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Overlord RAW novel - Chapter 775
제775화 날 기억하고 있었어
금세 평정심을 되찾은 항소운을 당전은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어서 다른 자를 호명했다.
2등은 제멸이었다.
서른 살 남짓의 외모에, 살짝 황금빛을 띠는 붉은색 갑옷은 그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항소운처럼 잘생긴 건 아니지만 남자다운 진중함이 있었다.
3등은 고독구패였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항소운에게 패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절치부심하여 자신을 채찍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7품 혼태경에 올라 동년배 중에는 그와 견줄만한 자가 없었으며, 경지에선 항소운마저 앞질렀다.
거기다 혼돈 전체를 타고났으니 마성을 죽이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단상에 올라선 고독구패는 항소운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항소운. 나와 다시 붙자.”
“그건 내가 여유가 생기면 다시 말하자.”
항소운이 태연히 대꾸하자 고독구패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세 번째 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다른 자가 단상에 올랐다.
이번에는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이었는데 겉모습은 무기력해 보이나 눈동자는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노인은 진무 학당의 집사인 회몽이었다.
그는 혼태경에서 정체된 지 벌써 여러 해였다.
전천 경지를 돌파하기 위해 수차례 했던 도전이 전부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아직 포기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번에 진행되는 성지 수련은 그에게 무엇보다 절실했다.
그는 이번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죽을힘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이어서 불후 황조의 화장생과 남궁세가의 남궁무적, 천궁의 궁월아, 송가의 송천도, 그리고 혈기(血騎) 혈포의가 단상에 올라왔다.
화장생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외모도 준수한 편이었다.
금색 용이 수놓아진 장포를 입고 왕관을 쓴 그는 늠름한 제왕의 모습이었다.
남궁무적은 잘난 외모는 아니어도 아주 강인한 의지가 느껴지는 자였다.
마치 세상에 무엇도 두려울 게 없다는 눈빛이었다.
다음으로, 궁월아는 마희와 우채접 못지않게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
가녀리고 부드러운 인상 때문에 언뜻 봐선 무인보다 대갓집 규수 같았다.
송천도는 차가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칼로 깎아놓은 듯한 강인한 얼굴에 남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겼고, 등 뒤의 쌍도는 절세 도객을 방불케 했다.
그리고 혈포의는 음침해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혈의를 걸친 채 등 뒤에는 혈검을 메고 있었다. 온몸에서 짙은 살기를 풍기는 것이 마치 사신 같았다.
단상에 오른 혈포의는 바로 항소운 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말했다.
“항소운. 널 죽이겠다.”
혈포의는 항소운을 향한 살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선전포고에 정작 당사자보다 좌중이 더 깜짝 놀랐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항소운은 태연히 대꾸했다.
“흥, 이것만 끝나면 내 아우들의 원한을 갚아주마.”
“걱정 마. 너도 아우들한테 보내줄 테니까.”
항소운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당전은 두 사람의 대화를 흘려넘기며 계속해서 이름을 호명했다.
다양한 지역과 세력에서 온 남녀가 차례로 단상에 올랐다.
당전이 88등인 동재원을 호명한 순간, 항소운은 흠칫 놀라 단상 위로 올라오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인의 아름다운 뒤태를 보며 숨을 죽였다.
큰 키에 늘씬한 몸매와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에 남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을 본 남자들은 갑자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젠장, 뒷모습에 속았잖아.”
“그러게 말이야. 몸매는 끝내주는데 얼굴이 너무 못생겼네. 어휴, 이건 좀 심하잖아.”
“참 아깝네. 얼굴이 평범하기만 했어도 어디 가서 꿀리진 않을 텐데.”
“목소리 낮춰. 그래도 100위 안에 든 여자잖아. 저 여자 귀에 들어갔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으면 어떻게 해.”
항소운은 그 여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상대는 자신이 아는 동재원과 비슷한 면이 있었지만, 다른 면도 있었다.
외모만 다른 게 아니라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체형과도 달랐다.
그는 눈앞의 여인이 자신이 아는 동재원과 동명이인은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몇 가지 단서를 통해 그녀가 동재원일지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의 지금 얼굴은 가면 따위로 가린 것이 아니라 확실히 망가져 있었다.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얼굴 전체가 일그러져 있었다.
항소운이 그녀를 계속 뚫어지게 쳐다보자 동재원도 무언가 느꼈는지 그가 있는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으나 사실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바로 내색을 감추긴 했으나, 예민한 항소운은 무언가를 눈치챘다.
작은 움직임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는 그가 익히 알고 있던 눈빛과 일치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재원아.”
그녀는 그 소리에 움찔했으나 이내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그 순간을 항소운이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재빨리 그녀 앞으로 달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이렇게 만든 거냐고?”
항소운은 분통을 터트렸다.
짙은 살기가 단상 위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동재원의 냉랭한 대답뿐이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항소운과 동재원의 대화는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항소운은 남들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동재원의 어깨를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난 못 속여. 너 동가성 동재원 맞지?”
“내 이름이 동재원은 맞지만, 당신이 말한 사람은 아니에요. 뭐 나같이 못생긴 여자라도 상관없다면 친구가 되어드리죠. 정 원하면 연인도 되어드릴 수 있는데, 그럴 배짱 있어요?”
