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Overlord RAW novel - Chapter 488
제488화 지금은 금 솜씨가 얼마나 늘었을까?
물론 다른 남자였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혼사였다. 선녀 같은 외모에 출중한 무공, 거기다 집안까지 좋은 여인은 모든 남자가 바라는 이상형이니까.
그런데 항소운은 그를 마다하다니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항소운은 대장로를 따라 탐립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장로들이 놓칠 리 없었다.
사한표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세 번째 관문은 아무나 통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정말 대단한 무림인이 아니고선 절대 불가능하지요.”
호연박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두 사람 중 더 뛰어난 자를 부마로 간택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 항자헌 공자는 아가씨와 무공 실력도 비등하고, 또 항가는 우리 성정에 걸맞은 가문이니 항 공자를 부마로 택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 말에 몇몇 장로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찬성을 표했고, 일부는 입을 꾹 다문 채 대장로에게 시선을 보냈다. 대장로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노인은 바로 반대를 하고 나섰다.
“자네 두 사람은 항가로부터 얼마나 대단한 걸 받았길래 저 녀석과 아가씨를 이어주려 안달이 난 건가?”
“말조심하십시오. 저희는 아가씨와 성정을 위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한표가 발끈하고 나섰다.
“맞는 소리야. 아가씨 나이가 벌써 마흔이 다 되어가네. 정주께서 그 전에 꼭 부마를 간택하라고 하신 말을 잊었는가? 이 일은 더는 질질 끌어선 안 되네.”
호연박도 질세라 맞받아치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노인에게 물었다.
“설마 자네, 정주의 말씀을 어기려는 건 아니겠지?”
정주를 들먹여 노인의 입을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노인이 뭐라 반박을 하려는데 척발완아가 입을 열었다.
“다들 그만들 하시고, 대장로님의 말씀을 들어보시죠.”
대장로는 호연박과 사한표 쪽을 힐끗 보더니 담담히 말을 했다.
“다들 와서 예비 부마가 되신 항소운 공자께 인사 올리게.”
대장로의 말에 다들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척발완아도 크게 놀랐는지 몸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 역시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항자헌은 항소운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주먹만 불끈 쥐었다.
‘말도 안 돼. 저 녀석이 어떻게 석탑의 비밀을 풀었단 말이야!’
노인은 너무 놀라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기쁨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하하,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지. 예비 부마라 좋다, 좋아!”
대장로는 잠자코 있는 다른 장로들을 보며 언짢은 내색을 비췄다.
“다들 귀가 먹었는가? 내 말 못 들었어?”
대장로는 평소 권력 욕심이 없어 성정 내부의 사무를 묵묵히 처리할 뿐, 다른 일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2장로인 노인은 성격이 괴팍하여 보통 외부 일은 3장로인 호연박이 도맡아 처리하다 보니 여러 장로가 그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정주를 제외하고, 대장로의 명망이 가장 높다 보니 대장로가 화를 냈다 하면 다들 겁을 먹고 두려워했다.
“부마님께 인사 올립니다.”
장로들이 일제히 인사를 올렸다.
다들 대단한 위치에 오른 인물들이지만, 지금은 항소운에게 예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항소운도 더는 고집을 피울 수 없어서 이번만은 눈 딱 감고 행동하기로 했다.
“장로님들, 어서 일어나세요.”
노인은 기쁨에 겨워 항소운 곁으로 다가가더니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잘했다, 아주 잘했어! 하하하…….”
처음에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녀석 덕분에 일이 순조롭게 풀리자 어깨춤이 절로 났다. 이제는 볼수록 마음에 쏙 들었다.
“대장로님, 예비 부마께서 정주의 시험을 통과하신 것은 맞지만 아가씨와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 같습니다.
훗날 정주께서 출관하시면, 분명 탐탁치 않게 여기실 겁니다. 허니 지금 결정지을 게 아니라 나중에 논의하는 게 어떨는지요?”
호연박이 말했다.
“자네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 없네. 정주께서 이미 결정을 내리셨으니, 우리는 따르기만 하면 되네. 자, 그럼 대전으로 돌아가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대장로의 말에 호연박은 열불이 났으나,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다들 대전으로 돌아갔다.
항자헌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여 대전에 갈 필요가 없어진지라 귀빈실로 안내되었다.
대전으로 돌아온 후, 대장로는 항소운이 예비 부마가 되었으며 혼인 후에는 정식으로 성정 부마의 신분이 될 거라고 엄중히 선언했다.
다만 혼례는 정주의 출관 후 거행될 예정이나, 항소운의 신분은 천하에 널리 알려 성정의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항소운은 대장로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하루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겠어. 안 그랬다간 꼼짝없이 부마가 되고 말 거야.’
그렇게 지시 사항을 전달한 뒤, 회의는 끝이 났다.
항소운은 성안에 머물게 되어 노인과 얘기를 나눌 기회조차 없었다.
그는 아주 호화롭고 널찍한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황궁에 견줄 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곳이었다.
“부마님, 목욕과 환복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자색이 뛰어난 두 여인이 나타나 말했다.
그들의 옷차림은 적나라해서 꽉 찬 가슴과 그에 대비되는 잘록한 허리, 탄력 있게 올라간 둔부가 치명적인 매력을 자아냈다.
항소운은 그동안 아름다운 미인을 숱하게 봐온 터라 모처럼 색다른 매력을 갖춘 미녀들을 보자, 저도 모르게 욕정이 들끓었다. 이래 봬도 혈기 왕성한 숫총각이었다.
