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bastard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Episode. 57 절반과 절반이 하나되어 (3)
까맣게 물들어 버린 시야.
그 까맣기만 한 눈앞에 형형색색의 빛이 덧칠되었다.
“어, 어어……?”
지휘관이 황망한 소리를 냈다.
여태껏 함께 있던 각국의 인사들은 온데간데없이 저 홀로 별세계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그가 고개를 추켜들었다.
깨진 유리창처럼 조각나 흩어지는 하늘 너머, 우습게도 또 다른 하늘이 떠올라 있었다.
다만 그 하늘이 몹시도 붉었다.
그곳에서부터 웬 괴수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으아아악!”
지휘관은 온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당장에라도 핏물이 떨어질 것 같은 하늘 아래, 지상엔 불꽃이 넘실거렸다.
차라리 지옥도에 가까운 모습.
붉은 세상에 까만 것은 땅과 이름 모를 괴수들뿐이었다.
으적-
흉측한 외양의 괴수가 송곳니 빽빽한 아가리를 다물었다.
툭, 하고 땅 위에 떨궈진 인간의 팔이 처량하기만 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상황을 파악할 틈조차 없었다.
지휘관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죽는다! 죽는다고!’
사방을 휘감은 불길이 뜨겁다.
괴수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어두운 기운은 지독스러웠다.
그의 뜀박질에 공포와 절박함이 뚝뚝 묻어났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도 그는 지옥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지옥은, 자신이 충성을 다해 군역을 치르던 왕국이었으니까.
그곳이 곧 그의 세상이었으니 도망칠 구석 따윈 존재하지도 않았다.
수도 없이 밀려드는 괴수 앞에 왕국의 정병들은 무용지물이었다.
자국의 기사단장이 몸을 돌려 달아나다 불꽃에 휩싸였다.
빼어난 검술로 명성이 자자하던 어느 기사도 공포에 떨다 끝내 절명했다.
지휘관은 쉼 없이 달음박질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아득한 절망감.
산 채로 집어삼켜지는 백성들을 보면서도 그는 검조차 뽑아 들 수 없었다.
“빌어먹을! 이게 대체……!”
악에 받친 그의 절규가 끝에 가서는 잔뜩 억눌려 끝맺어지지도 못했다.
살기 위해 미친 듯 뛰어대던 발도 멈춰 섰다.
– 우, 으…….
절망과 공포가 가득한 땅 위에서, 지휘관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고 있다.
무언가 압도적인 것이 오고 있었다.
진즉부터 울리던 경각심이 이제는 고장 난 것처럼 발광을 부렸다.
“아, 아아…….”
깨어진 하늘 사이로 거대한 괴물이 몸을 들이밀었다.
그 흉측한 손.
흉측한 얼굴과 눈.
온통 까만 그것이 하늘의 균열을 가득 메워서, 이 세상에 칠흑 같은 밤이 도래하고 말았다.
“……끄르륵.”
더는 정신적 충격을 버티지 못했던 걸까.
게거품을 문 지휘관이 눈을 까뒤집곤 쓰러져 버렸다.
◈ ◈ ◈
끄륵, 끄르륵!
듣기 좋은 악기소리만 가득하던 연회장에 웬 거품이 보글거리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그 소리의 근원지는 바닥에 널부러진 지휘관들과 귀족들이었다.
악기를 켜던 악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뜬 것을 보며, 나는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쉿. 다들 꿈나라에 빠진 것뿐이니 조용히 있도록.”
그 꿈이 무척 사납고 지독하단 것까진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난 아라헬의 환영에 잠식당한 연회장의 인사들을 살폈다.
대다수가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소수의 몇몇은 사력을 다해 저항하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였는데, 루드비히와 지크를 비롯한 강자들이 그 경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사이에서도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내가 보여준 환영은 다가오는 재앙에 대비하지 못했을 적의 광경.
다시 말해 재앙(災殃)에 인재(人災)까지 겹친 종말의 한 장면이었다.
개인이 어떻게든 감당하려 하기엔 도무지 손을 쓸 방도가 없을 터였다.
나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너무 오랫동안 절망에 절여 버리면 아예 폐인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바란 건, 저들 스스로 이 세상의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하단 걸 깨닫는 것뿐이었다.
적당한 경각심과 적당한 공포.
그 정도야 십 초면 차고도 넘쳤다.
쿵.
발을 구름과 동시에 상급의 신격을 몸 위로 드러냈다.
“…….”
가장 먼저 눈을 뜬 건 루드비히였다.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그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가에 어린 충격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잠시간 그와 눈을 맞추고 있노라니, 널브러져 있던 인사들이 비명 같은 숨을 토해 냈다.
“허억, 허억……!”
그들은 땀에 범벅이 된 몸으로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귀족으로서의 체면도, 지휘관으로서의 위엄도 없었다.
그저 겁먹은 인간들만이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이제 정신 좀 차리셨나?”
넋이 나간 이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는 저들이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과 다르지 않았다.
간밤에 끔찍한 악몽을 꾼 이처럼 몸을 떨어 대던 지휘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요!”
언뜻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자존심이 상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외침 안에 진득한 공포가 들러붙어 있어서 초라하게만 들렸다.
“머지 않은 미래를 보여 드린 겁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천장 너머, 시시각각 금이 깊어지고 있을 하늘을.
“저것이 깨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다들 잘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의 나라는 쑥대밭이 될 것이고, 누구 하나 무사할 수 없겠지요.”
그러자 인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꼭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세상천지 어디에도 그런 불길한 괴물들은 없소. 이건 그저 덧없는 환영에 불과한…….”
