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Overlord RAW novel - Chapter 635
제635화 짝사랑이다, 아니다
“약씨 할아버지, 약천아. 두 사람 다 그간 고생 많았어요.”
이제야 항소운은 약로, 약천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시간이 생겼다.
“그런 말 말아라. 네가 우리의 결백만 알아주면 됐어.”
약로가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는걸요. 할아버지를 못 믿으면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이 어딨겠어요? 제가 이렇게 성장한 것도 다 할아버지 덕이잖아요.”
항소운은 내심 부끄러웠다.
한때는 약로의 충성을 의심했었지만, 이젠 그런 의심 따윈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 조그맣던 너를 커다란 약통에 넣어 두었었지. 요만하던 아이가 언제 커서 이렇게 잘생긴 청년이 되었을꼬.”
약로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간 내가 무사했던 건 제패천에게 이용 가치가 있어서였다. 놈은 내게 각종 약초를 배합해서 단약을 만들도록 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약천만 두고 떠날 수 없었단다. 내 보살핌이 없으면 저 어린 것은 벌써 세상을 떠났을 거다.”
“……할아버지,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
옆에서 약천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네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이 할아비는 기쁘단다.”
약로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런 슬픈 얘기는 그만 해요. 이제 제가 있으니 다 잘 될 거예요.”
항소운은 두 사람을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많이 놀라셨을 텐데 이만 가서 쉬세요. 전 제종 쪽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봐야겠어요. 우리 쪽으로 붙을 의향이 있는지 물어야죠.”
“저들이 배신할 수도 있는데, 겁나지 않느냐?”
약로가 물었다.
“저들에게 그럴 배짱과 능력이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항소운은 패기 있게 말을 뱉고는 대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 시각, 제종 사람들은 그의 부름에 따라 한곳에 모여 있었다.
제종 쪽에는 아직 꽤 많은 사람이 살아남아 있었다.
무공을 배우는 제자들부터 간사와 집사까지, 족히 육칠천 명은 되어 보였다.
7품 문파치고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나, 치열한 격전 속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 후 성급 힘이 휘몰아쳐 수천 명이 사망한 가운데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항소운이 나타나자, 덜컥 겁이 난 그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렸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소년 소녀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소년 소녀들은 대체 누가 자신들의 종문을 무너뜨리고 그 대단한 종주까지 쫓아냈는지 몹시 궁금했다.
“저 사람이 우리 종주를 쫓아낸 거야? 아무리 봐도 나쁜 사람 같진 않은데.”
“그러게? 진짜 잘생겼잖아.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온 것 같아. 이러다 홀딱 반하겠어.”
“이그, 정신 차려. 아마도 우릴 죽이러 왔을걸? 근데 아무리 봐도 악한 사람은 아닌 거 같단 말이야.”
“겉만 보고 어떻게 아냐. 제법 바르게 생기긴 했어도, 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일 줄 누가 아냐고! 어디 털끝 하나라도 건드려 봐, 우리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맞아, 나처럼 예쁜 여자한테는 분명 흑심을 품고 있을 거야. 흥, 혼인하기 전에는 네 맘대로 안 될 걸?”
“…….”
항소운은 어린 소년 소녀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감히 날 뭘로 보고! 하여간 어린 애들이란…….’
그는 좌중을 빙 둘러보고는 제존의 기세를 일으켜 그들을 단단히 압박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너희 중 나에 대해 아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더러는 누군지 모를 거다. 그건 중요치 않으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이곳은 제종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 자릉종이라 불렸다. 자릉종의 첫 종주는 항양전이고, 부종주는 제패천이었지. 그리고 난 항양전의 아들 항소운이다.
십일 년 전, 항양전은 비무를 위해 오마령으로 떠났으나 그 뒤로 소식이 끊겼고, 이때를 틈타 제패천이 반역을 일으켜 자릉종의 충신들을 대거 죽였지. 나 역시 떠돌이 신세가 되어 제패천 일당에게 계속 쫓겼으나, 다행히 목숨만은 부지했지. 그리하여 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아버지가 일궈낸 가업을 되찾고 제패천 그 역적을 처단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하지만 제패천을 놓친 게 한스럽구나.
아무튼 그의 아들 중 일부를 죽이고, 놈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신하들을 죽이고 나니 이제 너희들만 남았구나. 난 너희를 죽이고 싶지는 않다. 너희의 걱정과 달리 살인을 일삼는 미치광이는 아니거든.
이제 세 가지 선택지를 주마. 첫째, 내게 충성하는 거다. 그리하면 너희를 적극적으로 양성하여 훌륭한 무인으로 키우겠다고 약속하마. 둘째, 스스로 무공을 폐하고 이곳을 떠나라. 마지막 세 번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비록 적이기는 하나, 항소운은 그들을 최대한 배려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저들을 전부 몰살시켰을 테니 말이다.
“항소운. 네가 어떤 이유로 우리 문파를 점령했든 우릴 굴복시킬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다. 난 이곳을 떠나겠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며 배짱 좋게 대열을 빠져나갔다.
그자를 시작으로 몇 사람이 뒤따라 나갔다.
그들은 지체 없이 곧장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귀의 혈요가 쏜살같이 나타나더니 여러 마리로 나누어져 그들 몸에 달라붙었다.
녀석들은 세차게 피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으악!”
떠나가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혈요를 떨쳐내려 애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내 피가 전부 빨려 가죽만 남아버린 시체가 땅으로 떨어졌다.