동재원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추하게 웃었다.
“좋아. 지금부터 넌 내 여자야.”
항소운은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자 놀란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저런 여자를 좋다 하다니, 취향 한번 독특하군.”
“저 녀석, 그냥 여자라면 다 좋다 이건가? 난 저 여자 얼굴만 봐도 구역질이 나는데 말이야.”
“역시 1등은 달라. 여자 보는 눈도 평범하지 않다니까. 존경스럽다 존경스러워.”
“근데 마희와 우채접이 항소운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미인보다 추녀 취향인가 보네.”
항소운은 사람들의 조롱을 무시했다.
그저 조용히 동재원을 보며 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인정하길 기다렸다.
그는 그녀를 좋은 친구로 여겼다.
당시 자릉종을 되찾는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도 했고 애정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느라 그녀를 만나러 동가성에 가보지도 못했다.
이렇게 살다가 서로 잊어버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곳에서 변해버린 그녀와 재회하자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녀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안한 마음을 털어버리지 못할 것 같았다.
“하하, 들었죠? 다들 비웃고 있잖아요.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시죠. 전 당신한테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항소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없어. 난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해.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넌 내 여자야.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는지 당장 말해. 내가 똑같이 복수해줄 테니.”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도 적잖이 당황했을 테니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항소운이 돌아가자 동재원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녀는 참고 있던 눈물을 떨어뜨렸다.
‘날 기억하고 있었어. 이런 모습인데도 무시하지 않고 말이야.’
그녀는 기쁘면서도 서글픈 마음에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얼굴이 망가진 순간 그녀의 마음도 죽어버렸다.
당전은 상위 100명을 발표한 뒤, 마지막으로 중요 사항을 전달했다.
“방금 호명한 100명의 엽마 제존은 공적전이 수여하는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1년 후 연성(煉聖)공간에 들어가 1년간 수련할 기회도 주어집니다.”
뒤이어 당전은 수상자들에게 직접 상을 나눠 주었다.
그 상이라는 것은 저축계에 들어 있어서 누가 무엇을 받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순위가 높을수록 훨씬 귀한 상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상을 전부 나눠 주고 난 당전은 엽마 행동이 완전히 종료되었음을 선포했다.
100위안에 들지 않은 자들은 무척 실망했으나 그렇다고 누굴 탓하겠는가.
그래도 마연에 들어가 살아 돌아온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이 많은 수확을 얻었고 그들이 획득한 공적 점수는 공적전에서 현물로 바꿀 수 있으니 딱히 손해랄 것도 없었다.
항소운은 저축계를 거둬들인 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동재원을 찾아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혈포의가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아우들을 죽인 원수를 갚아주마.”
혈포의는 살기가 바짝 올라서 최상급 혼태경의 기세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꺼져!”
항소운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혈포의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갈퀴손을 쭉 뻗어 항소운의 목을 노렸다.
다른 제존들과 비교해도 월등히 빠른 속도였다.
항소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격을 피하고선 상대의 하반신을 향해 힘껏 발을 날렸다.
그러나 혈포의가 10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만큼 무공이 막강하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반응속도도 상당히 빨라서 몸을 살짝 틀어 피하더니 동시에 갈퀴손을 18차례나 휘둘렀다.
유골혈조(幽骨血爪)!
혈포의의 무공은 음험한 백골이 나타난 듯하여 상대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공격에 빈틈이 없어 항소운을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 기세였다.
항소운은 상대의 무공에서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분노만 자극할 뿐이었다.
“내가 꺼지라고 했지?”
그는 한시바삐 동재원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두 성진의 힘을 폭발시켰다.
열염연금!
붉은빛과 황금빛의 완연히 다른 두 힘이 서로 교차했다가 융합되면서 거대한 파괴력을 형성했다.
그 힘은 혈포의의 무공과 연신 충돌했다.
쿵쿵-!
잇달아 폭발이 일어나며 사방으로 힘이 흩어지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황급히 피했다.
두 사람의 전투력은 엇비슷해서 단상을 벗어나 허공에서 격렬한 싸움을 이어갔다.
혈포의의 무공은 실로 대단했다.
최상급 혼태로 항소운을 뒤덮자 미약하게나마 성급에 달하는 위력이 터져 나왔다.
제대로 맞붙기도 전에 상대를 자멸시킬 수 있는 기세였다.
한편, 항소운은 두 성진의 힘을 융합시키고 진의까지 끌어올리면서 혈포의 못지않은 위력을 발산했다.
두 사람은 백여 합을 겨루었으나, 쉽사리 승부를 내지 못했다.
좌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시 항소운이 대단하긴 하네. 4품 혼태경으로 혈포의와 맞먹다니. 이거 누가 이길지 모르겠는데?”
“두 사람의 무공은 반 성급에 버금갈 정도야. 과연 최상위권은 달라.”
“항소운의 경지가 지금보다 한두 품급만 더 높았어도 혈포의가 힘들었겠는데.”
“혈포의는 아직 혈포를 쓰지도 않았잖아. 그걸 사용하면 항소운도 죽을 수밖에 없을걸?”
“항소운도 1등 했는데 비장의 수단이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공적 점수를 어떻게 얻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