주절주절 시끄럽다.
나는 자꾸만 진실 앞에 눈을 돌리려는 대귀족에게 ‘악연’을 들이밀었다.
『환영이…….』
『크흐흐!』
붉고 거대한 거인이 검날 속에서 소름끼치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으, 으으!”
일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그가 거인의 존재감을 거스르기란 요원했다.
대귀족의 주름진 입가에 재차 게거품이 흘러내렸다.
쿵!
이내 그가 혼절하고 말았다.
인사들이 한차례 술렁이는 가운데, 나는 입을 열었다.
“바렌을 덮친 두 번째 악몽. 그 악몽의 주인공이 바로 이 거인이었습니다. 아직도 외면하고 묻어 두려고만 하실 겁니까?”
참으로 아둔하고 아둔한 자들이다.
나는 한 번 더 환영을 보여 줘야 할지 진심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루드비히가 내게 물었다.
“검고 거대한 괴물, 그놈이 네 녀석이 말했던 마왕이란 것이냐.”
“그렇습니다.”
끄응-
억눌린 소리는 옆자리의 지크에게서 흘러나왔다.
“빌어먹게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어.”
진심으로 분한 듯 주먹을 꽉 말아 쥐기까지 했다.
“젠장!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형님.”
모리츠가 맞장구를 치기가 무섭게 아론과 기드, 폴크가 고개를 떨궜다.
그들 모두 환영 속에서 검을 들고 싸운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루드비히는 어땠을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장내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 들었다.
“……강하더군.”
어쩐지 분기 어린 음성.
그 짤막한 한마디에 인사들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셨다.
루드비히조차 어찌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 미래란 없다-라는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다.
흠.
뒤늦게나마 재앙이 다가옴을 실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리하르트 공. 그대가 보여 준 환영은 실체와 얼만큼의 차이가 있소?”
바렌티스 국왕의 물음에 악연 속 거인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그 거인에게 종속된 아라헬에게.
“환영이라 하여 과장된 부분은 결단코 없습니다. 오히려 진짜 마왕이 훨씬 더 끔찍할 겁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아라헬이 그려 낼 수 있는 환영은 자신의 힘에 비례한다.
그 말인즉 아라헬은 저보다 강한 마왕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는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끔찍한 환영은 모두의 가슴을 사납게 파헤치고 지나갔다.
“그, 그럼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뭡니까? 마땅한 대책이라도 있는 겁니까?”
인사들이 아우성을 쳤다.
무엇이 더 길고 짧은지를 알아보려는 속물적인 마음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제 코앞에 불어 닥친 불길을 보고 말았으니, 드디어 말이 통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애초부터 방도를 논의하기 위해 여러분을 불러 모은 겁니다. 설마, 전혀 모르고 계셨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실 테지요.”
말에 뼈를 담아 뱉었다.
찔끔한 이들을 보다가, 나는 이내 몸을 돌렸다.
“다들 심신이 지치셨을 겁니다. 즐거운 연회로 조금이나마 추스를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 이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문을 열고 연회장을 나섰다.
비록 지금은 저렇게나 한심한 모습들이지만 언젠가는 옛 정기를 되찾게 되겠지.
종교의 의의는 사람이 스스로 빛날 수 있도록 촉진하는 데에 있다.
물론 전부 다 그렇게 될 수는 없겠지만.
◈ ◈ ◈
그 다음날엔 연회가 열리지 않았다.
대신에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마침내 연회 따위나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걸 알아챈 듯했다.
“…….”
연회장만큼이나 넓은 회의실.
그 자리를 채운 이들은 변하지 않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침묵만 가득했다.
모두들 내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 대로 내가 나서 주었다.
“우선 어제의 무례는 용서해 주시길. 회의의 진행을 위해 꼭 필요한 절차라 생각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접어 사죄했다.
표면적이기는 했으나 원만한 진행을 위해선 이 또한 필요한 절차.
접었던 허리를 편 나는 냅다 본론을 꺼냈다.
“어제 제가 보여 드린 괴물들은 아시다시피 마계의 주민들입니다. 이 세상의 바깥에 거주하는 자들이지요.”
그 괴물들의 흉폭함을 재차 설명했다.
하늘이 열린다면, 그 틈으로 수도 없는 괴물들이 쏟아질 터.
“바텐베르크와 수많은 강자들이 나서서 막는다고 한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온 대륙이 쑥대밭이 될 진대, 대체 누가 누굴 지킬 수 있겠는가.
스스로의 몸은 스스로가 지켜야만 했다.
“저희는 그런 괴물들을 상대할 만큼의 병력이 없습니다.”
“호, 호르교는 마기와 상반된 신의 은혜를 지녔다 들었습니다. 부디 저희에게도 은혜를 나눠 주십시오.”
각국을 대표한 이들이 약한 소리를 주절거린다.
당연히 도와야지.
당연히 은혜를 나눠 줘야지.
“예. 저희 호르교에겐 그 불길한 존재들에게 대항할 힘이 있습니다.”
그 대가는 오직 신앙심.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었다.
믿음이란 필요할 때만 의지하고 평소엔 헌신짝처럼 버려 둘 하찮은 것이 아니다.
뱀 같은 작자가 신을 믿는다고 하여 사자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신을 믿는 뱀이지.
그런 자들은 대개 신의 가호 뒤에 자신의 이기심을 숨겨 둔다.
그리고 나는 아직 내 눈앞에 모인 이들이 진정 뱀인지 사자인지 가려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