여인들은 욕조에 물을 받고 그 위로 향 내음 가득한 꽃잎을 뿌렸다. 방안 가득 꽃향기가 퍼지자, 기분이 묘해졌다.
“부마님, 물은 다 받아놓았습니다. 이제 옷 벗는 걸 도와드릴게요.”
여인들이 다가오자, 항소운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을 치며 양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그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그건 내가 직접 하겠소.”
여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중 한 여인이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부마님, 이러시면 저희가 난처해진답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저희가 벌을 받게 돼요.”
추월(秋月)과 추수(秋水)라는 두 시녀는 어려서부터 성정에서 자라난 여인들로, 자색이 곱고 무공도 뛰어나서 벌써 비천경 정점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설령 6, 7품 세력에 있다 하더라도 출중한 능력이었다.
항소운은 혼자 옷을 갈아입고 목욕을 하고 싶었으나, 그녀들의 애처로운 눈빛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시중을 들게 했다.
몸에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가 싶더니 옷가지가 그녀들에 의해 남김없이 벗겨졌다.
그는 일찍이 천둥에 몸을 단련한 터라 체격이 다부지고 건장했다. 건강한 남성의 몸이 눈앞에 드러나자, 추월과 추수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설레었다.
적극적인 성격의 추월이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부마님, 몸이 정말 좋으세요.”
그러면서 손가락 끝으로 몸을 살짝 쓸어내리자, 항소운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흠흠, 그럼 목욕하러 가겠소.”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욕탕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추월과 추수는 얼굴을 붉힌 채 뒤를 따라갔다. 그녀들이 등을 밀어주겠다고 하자, 항소운은 이번에도 거절을 못 하고 그녀들이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 사람은 머리를 살살 지압하고, 또 한 사람은 등을 밀어주었다. 그녀들의 몸에서 풍기는 분내인지 아니면 욕탕에서 나는 꽃향기인지 알 수는 없지만, 향긋한 내음이 쉴 새 없이 풍겨와 정신이 아찔했다.
몸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올라 당장이라도 그녀들을 물속으로 끌어당겨 혼욕을 즐기고 싶었다.
그래도 누구보다 자제력은 대단한 그였다. 그는 속으로 ‘청심주’를 읊으면서 욕정을 가라앉혔다.
그녀들이 어떻게 유혹을 해도 이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반 시진 후, 그녀들은 항소운에게 옷을 입혀준 뒤 밖으로 나왔다. 그녀들은 서로 마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더니 근처에 있는 다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아가씨 척발완아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그녀는 경대 앞에 앉아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복잡한 눈빛이었다.
대단한 가문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살았으나, 새장 속 새처럼 자유를 잃고 매여 살고 있으니 이 또한 슬픈 일이었다.
추월과 추수는 조용히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께 인사 올립니다.”
“그래, 목욕과 환복은 잘 도와드렸니?”
척발완아가 물었다.
“예, 아가씨.”
“그래, 어떤 분이시든?”
그녀의 물음에 추월이 대답했다.
“부마께서는 성인군자셨어요. 처음에는 어색하신지 긴장을 하셨으나, 이후에는 마음을 편히 하시고 저희가 목욕과 환복을 돕도록 맡기셨어요.”
“맞아요, 아주 바른 분이셨어요. 저희에게도 예의를 갖추시는 모습이 조금은 귀여워 보이던걸요.”
추수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척발완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앞으로 며칠간 부마를 보살펴드리도록 해. 어떤 요구를 하셔도 다 들어드리고.”
“예, 아가씨.”
두 여인이 공손히 대답했다.
추월과 추수가 나가고 나자,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혼인을 하라니,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한편, 항소운은 방에 앉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을 어떻게 벗어날까 하는 생각에 무공을 연마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못된 노인네, 어떻게 얼굴 한번 안 비출 수가 있지? 이제 어떻게 한담…….’
물론 은신술로 모습을 감추고 빠져나가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허름한 집에 두고 온 양장민과 무지군을 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노인에게 마지막 희망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부디 노인이 하루빨리 자신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길 바랄 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보름 후, 척발완아와 함께 거리로 나가 자신이 예비 부마가 되었음을 온 성정 사람에게 알려야 했다. 그때가 되면 이곳을 떠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릴없이 방안을 걷다가 문득 창가에 놓인 금(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창가로 걸어가 금 앞에 앉았다.
손끝으로 줄을 퉁기자 둥,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불현듯 궁금음이 떠올랐다.
“지금은 금 솜씨가 얼마나 늘었을까?”
옛 추억이 몰려와 그는 자연스럽게 곡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자릉종에서 도망친 후로 악기는 손을 댄 적이 거의 없는지라 처음에는 서툴렀으나, 그래도 어린 시절 익혔던 솜씨가 남아 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옛 감각을 되찾았다.
마치 샘물이 샘솟듯 ‘낙소요(樂逍遙)’라는 경쾌한 곡조가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이 곡은 자유롭고 유유자적한 삶을 꿈꾸며, 삶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었다.
경쾌한 음률은 창문을 타고 밖으로 흘러나가 근처 다른 방까지 전해졌다.
척발완아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듣다가 어느새 그 곡조에 함빡 빠지고 말았다.
그녀가 바라던 것도 아무런 구속 없는 자유로운 삶이 아니던가.
이 곡조는 그녀가 꿈꾸던 삶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어 오래도록 헤어나올 수 없었다.
얼마 후, 음률은 옛사람을 그리워하는 곡조로 바뀌었다. 금을 연주하는 사람은 아마도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부드러우나 슬픔이 느껴지는 그런 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