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bastard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Episode. 58 호르의 군단 (1)
“크르륵……!”
누군가가 목울대를 긁는 듯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것은 마치 겁먹은 짐승의 그것과도 같았다.
용맹한 타이탄의 오크들은, 휴거의 왕관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보며 몸을 움츠렸다.
전장 위를 내달리던 강인한 무릎이 맥없이 굽혀졌다.
일평생 도끼와 거검만을 휘둘러 온 투박한 손이 땅을 짚었다.
전사로서의 자존심이 굴복하지 말라 다그쳤으나, 그들의 심장과 몸은 빛 앞에 몹시도 정직했다.
“호르 양반!”
오직 휴거만이 두 발로 선 채 왕관에 깃든 거대한 격을 반겼다.
따스한 빛이 휴거의 상처투성이 육신을 감싸 안았다.
온통 찢기고 터진 상처가 거짓말처럼 아물기 시작했다.
『핏빛 나무 부족의 마지막 전사여.』
『나, 호르가 너의 기도를 들었노라.』
위엄 가득한 음성이 일대의 공기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듣는 이로 하여금 숨조차 마음대로 쉬지 못하게 만드는, 알 수 없는 힘이 담긴 목소리였다.
자세를 낮춘 전사들의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반면에 휴거의 얼굴에는 웃음이 활짝 피었다.
“취익! 처음으로 내 기도에 답해 주셨구려. 대체 뭐가 그렇게 바쁘시오!”
그래도 내가 기사들 중에선 당신의 첫 번째 신도가 아니냐며, 휴거는 왕관을 두 손으로 번쩍 들고 선 호방하게 웃어 댔다.
수많은 대장군이, 강자와의 싸움을 일 순위로 여기는 오크들이.
심지어는 옛 타이탄의 군주마저 무릎을 꿇은 가운데, 오직 휴거만이 아무런 격 없이 빛을 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용맹한 전사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이렇게 잔뜩 움츠러든 채 땅바닥에 몸을 붙이는 건 그들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굽혀진 무릎을 피고, 땅을 짚은 손을 말아 쥐었다.
“크, 크르륵……!”
전사들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 선두에 크락타가 있었다.
온몸에 어찌나 힘을 준 것인지, 갈라진 가슴팍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하지만 옛 군주는 제 상처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크륵! 휴거, 그건 대체 무엇이냐!”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신…… 신께서 강림하신 것이야! 쿠르륵!”
눈을 부릅뜬 샤먼이었다.
다 늙은 노파는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한 채 고개를 조아렸다.
“이 하찮은 미물들이 감히 빛을 뵙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모든 경의를 담아 외쳤다.
그러자 오크들의 얼굴에 혼란이 떠올랐다.
“쿠익! 카, 카람이 인사한다! 일어서지 않는다!”
크락타의 참모이자 샤먼인 그녀는 오크들의 정신적 지주.
그들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부족의 어르신과도 같은 위치였다.
젊은 오크보다 월등히 많은 그녀의 지식은 타이탄이 왕국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상처를 치료하는 샤먼으로서의 능력은 전사가 더욱 즐겁게 싸울 수 있도록 등을 받쳐 주었다.
오크들에게 있어 반드시 뛰어넘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 크락타였다면, 카람은 저들에게 앞길을 제시해 주는 훌륭한 어른이었다.
그런 그녀가 온몸으로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대체 저 빛이 뭐길래.
신이란 게 뭐길래.
잠시간 갈등하던 오크 몇의 자세가 다시금 굽혀지려 할 때였다.
“전사는! 무릎을 굽히지 않는다!”
다 죽어 가던 크락타가 추상같은 음성으로 외쳤다.
그에 오크들이 화들짝 놀라 등허리를 바로 했다.
“다들 너무 어려워하지 마시오. 호르 양반은 전사의 긍지를 억지로 꺾을 만큼 야박한 존재가 아니니.”
그렇지 않소?
휴거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이 추켜든 왕관을 올려다보았다.
꼭 오랜 친구를 대하듯 친근한 태도였다.
사아아-
왕관에서 성스러운 아지랑이가 들불처럼 넘실거렸다.
그 아지랑이 한 줄기 한 줄기가 오크들을 휘감으며 지나갔다.
“…….”
크락타는 제 몸에 붙은 채 일렁이는 빛줄기를 내려다보았다.
