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Overlord RAW novel - Chapter 818
제818화 살아있다는 건 참 좋은 거구나
“방금도 말했지만, 네 마음에 ‘마’가 있으면 마족이요, 그렇지 않으면 마족이 아닌 게다. 네 마음만 흔들리지 않으면, 어느 누가 너를 마족이라 규정할 수 있겠느냐?”
수릉 장로가 말했다.
“제자, 그래도 이해가 안 갑니다.”
“네가 마족인 건, 누군가 널 죽이고자 해서 널 마족이라 단정 지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널 죽일 마음이 없다면, 네가 진짜 마족이라 해도 모른 척 넘어갈 것이다.”
“스승님의 말씀은 이 모든 게 그들의 말에 결정된다는 건가요?”
“아니다, 이 모든 건 네가 결정하는 것이다. 네가 정정당당하게 네 갈 길을 가면, 설령 마족의 능력을 쓰고 그들이 뭐라 한들 넌 너라는 사람인 것이다. 네가 인간인지 마족인지는 네 마음에 달려있다는 거지. 그들이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야. 네가 그들보다 훨씬 강해져서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존재가 되면, 그들은 널 마족이 아닌 성스러운 인간이라 칭송할 거다.”
“결국 강해져야 한다는 말씀이네요? 하지만 살아갈 공간도 없는데, 어떻게 그 정도로 강해지겠어요.”
“이 스승이 밖으로 나온 것은 네게 살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란다. 내가 있는 한, 아무도 네게 마족이란 소리는 못 할 거다. 허나 어떻게 살아갈지는 네게 달렸어. 이 스승이 평생 지켜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항소운은 스승과의 대화를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차츰 감이 잡혔다.
스승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그가 인간인지 마족인지를 이제 스승이 정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스승은 제압하는 역할을 할 뿐, 중요한 건 앞으로 그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였다.
‘마음속에 ‘마’가 있어야 마족이다. 내 마음에 그런 것이 없으면 난 마족이 아닌 거야. 그건 누구도 강요할 수 없어.’
항소운은 속으로 되뇌었다.
“스승님, 9대 성진이 전부 망가졌는데 혹시 성진초로 회복시켜주실 수 있나요?”
성진의 힘이 없는 상황이 영 익숙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각종 진의도 깨닫지 않았던가.
최강의 성진지체가 되겠다던 다짐을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성진초는 있다만, 주진 않을 생각이다.”
찬물을 확 끼얹는 소리였다.
“왜요?”
항소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건 네가 남들은 가지 못한 길을 가야 할 운명이기 때문이지. 성진이 파괴된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지 몰라. 시간이 날 때마다 황결을 읽어보거라. 그럼 난 가마.”
수릉 장로는 이 말만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항소운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스승이 자신을 구하고선 여기에 버리고 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스승의 다리를 붙잡고 제발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져버려서 미처 잡을 새도 없었다.
“이건 너무 무책임하잖아요!”
그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하지만 스승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덩그러니 남겨두고 떠난 것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혼자 힘으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항소운은 자신이 마족이란 소문을 스승이 무마시켜줄 거라고 믿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당분간은 스승님의 말씀대로 황결이나 연구해보자 싶었다.
황결은 진리를 담고 있어서 매번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9대 성진이 없는 상태에서 황결을 읽으니 어째 기분이 묘했다.
황결은 혼돈의 탄생과 음양개명(陰陽開明), 창우건곤(蒼宇乾坤) 등 깊은 진리를 논하고 있다.
모두 성진의 힘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각종 진의를 깨닫도록 이끄는 대(大)경문이다.
연화기지에 갔을 때, 연화경관에서 지혜의 빛을 통해 황결의 일부 구결을 보완한 터라 지금 이렇게 다시 읽자 깨달음이 한층 깊어졌다.
하지만 어째 담벼락 너머에서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게 다 운명의 성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선 그저 방관자처럼 지켜보며 상상할 뿐,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어느덧 그는 물아일체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까맣게 잊었다.
마치 광활하게 펼쳐진 밤하늘의 작은 별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의 은하수.
그 속에서 별은 탄생과 소멸을 겪으며, 우주의 섭리에 따라 변화했다.
그러더니 다시 연화경관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묘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신비로운 경험.
그 가운데 만물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깨달은 것은 성진의 신묘함이 아닌 자신의 내면이었다.
9대 성진의 폭발로 성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그 조각은 아직 남아있었다.
다만 이 조각들을 다시 합칠 방법이 없기에 의미는 없었다.
조각들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은하수의 수많은 별을 보는 것 같았다.
그중 필요 없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저마다 빛을 내며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가 평생 수련한 성진의 힘도 저 조각들 속에 흩어져있을 뿐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만약 저 조각들을 합칠 수만 있다면, 성진도 복구될 것이다.
하지만 성진초 외에 저 조각들을 하나로 합칠 방법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성진초 없이도 조각들을 다시 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당장은 시행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부족해서 생각은 이어지지 못하고 좌초해버렸다.
“성진은 파괴됐지만, 그 조각은 남아있으니 힘도 아직 있는 거겠지. 어떻게 해야 저 조각들을 운용할 수 있을까.”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여기서 계속 고민해봤자 무엇하겠는가.
이제 슬슬 이 설산을 떠날 때가 되었다.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설산에는 툭하면 요수가 나타났으며, 식물마(植物魔)도 적지 않았다.
