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Third-Generation Heir of a Conglomerate RAW novel - Chapter (80)
독식하는 재벌 3세-80화(80/518)
80화. 1997년 (3)
나는 태어나서 할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야 울면서 떼를 쓴 적은 있었지만, 그래도 소리를 지르진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할아버지는 당황한 듯 손까지 떠셨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말해 보거라.”
“파도가 아니라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파도는 잠시 피하면 되지만, 쓰나미가 밀려오면 초토화가 되어 버립니다. 지금 한국의 경제 상황이 그러합니다.”
“한국의 경제가 초토화가 된단 말이냐?”
“할아버지가 그토록 외치던 대마불사는 더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무너지는데 어떻게 대기업이라고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나라 같으냐?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왔는지 모르겠다만, 그만하거라.”
할아버지는 나를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처럼 바라보고 계셨다.
하긴 갑자기 대한민국이 부도가 난다고 하면, 누가 믿겠나?
하지만 나는 무조건 할아버지를 설득해야 했기에 말을 이어 나갔다.
“SS오일을 인수하겠다고 자신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나락으로 가면 SS그룹도 부도가 날 테니까요.”
“SS그룹도 위험하다는 소리냐?”
“SS그룹뿐만 아니라 카이자동차도 올해 부도가 납니다. 재계 서열 30대 기업 중 절반이 무너진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우리 태우그룹이 들어가지 않기 위해선 지금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할아버지가 나를 빤히 바라보셨다.
연륜이 가득 담긴 눈빛을 보고 있자니 고개를 돌리고 싶어졌지만, 여기서 물러날 순 없기에 눈을 부릅뜨고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로구나.”
“제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조만간 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합니다. 태국을 시작으로 동남아 전역이 외환위기를 겪게 되고, 올해 후반기가 되면 대만과 대한민국까지 외환위기를 겪게 됩니다.”
“외환위기가 오면 태우그룹이 무너진다고 보느냐?”
“한보그룹이 무너진 건 과도한 부채 때문입니다. 태우그룹 또한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습니다. 태우중공업과 휴대폰 사업부를 매각해 부채율을 줄였다고는 하지만 아직 위험한 상황입니다.”
할아버지는 그제야 내가 왜 계열사를 매각하려고 한 건지 이해를 하신 듯 보였다.
“……계열사를 매각하려는 이유가 있었구나.”
“이번 위기를 벗어나려면 지금보다 더 긴축 경영에 들어가야 합니다. 사업 확장과 투자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외화 보유에 그룹의 모든 전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너 혼자 그런 생각을 했을 리는 없고, 월가에서 들은 이야기더냐?”
“몇 달 안에 태국이 국가 부도 사태가 납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저는 기획 본부장 자리에서 내려오겠습니다.”
“또 협박을 하는구나.”
할아버지의 마음이 이미 많이 상해 계셨다.
여기서 지는 척을 하며 할아버지를 달래 드려야 좋은 손자겠지만.
좋은 손자로 남는다고 한들 태우그룹이 무너지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진다.
“몇 달만 참아 주세요. 우리가 외환위기를 잘 이겨 낼 수만 있다면, 할아버지가 원하는 회사를 마음껏 인수할 수 있는 때가 옵니다. SS오일은 물론이고 카이자동차까지 태우그룹의 계열사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도대체 네가 왜 이렇게 민감하게 나오는지 모르겠구나. 대한민국이 부도가 난다니. 쯧쯧.”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기획 본부장이 아닌 할아버지 수행 비서로 새롭게 배워 나가겠습니다.”
할아버지가 창가를 내려다보셨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 말씀을 이어 가셨다.
“SS그룹이 정말 무너진다고 보느냐?”
“분명합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SS그룹이 무너지면 SS자동차도 인수할 수 있겠구나.”
“SS자동차보다 카이자동차를 인수하는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제가 계획한 대로 흘러간다면, 태우그룹은 1~2년 안에 재계 1위 자리에 올라설 수 있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 몇 달만 참아 보마.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비서실에 자리를 마련해 두겠다.”
“감사합니다. 믿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90도로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솔직히 화가 나야 정상이었다.
그룹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을 몰라보는 할아버지셨으니까.
하지만 화가 나긴커녕 고마움에 눈물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그만큼 몇 달의 시간을 버는 건 나와 태우그룹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 * *
한 달에 최소 한 곳.
신문과 뉴스에서는 대기업의 부도로 가득 채워졌다.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삼미그룹, 그리고 소주라는 막강한 캐시카우를 보유한 진로그룹까지 무너지려고 하고 있었다.
경제 성장률은 처참히 무너졌고.
대한민국 정부와 외화 보유고에 구멍이 났다는 뉴스까지 보도되었다.
그제야 할아버지도 나에 대한 의심을 거두셨다.
“네 말대로 대한민국이 휘청거리고 있구나.”
“이제 시작입니다. 더 많은 기업이 무너져 내릴 겁니다.”
할아버지와 나는 저택의 거실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편한 옷과 편한 자리라 그런지 부드럽게 대화가 진행되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구나. 너는 언제부터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느냐?”
“미국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월가의 펀드들은 영국과의 싸움에서도 이겼습니다. 선진국인 영국조차 휘청거렸는데 한국은 처참히 무너질 게 분명했습니다.”
내가 인생을 다시 살고 있다고 말씀드릴 순 없었기에.
나는 진실에 거짓을 더해 그럴싸한 말을 꾸며내었다.
“흠, 네 예상이 맞아 가고 있구나. 혹시 현재그룹에 태우중공업을 매각한 것도 관련이 있느냐?”