제종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몇몇 소년은 너무 충격이 컸던지 그 자리에서 구토를 했고, 몸을 덜덜 떠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들 놀라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람을 저렇게 죽이다니, 너무 끔찍했다.
“다들 두려워 마시오. 이건 내가 혼자 벌인 일이라, 소주님과는 무관하오.”
서귀가 혈요를 불러들이며 유유히 말했다.
그는 충직한 노복처럼 항소운 뒤에 공손히 섰다.
일순 항소운을 바라보는 제종 사람들의 눈빛에 두려움이 짙어졌다.
저런 악인을 곁에 둘 정도라니.
저 항소운이란 자는 얼마나 더 악하단 소린가.
“……신복하겠습니다. 평생 종주의 곁에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누군가 넙죽 엎드리며 재빨리 입장을 표했다.
그 사람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이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신복하겠습니다! 평생 종주의 곁에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물론 이 상황이 못마땅한 자들도 더러 있었으나, 다들 무릎을 꿇는데 저들이라고 가만있을 수 있는가.
지금은 충성하는 척하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안전하게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항소운도 그런 마음을 품은 자들이 있다는 것쯤은 짐작했으나, 그렇다고 두렵지는 않았다.
어쨌든 제종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장차 병력을 새로 모집해서 세력을 확충할 계획이었다.
“좋다. 이제부터 다길 장로에게 맡길 테니 분부에 따르도록 해라. 거역하는 자는 엄히 다스릴 것이야.”
항소운은 마지막으로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앞으로 이곳은 제종이 아니라, 자릉종이다. 이곳을 ‘제종’이라 부르는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죽이겠다!”
이 말을 남긴 채 그는 다시 대전으로 돌아갔다.
다길은 혼자서 수천 명을 안배할 순 없다 보니 하류휘를 데려가기로 했다.
“스승님, 저 힘부터 보충하고 가면 안 될까요?”
하류휘는 일을 하기 싫어서 꾀를 부렸다.
“멀쩡히 숨 붙어있으면 어서 일부터 해. 앞으로 내 뒤를 이으려면 소종주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할 것 아니냐?”
다길은 제자를 발로 툭 찼다.
“아, 알았어요. 지금 바로 하면 되잖아요.”
하류휘가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다길은 제자를 데리고 제종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편, 항소운은 야조모와 척발완아, 궁금음에게 머물 곳을 손수 챙겨주었다.
주전(主殿) 뒤편에는 종주가 머무는 후원이 있는데, 항소운은 그곳에 그녀들의 처소를 마련해주었다.
전부 자신의 여인들이니, 그곳에 산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적화행군과 동 노인 등은 스스로 편하게 처소를 택했다.
워낙 땅이 넓고 집도 많다 보니 이들에게 처소를 하나씩 챙겨주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인들은 처소를 고르는 데 별로 까탈스럽지 않았다.
항소운은 잡다한 업무를 처리한 뒤에도 가만히 쉬질 않았다.
그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망가진 진법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복원이 어려웠지만, 훼손 정도가 낮은 경우에는 진법의 핵을 메우는 것으로 충분했다.
진법의 핵은 수정이나 요핵을 통해 일차적으로 보완했고, 진법의 무늬를 연결시켰다.
그렇게 진법의 힘이 형성되면 공격 또는 방어 효과를 지니게 되었다.
그는 대규모 전투를 치르며 체력이 많이 소모되었으나, 성해건곤 속 수정과 약초 덕분에 힘이 꽤 회복된 상태였다.
게다가 아홉 가지 진의에 통달한 덕분에 언제든 주변으로부터 필요한 힘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진법을 복원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우선 주진법만 손을 봐야겠다. 소진법은 다음으로 미뤄야겠어.”
그는 고민 끝에 주봉 앞의 진법부터 복원하기로 했다.
주봉의 진법은 그가 일전에 진법의 핵을 여럿 폭발시킨 탓에 훼손 정도가 심각했다.
하지만 가장 높은 등급의 진법인 만큼 잘만 하면 복원도 빠를 듯했다.
항소운이 먼저 훼손된 진법의 핵을 보완한 다음, 진법의 무늬를 재정비하고 새롭게 다른 복잡한 무늬를 더하자 진법의 위력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과거에 그는 진법에 무지했으나,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뒤로는 진법에 완전히 통달하여 이 정도쯤은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다.
반나절 후, 주봉 진법은 완벽히 복원되었다.
다른 소진법들은 급할 것 없었으니, 나중에 천천히 복원하면 될 터였다.
그는 약로와 약천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두 사람은 그간 행동의 제약이 적어서 이곳의 상황을 비교적 잘 알 터였다.
“오랜만에 두 사람과 얘기도 나누면서 아버지 소식은 없는지 물어야겠다.”
약전(藥殿)에 이르자, 약천이 구석에 홀로 앉아 꽃잎을 뜯으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짝사랑이다, 아니다, 짝사랑이다, 아니다…….”
항소운은 조용히 그녀 뒤로 걸어가 나지막이 물었다.
“약천아, 뭐 하고 있어?”
“꺄악!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항소운이 오는 것도 모르고 꽃잎 뜯기에 푹 빠져 있던 그녀는 깜짝 놀라 얼굴을 붉혔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녀는 갑자기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항소운이 재빨리 부축하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는지 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
“괜찮아?”
그가 걱정스레 물었다.
“괘, 괜찮아요……. 조금 어지러워서요.”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다.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바로 맥을 짚어보니, 맥이 아주 약하게 뛰고 있었다.
맥이 끊어졌다 다시 뛰는 현상이 반복되었고, 호흡은 거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