결코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는 곳이나, 항소운에게 이 정도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성급 적을 만나지 않는 이상, 별다른 위협은 없었다.
딱히 급할 건 없어서 그는 걸어서 설산을 내려갔다.
이곳의 쓸쓸한 기운을 느끼며 마음속으로는 계속해서 황결을 읊었고, 때로는 걸음을 멈추고 초식을 펼치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걸었다.
요수는 좋은 음식이 되어주었고, 식물마는 시간을 때우는 장난감이 되었다.
주변에는 인가는커녕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항소운은 점점 마음이 평온해졌다.
자신이 마족이라는 것도 잊은 지 오래였다.
마치 세상을 등진 사람처럼 바깥세상의 일은 그와 무관한 듯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황결에 대한 깨달음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서 이미 수차례 물아일체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과정을 통해 시간의 도와 생명의 도, 혼돈의 도와 같은 진리를 깨우쳤는데, 이 세 가지 진리는 도의 근본으로 여겨졌다.
다만 성진이 없어서 이런 깨우침을 직접 행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직 성진의 오묘한 이치를 간파하지 못한 탓에 조각들을 이용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힌 듯 그 이치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덧 설산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이곳은 산 위보다 기후가 훨씬 따뜻해서 어렴풋하게 봄의 생기가 느껴졌다.
요수 사냥꾼의 모습도 간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무공은 평범해서 항소운은 들키지 않고도 지나갈 수 있었다.
얼마쯤 더 걸으니 눈앞에 연못이 나타났다.
그리 크진 않아도 맑고 깨끗했다.
물고기는 한가로이 헤엄치고 못 주변에는 푸른 풀과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고상하고 운치가 있었다.
며칠을 못 씻어서 그렇지 않아도 갑갑하던 차였다. 그는 서둘러 옷을 벗고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그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물 밑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살에 닿는 시원한 감촉에 몸과 마음이 상쾌해졌다.
전라의 성체는 완벽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상아빛 피부는 물기를 머금어 한층 빛났다.
항소운의 성체는 극한격활술로 수차례 단련하여 단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후 마성에 오르면서 마기가 육신을 다시 개조했고, 얼마 전에는 신천에 의해 육신이 젊음을 되찾으면서 순결 무구한 성체가 되었다.
그는 물속에 누워 눈을 감았다.
몸에 닿는 시원한 느낌을 마음껏 만끽하며 새 삶에 감사했다.
“살아있다는 건 참 좋은 거구나.”
문득 감정이 벅차올랐다.
연성공간에서 나와서 전천 성인들과 싸울 때만 해도 여기서 죽겠구나 싶었다.
마음의 준비도 했건만, 명이 질긴 건지 끝내 살아남았다.
오직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었다.
그는 이제 삶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누구보다도 잘살고 싶었다.
그렇게 긴장을 놓고 있는 사이, 누군가 연못 쪽으로 걸어왔다.
생각에 빠져 있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상대가 가까이 와서야 눈치챘다.
깜짝 놀라 연못 밖으로 나왔을 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순진무구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곳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항소운의 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맑은 눈동자와 동그란 얼굴이 무척 귀여운 소녀였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소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흩날렸다.
항소운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지금껏 여자에게 자신의 몸을 보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어릴 적, 시녀가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혀 줄 때면 놀리는 게 재밌어서 일부러 장난을 친 적도 있었다.
이제는 처첩과의 잠자리도 익숙해졌건만, 이런 허허벌판에서 누군가에게 발가벗은 몸을 보이는 건 아무래도 창피한 일이었다.
그는 재빨리 검은 옷으로 몸을 감쌌다.
소녀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귓불까지 빨개진 소녀는 황급히 몸을 돌려 뛰어갔다.
땅 위로 올라선 그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이것 참 근처에 결계를 쳐두는 것도 잊었네. 이게 웬 망신이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간단하게 의복을 정리하고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몇 걸음 가지 않아 십여 명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비천경으로, 아무래도 그를 찾아온 듯했다.
항소운은 어딘가로 숨지 않고, 십여 명이 자신을 포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 중에는 아까 봤던 소녀도 있었다.
소녀는 얼음 조각을 타고 있었고, 뒤에 앉은 강인한 청년은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시비를 걸러 온 게 분명했다.
“네가 내 여동생을 괴롭힌 놈이냐?”
얼음 조각을 탄 청년이 항소운을 향해 다짜고짜 소리쳤다.
옷차림이 화려하고 기품이 흐르는 걸 보니 어느 대갓집 공자 같았다.
그자의 이름은 우청(羽靑).
이 근방의 제일 가문인 우가의 도련님이었다.
소녀의 이름은 우령(羽靈)으로, 두 사람은 친남매였다.
곁의 무리는 수행원인데 무공 단련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항소운은 당혹스러웠다.
“내가 언제 네 동생을 괴롭혔어? 오히려 그 반대면 모를까.”
“무엄하다. 지금 거꾸로 내 동생을 모함하는 것이냐? 여봐라, 저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거라.”
우청은 불쾌한 듯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우령이 우청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만 해요, 오라버니. 제가 잘못한 거라니까요.”
“딱 봐도 좋은 놈이 아니구만. 저런 놈은 호되게 혼나야 해.”
우청의 명령에 따라 두 사람이 항소운에게 다가갔다.
이래 봬도 비천경이니, 한 명 붙잡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항소운은 저항도 하지 않고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어깨를 붙잡고 데려가려는데 항소운이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