“외환위기가 오면 아주 좋은 회사들이 시장에 나오게 됩니다. 가장 큰 라이벌인 현재그룹이 돈을 쓸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태우중공업을 현재그룹으로 넘긴 건 더 좋은 매물을 사기 위함이란 이 말이렸다?”
“태우그룹이 단순 제조 회사를 벗어나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수익률이 좋은 업종을 미리 선점하기 위해서라도 자금이 필요합니다.”
인건비가 비싸지면 제조업의 수익률이 낮아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대기업의 경우 대부분이 제조업 비중이 매우 높았다.
아직은 인건비가 그리 높아지진 않았지만, 몇 년만 지나도 인건비로 인해 제조업의 수익이 크게 줄어들게 된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구나. 하지만 여전히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단다. 대한민국이 부도가 난다는 말은 믿지 못하겠구나.”
“이번 정권은 이미 작년부터 레임덕이 왔었습니다. 이번 위기를 막을 동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래도 자꾸만 좋은 회사를 인수할 기회를 놓치는 기분이 들어.”
할아버지의 욕심은 여전했다.
이전이었다면 할아버지가 저런 말씀을 하면 이를 악물었겠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까.
주사위가 굴러가는 동안은 플레이어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가 없고, 할아버지도 말로만 욕심을 부리지 실제로 회사를 인수하지는 않으실 게 분명했다.
“좋은 기업을 저렴한 가격에 인수할 시기가 조만간 옵니다.”
“네 말대로 국가 부도 사태가 벌어진다고 해도, 다음 정권으로 권력이 이양되고 나서야 회사 인수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은 사안이 하나 있습니다. 다음 정권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실 생각이십니까?”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한민국 역사상 기호 2번 후보가 당선된 적이 없으니 여당에서 대통령이 나오지 않겠느냐?”
모두 기호 1번 후보의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당에서 열린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기호 3번으로 나서는 후보가 나와 버린다.
그 결과.
3번 후보가 1번 후보의 표를 갉아먹었고.
자식의 병역 의혹까지 겹치며 2번 후보인 DJ가 대통령에 당선이 된다.
“저는 야당에서 대통령이 당선될 거라고 봅니다.”
“언더독을 좋아하는 게냐? 아니면 분석을 통해 야당이 유리하다는 결론이 나온 게냐?”
“대통령은 하늘에서 점지해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무리 과학적인 분석을 한다고 해도 결과를 알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막지 못한 여당에서 대통령이 또 나오진 못할 거라고 봅니다.”
“외환위기가 대통령을 결정짓는다는 말이구나.”
현 대통령은 많은 공을 세웠지만.
외환위기 하나로 공은 전부 사라지고 부정적인 이미지만 남아 버린다.
매일 기업이 무너지고, 실직자가 넘쳐나니 야당의 지지세가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 이런 분석은 의미가 없다.
나는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 직접 보았으니까.
“야당 쪽 후보와 친분이 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주 경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이긴 하지. 여당이 유리한 선거라고 해도 나는 야당을 지원해 줘야 할 정도의 특수 관계라고만 알고 있거라.”
할아버지와 다음 대통령은 친분이 매우 깊었다.
하지만 무슨 일 때문에 사이가 벌어진 건지는 몰라도 외환위기 이후엔 갈라서게 된다.
“이왕 도와줄 거라면 화끈하게 밀어주십시오. 그래야 할아버지가 원하는 회사를 쉽게 인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러고 싶은데 요즘은 보는 눈이 많아 선거 자금을 지원해 주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란다.”
아시면서 선거 자금 문제로 뉴스까지 타셨냐고 묻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야당 후보의 선거 자금 지원을 하다 걸려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개입해야만 했다.
할아버지가 또 감옥에 가는 건 원치 않으니까.
“선거 자금 지원은 제가 맡아도 되겠습니까?”
“비서실장이 그 분야는 전문가란다. 굳이 네가 나설 필요는 없어.”
“월가에서 많이 보고 배운 것이 있습니다. 비서실장과 함께 선거 자금 지원을 맡아 보겠습니다.”
“흠, 너도 이제 그럴 때가 되긴 했지. 배달 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니 조심히 한번 해 보거라.”
할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선거 자금을 전달해 줄 방법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 * *
며칠 후.
내 사무실에서 비밀회의가 열렸다.
회의 참석자는 비서실장 아저씨와 기획실장이 전부였고, 회의 주제는 선거 자금 지원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야당 후보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결국 그렇게 하시는군요. 여당 후보가 더 유리한 선거라 위험 부담이 큽니다.”
“어느 후보를 지원하든 위험 부담을 지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니 배달 사고가 나지 않게 선거 자금을 지원하는 데만 집중하죠.”
비서실장 아저씨는 갑자기 헛기침을 하셨다.
손자와도 같은 내게 치부를 밝혀야 하니 머쓱하신가 보다.
“정치후원금의 경우 다양한 경로로 전달해 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꼬리표가 달려 있지 않은 자금을 전달해야 뒤탈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금을 따로 보관하고 있나요?”
“대선 기간에 사용하기 위해 매년 일정 금액의 돈을 세탁해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비자금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기업을 경영하기 위해선 일정 규모의 비자금이 필수였다.
대놓고 회사 자금으로 정치후원금을 냈다간 십중팔구 감옥행이니까.
“그룹 차원에서 만든 비자금이라고 해도 꼬리표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닐 겁니다. 그래서 저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정치후원금을 전달하려고 합니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나는 할아버지를 대신해 감옥에 가게 된다.
그러니 아주 완벽한 방법으로 정치후원금을 전달해 주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