갈라진 가슴이 회복되고, 꺼져 가던 생명이 다시금 활력을 찾아 가고 있었다.
어째선지 조금 전까지 숨통을 옥죄어 오던 빛의 위엄이 더는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 한 켠이 간질거렸다.
그건 날 때부터 군주로서 살아온 크락타로서는 처음으로 느끼는, 강자를 향한 ‘존경’이었다.
『내가 있는 곳이 곧 성역(聖域)이다.』
『용맹한 전사들을 억지로 무릎 꿇려 경배받는 것보다도 성역을 더럽히는 행위는 없으리라.』
신념과 긍지를 담은 너희들의 발은 결코 더럽지 않으며.
나는 너희를 핍박하고 굴복시키는 존재가 아니다.
왕관에 엉겨 붙은 빛은 마치 그리 말하는 듯했다.
“취익!”
우직한 얼굴을 한 휴거가 왕관을 들고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전사들이여.』
『머지않아 그대들의 투박함과 야성이 ‘용기’로서 기록될 전장이 펼쳐질 것이다.』
빛은 왕관을 빌려 자신의 뜻을 밝혔다.
『싸우다 죽은 자는 ‘영웅’으로 기록될 것이고.』
『살아남은 자는 ‘용사’로 기록될 것이다.』
용기, 영웅, 용사.
그 단어들은 전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매력이 있었다.
오크들의 숨소리가 절로 거칠어졌다.
멀기만 하던 천사들의 경고와는 달리, 곧 펼쳐질 전장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보이기 시작했다.
『타이탄의 새로운 군주이자 나의 기사, 휴거가 너희들을 그 전장으로 이끌 것이니.』
『진정한 전투를 원한다면 따르라.』
◈ ◈ ◈
휴거와 크락타의 박진감 넘치는 대결을 보았고, 승자의 염원을 따라 그 생명들을 이어 붙였다.
나는 턱을 괸 채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크들은 강하고, 억세다.
또 야만적이었으며 싸움과 투쟁을 좋아했다.
“그러니 인간과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인간과 오크는 서로를 적이라 여겼다.
하지만 나는 오크들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 원초적이고 직선적인 성정은 인간처럼 복잡하지 않다.
비록 규칙이나 격식으로 옭아맬 수는 없으나, 스스로가 세운 신념과 긍지는 무엇보다도 중요히 여긴다.
적으로서는 껄끄럽고 두려운 종족.
다만 그런 이들이 아군이 된다면 그보다 든든할 수가 없으리라.
“그러니까 더더욱 아군으로 만들어야지.”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군주가 된 휴거가 있고, 언제든 나와 뜻을 주고받을 수 있는 천사가 있다.
그들이라면 오크라는 족속을 어떻게든 구워삶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일단 내가 어느 정도 양념을 뿌려 두었으니까.
“성자님. 회의 시간입니다.”
잠시 상념에 잠긴 와중에 기드와 아론이 찾아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혹시 어디 편찮으십니까?”
뒤를 따르던 아론이 내 걸음걸이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썰미는 좋아 가지고.
“커흠, 다리에 쥐가 났지 뭐야. 신경 쓰지 마.”
사실은 계시의 후유증을 꾹 참는 중이었지만.
또 쓸데없는 걱정을 살 새라, 아론에게 대충 손을 휘저어 주곤 본궁의 회의실로 향했다.
◈ ◈ ◈
각국의 동향을 비롯해 하늘의 균열이 야기한 사회적 혼란까지.
바텐베르크의 회의실엔 여러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일전의 경고 이후, 곳곳에서 지원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심각한 건 각국이 앓고 있는 병력 부족 현상이었다.
왕국이 지니고 있는 병력은 한정되어 있는데, 적들은 하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질 판국이다.
성벽과 요새는 땅 위를 달리는 적들을 막는 역할이지 비를 막아 주는 우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애써 왕도와 대도시 몇 개만 지키면 무얼 할까.
왕국을 이루는 수많은 도시와 마을이 쑥대밭이 될 터인데.
그렇다고 모든 마을과 도시를 지킬 만큼 병력이 넉넉한 왕국도 없었다.
상황이 그러하니 궁지에 내몰린 나라들이 기댈 곳은 호르교와 바텐베르크밖에 없었다.
“기각. 저희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는 자신을 제2기사단장이라 소개한 자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회의실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기드와 아론, 모리츠마저 표정이 어두웠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수차례 강조했던 말을 다시금 꺼내 들었다.
