를 높이자, 과연 뒤에서 여러 명이 빠르게 쫓아왔다.
그들은 인황들로 최상급 인황도 섞여 있었다. 항소운 한 명을 쫓는데 인황 여럿을 대동하다니, 무리의 위세가 가히 짐작되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앞서 달려가던 항소운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녀석이 안 보입니다.”
누군가 최상급 인황에게 말했다.
“계속 찾아라. 녀석의 실력으로 그렇게 빨리 도망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분명 모래 밑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최상급 인황의 명령에 따라 다들 항소운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멀찌감치 도망친 그를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역시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어.’
항소운은 명혼공간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리를 벌렸어도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무리가 더욱 강한 자를 보내 쫓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뒤로 항소운은 쉬지 않고 한참을 달렸다. 이윽고 추적자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도적 떼만 있는 줄 알았는데 어디서 저런 무리가 나타난 거지? 이곳에 사막만 있는 게 아니란 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녀석 눈치는 빠르구나.”
갑작스러운 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하나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동 선배님, 놀래키지 마십시오.”
항소운이 고개를 움츠리며 말했다.
그러자 웬 사람과 나귀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나타났다. 너무 놀라서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좀 전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니 당연히 놀랄 만도 했다.
노인의 무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항소운이 조심스레 물었다.
“선배님,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일은 무슨. 그저 네 녀석과 헤어지기 아쉬워서 그런다.”
노인이 재미있다는 눈길로 항소운을 찬찬히 보며 말했다.
“제가 뭐라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노인의 괴팍한 성격으로 미루어보건대 필경 좋은 일은 아닐 터였다.
“그래, 그럼 바로 본론을 말하마. 지금부터 내 시종이 되어 함께 다녀야겠다.”
노인이 단도직입적으로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
“그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은데요.”
항소운이 어두운 낯빛으로 대답했다.
“왜, 싫은 게냐?”
노인이 눈을 부릅뜨며 쏘아붙였다.
“저는 용봉 학당의…….”
이유를 설명하려는데 노인이 손을 휘저으며 말을 가로막았다.
“용봉 학당으로 겁줄 생각 말아라, 난 하나도 겁 안 나니까. 하기 싫어도 넌 오늘부터 시종 노릇을 할 수밖에 없어. 나귀야, 출발하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귀 뒤편으로 단출한 마차가 등장했다.
노인은 항소운을 잡아끌어 마부 자리에 앉혔다.
“자, 우선 나귀 모는 법부터 익혀야 하니 여기 대나무 장대를 잡거라.”
항소운이 울상을 하고 물었다.
“시종인데 나귀 모는 법도 배워야 해요?”
“당연한 소릴. 아니면 나더러 나귀를 모라는 뜻이냐? 내 평생 이 늙은 나귀를 몰았으니 이제는 편히 쉴 때도 되었지.”
노인은 마차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자 늙은 나귀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할배,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렇게 내가 꼴 보기 싫으면 놓아주던가! 누구는 할배가 좋아서 같이 다니는 줄 알아?”
“아이고, 시끄럽다. 거, 말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그렇게 가고 싶으면 가라지!”
노인은 드러누운 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할배, 다시 말해봐! 제대로 사과하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줄 알아!”
나귀도 보통 고집이 아니었다.
“넌 멍하니 뭐 하고 있어? 어서 저 녀석 궁둥짝을 때려라. 그래도 버티나 어디 보라지.”
노인은 드러누운 채 항소운을 발로 툭 차며 재촉했다.
“감히 그랬단 봐라!”
나귀도 질세라 호통을 쳤다.
항소운은 노인과 늙은 나귀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대나무 장대를 손에 꼭 쥐고 울상만 짓고 있었다.
항소운은 차마 노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대나무 장대에 힘을 살짝 주었다. 눈을 질끈 감고 나귀의 엉덩이를 때리려는데 별안간 나귀가 뒷발질로 항소운을 날려버렸다.
어찌나 세게 걷어찼던지 3품 인황인 그도 막아낼 겨를이 없었다. 순식간에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바람에 눈물이 찔끔 났다.
‘왜 이리 운수가 나쁘담.’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 정도로는 안 죽으니 냉큼 이리로 오거라. 내 너에게 나귀 다루는 법을 알려주마. 그럼 다시는 나귀에게 발길질을 당하지는 않을 게다.”
노인이 손짓을 하자, 항소운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마차로 되돌아왔다.
“자, 내가 하는 대로 따라하거라. 이랴, 이랴, 멍청한 나귀야 어서 가자…….”
노인의 나른한 곡조가 귓가에 들려왔다.
항소운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무슨 나귀를 다루는 법이란 말인가.
한데 이상하게도 꼼짝도 안 할 것 같던 늙은 나귀가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귀가 출발하자, 항소운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무슨 수를 써도 이 노인을 상대로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당분간은 잠자코 있다가 적당한 때를 봐서 은신 능력으로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노인의 무공이 뛰어나다 한들 설마 은신 능력까지 꿰뚫지는 못하리라.
나귀는 마차를 끌고 한 방향으로 직행했다. 느릿느릿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축지법을 구사하나 싶을 정도로 빨랐다.
항소운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나귀도 내공이 대단한 모양이구나.’
그는 불현듯 궁금증이 일어 노인에게 물었다.
“선배님,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노인은 잠이 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재차 불러도 아무런 대꾸가 없자 항소운은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늙은 나귀가 갑자기 멈춰 섰다.
