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Third-Generation Heir of a Conglomerate RAW novel - Chapter (197)
독식하는 재벌 3세-197화(197/518)
197화. 혼란의 시대 (1)
다음 날.
나는 오전부터 델핀 아노르의 호출을 받아 아노르 가문의 한국 법인을 방문했다.
“한국 법인의 첫 방문자가 부회장님이세요. 아직 정돈되지 않아 어수선한 점 양해 부탁드려요.”
“아닙니다. 제가 많은 회사를 가 봤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꾸며진 건물은 처음입니다. 박물관이나 아트 센터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보다 보여 드릴 것이 있어요.”
그냥 나를 불렀을 리는 없겠지.
델핀을 따라 디자이너들이 일하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제품 디자인 초안이 완성되었어요. 프랑스에 있는 우리 가문의 디자이너들이 며칠 동안 밤을 새워 가며 만든 디자인이라 만족하실 거예요.”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고 생각하며 보겠습니다.”
델핀이 흰 천으로 가려져 있던 제품 디자인을 공개했다.
내가 말한 대로 하나의 예술 작품과도 같은 디자인이었다.
냉장고에 입히기엔 과한 디자인이었고, 모르고 지나치면 절대 냉장고라고 생각할 수 없는 예술 작품이었다.
“아주 훌륭합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고풍스러운 디자인은 처음입니다.”
“칭찬 감사드려요. 솔직히 저는 제 방에 가전제품을 두는 걸 싫어해요. 가전제품의 조잡한 디자인 때문에 방의 분위기가 깨져 버리거든요.”
“가전제품의 경우 실용성에 중점을 두는 경우가 많으니 그렇겠군요.”
“방의 분위기, 집의 분위기와 융화될 수 있도록 디자인했어요. 마치 그림을 벽면에 거는 것처럼 냉장고도 그런 분위기를 낼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명품의 이미지와 딱 맞는 제품이었다.
집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았고, 오히려 냉장고 덕분에 집의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그런 고풍스러운 디자인.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역시 아노르 가문과 협업하길 정말 잘했습니다!”
“그러면 다행이네요. 냉장고를 시작으로 에어컨이나 TV같이 방에 두는 가전제품을 중점적으로 제가 직접 디자인을 총괄할 계획이에요.”
“이렇게 적극적으로 협업에 임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점심은 부회장님이 사실래요? 아직 식사 전이라서 조금 허기지네요.”
“제가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식당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전에 갔던 식당은 아니죠? 같은 식당을 가는 건 좀 그런데.”
“한국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식당이 있습니다.”
그녀와 함께 청담동의 한정식집으로 이동했다.
이미 비서실에서 한정식집을 통으로 예약했고, 우린 조용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저를 위해서 식당 전체를 예약하신 건가요?”
“중요한 손님을 모셔야 하기에 조금 신경을 썼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아 주세요. 조용한 식당 분위기는 질색이거든요.”
살짝 어색함이 감돌았다.
그나마 음식이 나오자 분위기가 나아졌고, 음식의 맛에 만족한 델핀의 표정도 밝아졌다.
“제가 왜 식당 전체를 예약하는 걸 싫어하는지 아세요?”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으신가요?”
“매달 아버지가 식당 전체를 예약해 우리 5남매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어요.”
“가족과의 오붓한 식사를 위해서 아닌가요? 안 좋은 추억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자식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
어떻게 생각해 봐도 결코 나쁜 추억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델핀의 말에 왜 그녀가 식당 전체를 예약하는 걸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가족 식사 자리지만, 실상은 후계자 경쟁을 위한 토론 시간이나 다름없어요.”
“후계자 경쟁을 식당에서 시킨다는 말씀이신가요?”
“맞아요. 어느 브랜드를 인수 합병해야 하는지, 브랜드 개편 방법, 핸드백 퀄리티 상승 방법 같은 주제를 던져 주고 서로 경쟁을 시키죠. 그래서 조용한 식당에 들어서면 저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려요.”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다.
그런데 식사 자리를 후계자 경쟁 자리로 만들다니.
한국 대기업도 그렇지만, 프랑스 대기업도 후계자 경쟁을 치열하게 시키는구나.
“다음에는 아주 시끄러운 식당을 예약해야겠군요.”
“또 너무 시끄러운 식당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딱 중간 정도의 식당을 부탁드릴게요. 너무 까다롭나요?”
“그 정도 조건이면 딱히 까다로울 것도 없죠.”
우린 식사와 함께 와인도 즐겼다.
업무 시간이 끝나지 않았긴 하지만, 손님 접대를 위해 와인 한 잔 정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와인 한 잔을 마시자 델핀은 속에 담긴 말을 무심결에 뱉어 내었다.
“김민재 부회장님은 참 좋겠어요. 경쟁할 형제가 없어서요.”
“오히려 전 형제가 있었으면 합니다. 할아버지가 은퇴하시면 태우그룹을 혼자 경영해 나가야 할 생각에 벌써 머리가 아픕니다. 형제들이 있었다면 분담해서 경영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게 가능할까요? 아무리 피가 섞인 형제라고 해도 경영권 앞에서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버려요.”
델핀이 후계자 경쟁으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알 수 있는 말이었다.
모든 기업이 그렇겠지만, 가장 뛰어난 자식에게 기업을 물려주고 싶어 하기 마련이었다.