“이건 전 세계적인 재앙입니다. 누가 누굴 도울 수 있겠습니까?”
손바닥으로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전부 막을 수는 없다.
이 경우에 손바닥이란 호르교와 바텐베르크였다.
그런데 내 말은 정론이지, 듣기에 좋은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네 말마따나 수많은 사람이 죽는 걸 보고만 있으란 거냐! 그걸 막으려고 우리가 모인 거잖아!”
모리츠가 괴로운 음성으로 외쳤다.
직후, 회의실에 적막이 맴돌았다.
모리츠가 다시금 입을 연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미안하다. 지금 제일 괴로운 건 너일 텐…….”
“대신에.”
“응?”
“손바닥으로 비를 전부 막을 순 없는 대신에, 폭우를 쏟아 내는 먹구름을 지워 버릴 순 있지. 거기까지 닿을 수만 있다면.”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과정에서 피뢰침 역할도 톡톡히 할 테고 말이야.”
기사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이들은 아직 ‘방주’를 알지 못했다.
난 고개를 돌려 묵묵히 앉아 있는 루드비히를 보았다.
“호르교가 남대륙에서도 큰 위상을 갖고 있다는걸 모르지 않으시겠지요.”
“에둘러 말하지 말거라.”
“바텐베르크는 마법사들과 힘을 합쳐야 합니다.”
신까지 믿게 되어 버린 판국에 마법사와의 협력은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루드비히와 바텐베르크의 기사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납득은 되지만 그리 달갑지는 않은, 딱 그런 표정들이었다.
이거 벌써 이러면 어떡하려고.
나는 움찔거리는 우려를 억누르곤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라플라스의 국왕께선 배를 제작하고 계십니다.”
“갑자기 무슨 배를 말이냐.”
“하늘을 나는 배, 일명 ‘방주’입니다.”
원탁 중앙에 놓인 양피지를 보며 펜을 쥐었다.
“능히 군단 하나를 태울 수 있는 거대한 배. 지금은 개발 단계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뿐이지만 완성만 한다면 두 척은 더 제작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빼곡히 적힌 글자들을 피해, 빈 부분에 세 척의 배를 그려 넣었다.
그 배들이 향하는 곳은 먹구름, 하늘의 균열이었다.
“저는 배 위에서 빛을 잔뜩 흩뿌릴 생각입니다. 그리하면 수많은 적들이 앞길을 가로막겠죠.”
끽, 끼긱…….
빗줄기를 그렸다.
배는 그 빗줄기를 헤치며 나아갔다.
“그리고 세 척의 배는 끝내 먹구름 속을 파고 들어갑니다.”
먹구름 속에서도 태양은 밝게 빛나리라.
그 빛에 홀린 어둠은 전처럼 빗방울져서 떨어지지 않고 이쪽을 향해 광분하여 달려들 것이다.
“과연…… 괴물들이 대륙에 쏟아지기 전에 저희가 직접 막아 낸다는 것이군요. 그런데 배가 진짜 하늘을 납니까?”
레오가 경탄하며 말했다.
그 얼굴에 터럭만큼의 두려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정말 배가 하늘을 날수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왕성했다.
나는 그 분위기 파악 못하는 호기심을 애써 외면했다.
“저희가 배를 타고 위를 향하는 동안, 각국의 병력이 집중된 요새들에서도 빛이 터져 나올 겁니다. 그리하면 방비가 약한 소도시나 마을의 피해를 줄일 수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다시 펜대를 움직였다.
“기사들의 전력을 두 척의 배로 나뉘어 편성할 겁니다. 마법사들과 백여 명의 엘프들은 세 척으로 나눌 예정입니다.”
투구를 쓴 인간과 꼬깔모를 쓴 인간, 그리고 귀가 뾰족한 인형의 그림이 각각의 배 위에 그려졌다.
“기사가 두 척이라면… 서, 설마!”
멍하니 그림을 보던 모리츠가 반색을 하고 외쳤다.
꽤나 그리운 친구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래. 조금 있으면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을거야.”
마지막 배에는 기사 대신 오크들이 탑승한다.
뿐만일까.
라플라스에서 완성된 배와, 낡고 허접한 오크들의 장비는 솜씨 좋은 명장들의 손을 거쳐 한층 진일보할 것이다.
그야말로 대륙의 모든 종족이 한데 모인, 이것이 ‘호르의 군단’이었다.