“할배, 정문(庭門)에 도착했네.”
‘정문? 어디에 문이 있다는 거지?’
항소운이 의아하다는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끝도 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을 뿐, 다른 물체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 다시 돌아왔구먼.”
노인은 일어나 앉더니 멍한 눈을 비비며 대꾸했다. 그는 마차에서 내려 둥그런 영패를 꺼내더니 영패에 힘을 응집시켜 땅에 비추었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땅이 갈라지며 모래가 좌우로 밀려나더니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난 것이다. 그 옆에는 거대한 비석이 우뚝 서 있었다. 비석에는 힘찬 필체로 ‘지성정(地聖庭)’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항소운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절망사막에 이런 곳이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멍하니 서서 뭐 해, 어서 들어가지 않고.”
늙은 나귀는 이렇게 말하며 앞발을 날려 항소운을 계단으로 밀어 넣었다.
노인과 나귀도 뒤따라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들이 들어간 후, 입구는 소리 없이 닫혔고 사막은 원래 모습을 회복했다.
얼떨떨한 상태로 노인과 나귀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계단 끝에 도착했다.
뜻밖에도 누군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성정령(聖庭令)을 제시하십시오.”
문지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노인은 곧장 영패를 꺼내 그에게 보였다.
“이자는 누굽니까?”
문지기가 항소운을 가리키며 물었다.
“시종이네.”
노인이 살짝 짜증 섞인 얼굴로 대꾸했다.
문지기는 책자를 펴들고 뭔가를 적는가 싶더니 노인을 보며 말했다.
“여기다 이름을 적으십시오.”
“이런 고약한 놈을 봤나. 시종 하나 데리고 가는데 뭐가 이리 복잡해? 네놈이 맞고 싶어 환장했구나.”
노인은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는지 냅다 호통을 쳤다.
“이건 성정의 규율입니다.”
문지기가 냉랭히 말했다.
“빌어먹을 규율은 무슨!”
노인은 버럭 화를 내고는 항소운을 보며 소리쳤다.
“멍청히 서서 뭐 하냐! 어서 이름 적지 않고.”
항소운은 울며 겨자 먹기로 책자에 이름을 적었다.
그러자 문지기가 다시 말했다.
“피도 등록해야 합니다.”
“그냥 제가 들어가지 말까요?”
항소운이 목을 움츠리며 물었다.
“안 돼!”
노인과 문지기가 동시에 대답했다.
항소운은 하는 수 없이 피를 한 방울 짜내었다. 이렇게 해서 등록은 일단락되었다.
잠시 후, 노인이 손짓을 하며 불렀다.
“여기로 와라. 입구는 이쪽이다.”
항소운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노인 옆에 서자, 별안간 알 수 없는 힘이 몸을 휘감더니 그들을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켰다.
눈을 뜨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그는 어느새 이름 모를 도시에 와 있었다. 거마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눈에 봐도 굉장히 번성한 도시였다.
“여기가 어디지?”
항소운은 어안이 벙벙해서 중얼거렸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만 해도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신비로운 곳에 도착할 거라 상상했다. 엄격한 계급이 존재하고, 대단한 고수가 지키고 있어 범인은 얼씬조차 못 하는 그런 곳 말이다.
그런데 눈앞에는 전혀 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그저 아주 번화한 도심이었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넘쳐나서 무인은 물론이고 평범한 백성까지 섞여 있어 대단한 문파의 요지는 절대 아니었다.
“멍하니 뭐 하고 있냐? 어서 나귀를 몰아야지. 술 한잔 해야겠으니 술집으로 가자꾸나.”
노인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 항소운이 마차에 올라타 늙은 나귀에게 말을 건넸다.
“나귀 선배님, 이곳을 잘 아실 테니 술집으로 데려다주십시오.”
나귀를 다루는 곡조 따위는 흥얼거리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창피했다.
그런데 나귀는 항소운의 말을 들은 척 만 척하며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항소운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선배님, 빨리 가시죠. 동 선배님께서 술을 마시고 싶으시대요.”
그래도 나귀는 여전히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얘야, 내가 나귀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 그 노래 아니면 녀석은 꼼짝도 안 한다니까 그러네.”
“그, 그게 기억이 안 나서요. 아니면 다시 가르쳐주실래요?”
항소운이 식은땀을 닦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놈 봐라, 어서 부르래도 그러네!”
노인이 노발대발해서 호통을 치자, 항소운은 흠칫 떨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랴, 이랴, 멍청한 나귀야 어서 가자…….”
지성정(地聖庭)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건축물이 보존된 곳이었다. 이곳의 건축물은 기본적으로 정방형을 띠고 있고, 흙과 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목조 건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의 옷차림 역시 지역적인 특색이 강했는데, 사해진 사람들과 복장이 비슷했다. 마치 먼 옛날 사라진 사막 도시에 불시착한 기분이었다.
아득히 먼 옛날 절망사막이 생겨나기 전, 사막이 있던 자리에는 많은 도시가 있었다.
그러나 환경이 계속 악화하면서 도시는 모래에 파묻히고 말았고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 집단 이주를 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랜 세월 이곳에 형성되었던 문명은 송두리째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우연한 기회에 지성정에 오게 된 항소운은 이곳이 절망사막의 일부인지 아니면 다른 지역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이곳이 일찍이 사막에서 사라진 문명과 깊은 관련이 있을 거라 짐작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