델핀은 가문의 어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래도 델핀 씨는 가문에서 인정받고 있지 않습니까? 언론을 통해 들은 거라 정확하진 않겠지만, 아노르 가문의 후계자는 델핀 씨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그렇죠. 하지만 동생들이 경영에 참여하면 구도가 깨질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동생들이 경영에 참여한다고 해도 이미 성과를 거둔 델핀 씨가 앞서 나가지 않겠습니까?”
“가문의 어른들은 여자가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시거든요.”
“프랑스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개방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나 보군요.”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경우였다.
CL그룹만 해도 딸이 있음에도 기업 승계를 위해 양자를 들이기도 했다.
유교 국가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더니 프랑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문제도 있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3번째 동생부턴 어머니가 다르다는 점이에요.”
“가문에서도 파벌이 존재하나 보군요.”
“파벌이라고까지 부르긴 어렵지만, 3번째 동생을 후계자로 삼았으면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건 사실이에요.”
아주 복잡한 문제였다.
그리고 잘만 이용하면 태우그룹이 이득을 볼 수도 있는 구조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은 굳이 내가 도와줄 이유는 없었기에 자세히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델핀 씨는 잘 해내실 겁니다. 제가 보증하죠.”
“말씀만이라도 고마워요.”
생각보다 깊은 대화를 나눈 점심 식사 자리였다.
2시간이 넘게 델핀의 하소연을 들어 주고 나서야 회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
델핀과 김민재가 와인과 함께 점심 식사를 즐기는 동안.
김태중 회장은 부산에서 최재석 의원과 허름한 복집에서 소주를 나눠 마시고 있었다.
“김태중 회장님이 저를 보자고 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정치인과 거리를 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왜 정치인과 거리를 두는지 아는가? 내 돈을 받아먹으려고 안달 난 놈들이기 바로 그놈들이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돈 받아먹고 태우그룹의 편을 들어주냐면 또 그건 아니고 말이야.”
“그런 이유로 저를 찾으신 거라면 번지수가 틀렸습니다. 저는 기업의 돈을 받고 기업의 편에 서서 정치를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김태중 회장이 눈을 빛냈다.
사람 보는 안목만큼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김태중 회장이었고, 최재석 의원이 진국이라는 걸 몇 마디의 대화만으로 알아차렸다.
“그런 방식은 너무 구시대적이지 않은가? 군사 정권 시절에나 통하는 방식이지.”
“그럼 무엇을 저에게 바라십니까?”
“공정한 경쟁, 내가 바라는 건 그것밖에 없네. 다른 기업이 정치인과 야합하여 태우그룹을 공정하지 않은 방식으로 견제하는 걸 막고 싶을 뿐이네. 정치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정치권을 이용해서 이득을 얻고 싶은 마음도 없네.”
김태중 회장은 김민재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 듣진 않았다.
하지만 김민재가 원하는 말을 최재석 의원에게 전하고 있었다.
이는 김민재와 함께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니 어느새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득을 원하지 않으시다고 하지만, 결국 사람은 이득을 좇기 마련입니다. 손에 검이 쥐어지면 휘두르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속성 아니겠습니까?”
“허허, 이 좁은 한국에서 태우그룹이 검을 휘둘러 무얼 하겠나? 우린 세계 무대에서 경쟁을 하고 있네. 그러니 한국 정치권을 생각하지 않고 싶을 따름이네.”
“한국의 땅덩어리가 좁다고는 하지만, 태우그룹에서 관심 가질 만한 이권 사업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태우그룹이 한 해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얼마인지 아는가? 내수로 벌어들이는 수익을 추월한 지 한참 되었다네.”
최재석 의원이라고 태우그룹을 모를까?
한국에서 정치를 하다 보면 태우그룹 이야기를 어떻게든 듣기 마련이었고.
특히나 지역구 정치인의 경우 공장 유치나 재개발을 위해서라도 대기업의 정보에 빠삭해야만 했다.
“태우그룹의 수출 규모가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수 시장의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도 사실 아닙니까?”
“그럼 어떻게 하겠는가? 한국 시장을 빼놓고 해외에만 신제품이나 새로운 서비스를 출시할 순 없지 않은가? 그렇게 하면 내수 시장을 차별한다고 말이 나올 걸세.”
“정말 태우그룹이 불공정한 대우만 받지 않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나와 김민재 부회장이 바라는 건 그것 하나가 전부일세.”
최재석 의원은 김태중 회장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한국 경제의 거인인 그가 작은 지역구를 가진 자신을 찾아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기도 했다.
“그럼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교섭단체를 만들 생각이네. 이미 20명 정도를 영입하기도 했지만, 교섭 단체를 제대로 꾸리려면 최소 50명 이상의 정치인이 다음 총선에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인 영입을 위한 구심점이 되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자네 말고는 그 역할을 할 사람이 보이지 않더군.”
“저보다 인지도가 높은 정치인은 전국에 즐비합니다.”
“그러면 뭐 하겠나? 이미 이권의 사슬에 묶인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과 함께할 바에야 차라리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네.”
김태중 회장은 정치권을 몸소 느껴 본 사람이었다.
한때는 대선 후보로까지 추대된 적이 있었고, 현재그룹의 장 회장이 대선 후보로 나갔다가 어떤 정치 보복을 당했는지 똑똑히 본 적도 있었다.
“이권에 엮여 있지 않은 사람 중에서도 저보다 더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 있습니다.”
“인지도가 중요하긴 하네만. 인지도 문제는 태우그룹이 해결해 줄 수 있다네. 내가 바라는 건 오롯이 한국 경제 발전에만 집중할 수 있는 정치인이라네.”
“저를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이 바라시는 정치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최재석 의원이 살짝 고개를 숙였고.
김태중 회장은 그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